김건일: 바람이 지나는 길 (Trails of Wind)
2020.09.05 ▶ 2020.10.11
2020.09.05 ▶ 2020.10.11
전시 포스터
김건일
바람이 가는 길 2020, oil on canvas, 182x227cm
김건일
잊고 잊혀지고 지우고 2020, oil on canvas, 97x324cm
김건일
마음, 정원 2019, oil on canvas, 65x91cm
김건일
비 그친 여름 2019, 97x145.5cm
김건일
바람에 흩어진 날들 2018, 90x145cm
느리게, 왔던 길 다시 걷기
하루에도 몇 번씩 늘 걷던 길을 걷고, 같은 풍경을 마주한다. 그러나 매번 같은 풍경일지라도 원하는 그 만큼만 눈에 담기란 쉽지 않다. 발걸음과 흐르는 바람의 속도에 따라 늘 새로운 풍경이 만들어진다. 김건일 작가는 변하는 풍경을 흘려보내지 않고 그 언저리에 있는 힘을 마주하며 마음의 변화를 살핀다.
김건일은 유화로 다양한 레이어를 쌓고 덜어내길 반복하며 숲을 그려왔다. 주로 기억의 왜곡이나 과장, 각색에 대한 고민을 숲에 빗대어 물감으로 그린 뒤 손이나 천으로 닦아내며 숲을 표현했다. 그가 그린 숲은 단순한 풍경화가 아니라 기억이 빼곡히 쌓인 개념이었다. 처음 화면을 가득 채운 물감, 그 색면을 지워가며 드러낸 이미지, 첫 물감이 완전히 마른 뒤에 이를 덮은 또 다른 물감면,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를 닦아 표현한 장면을 순서대로 찬찬히 짚어보면 작가가 숲을 떠올리며 포개어낸 기억의 층위를 어렴풋이 따라갈 수 있었다. 예컨대 기껏 바른 두 번째 물감면이 어떠한 형상을 드러낼 때까지 이를 다시 닦아내는 과정은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아보려는 절실한 행위였다. (Leaf and Leaf, 2015) 망각을 덮으려는 강박 대신, 새로운 기억으로 화면을 채우길 시도하면서부터는 닦기보다 그려내는 것에 집중했다. 점을 찍고 이를 붓으로 펴 바르며 이어나간 것이 나무가 되고 숲이 되었다. 그 결과 캔버스에 압착된 잎사귀 대신 문질러 흐트러진 잎이 보였다. 유화로 밀도 있게 찍어낸 점과 이를 어그러뜨려 이은 붓질의 운동감으로 빛과 바람의 방향, 속도가 그려졌다. (Vogue Forest, 2015)
그러나 강박처럼 좇던 기억마저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여기기 시작하자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 변화가 생겼다. 김건일은 최근 들어 마음을 어떻게 추슬러 세상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에 집중해본다. 빽빽하고 울창한 숲 대신 그가 그리는 숲에는 이제 적극적으로 물이 흐르고, 바람이 분다. 물과 바람이 지나며 길을 내고, 나무를 휘게 한다. 이번 전시 《바람이 지나는 길》은 숲에 얽힌 기억과 망각에서 비롯한 두뇌작용을 ‘읽는’다기 보다는 숲을 그 자체로 ‘보는’ 것으로 유도한다. 숲의 특정 부분에 기억과 망각을 집약할 시기에는 한 화면에 여러 개의 이미지를 쌓아 숲을 좁은 프레임에 담았다. 따라서 다수의 레이어로 뒤덮인 평면을 가까이에서 감상해야 특정 장면에 얽힌 복잡다단한 기억을 더듬어볼 수 있었다. 한편, 최근 작업은 바람에 휘어진 나무라던지 물이 낸 길 등 거시적인 숲의 풍경을 드러낸다. 캔버스에 거리를 두고 감상할수록 색감이나 붓질의 밀도감을 짚어보는 것으로부터 벗어나 비로소 숲의 온전한 풍경이 보인다. 예측 불가능한 마음 상태를 오롯이 받아들이기 시작하니 변화무쌍한 자연의 흐름이 화면에 반영된다.
시선을 마음으로 돌려보는 김건일의 이러한 행위를 두고 탈주 라고 불러본다. 장기간 ‘거리 두기’를 실천하는 요즘, 기술의 개발이 앞다투어 요구되고 일상의 공백을 채우는 방안이 쏟아진다. 이런 시기에 누군가는 오히려 차분히 내면에 귀를 기울이고 창작의 본질에 질문을 던져본다. 예술가로서의 ‘소수자-되기’를 구현해보려는 태도가 김건일 작가에게는 새로운 시도의 자극제가 되었던 것일까? 이번 전시에는 평소 그의 작업에서 보기 힘들었던 드로잉과 설치가 돋보인다. < 스치는 기억, 2020 >에는 달리는 차창 밖, 예측 불가능하게 흘러가는 풍경을 담았다. 평소에는 지각하기 어렵던 먼 풍경이 달리는 차 안에서는 오히려 눈에 띄고, 가깝던 풍경은 알아챌 수 없이 흐려지는 것을 비유한 작업이다. 작가는 차창 밖 풍경처럼 변화무쌍한 마음을 잡으려 애쓰기보다는 이를 흘려보내며 새로운 것을 마주해보는 경험을 제안한다. 이는 속절없이 스치는 풍경을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이의 동력을 온전히 감각해보자는 태도에 가깝다. 작가는 납작한 풀 더미에 붓자국을 숨겼던 이전과는 달리, 붓질의 방향과 속도감, 심지어는 떨어지는 파스텔 자국마저 캔버스에 남겨 보기로 한다.
전시에서는 작가가 한 움큼 내뱉은 숨처럼 한결 여유로워진 캔버스의 여백이 눈에 띈다. 향을 담은 설치 작품과 회화 감상의 템포를 늦춰주는 시 또한 찾아볼 수 있다. “바람은 때로는 따스하게, 때로는 차갑게 다가와 매번 나의 다른 감각을 일깨운다.”라고 말하는 작가는 이제 시각 이외의 감각을 자극하는 것에 주목해보려 한다. 꽉 채워 완성도 있게 마감한 숲의 일부보다 여백이 있고 재료의 흔적이 남아있는 자연스러운 숲의 풍경이 전시된다. 김건일이 바람을 통해 느낀 마음을 캔버스에 시각화한다면, < 다시 못 올 몇 번의 그 계절, 2020 >에서 번지는 모호의 향은 숲에 부는 바람을 상상하며 후각을 자극한다. 고우리의 시는 푸른 숲을 문자로 천천히 짚어 보길 시도한다. 회화 작가와 조향사, 시인의 접속을 통해 각자 고유한 영역에서 ‘배치’ 중이던 창작 행위를 전시에 모아본다.
모두가 힘든 펜데믹 시기를 보내고 있다. 미래지향적 청사진도 중요하지만, 일상을 느리게 감각해보고 앞만 보던 시선을 잠시 옆으로 돌려보는 태도도 필요한 시점이다. 《바람이 지나는 길》은 변화의 자극으로부터의 탈주, 그리고 회화 작가로서 늘 지녀오던 기억이라는 개념의 배치를 잠시 벗어나 보는 탈주를 끌어내본다. “창작자로서의 진심을 되찾고 싶다”라고 말하는 김건일 작가의 마음을 따라 숲을 표현한 그림과 향, 그리고 시를 음미하며 우리에게 곁을 주지 않았던 올해 여름을 천천히 되새겨보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
글 ㅣ 김유빈 (아트센터 화이트블럭 큐레이터)
1973년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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