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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의 공간 Series중' 01 Archival pigment print, 2009, 개인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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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의 공간 Series중' 02 Archival pigment print, 2009, 개인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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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의 공간 Series중' 03 Archival pigment print, 2009, 개인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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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의 공간 Series중' 05 Archival pigment print, 2009, 개인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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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의 공간 Series중' 10 Archival pigment print, 2009, 개인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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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의 공간 Series중' 16 Archival pigment print, 2009, 개인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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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의 공간 Series중' 27 Archival pigment print, 2009, 개인소장
‘유리의 공간’ 촬영 장소는 사막을 배경으로 한다. 여기서 촬영한 여러 점의 사진들은 고도로 문명화된 도시를 떠나 모래의 지평선이 보이는 사막 한 가운데서 여러 명의 배우들이 펼쳐지는 이야기들로 구성된다. 사막이띾 자연을 무대 세트장으로 하여 자연스러우면서도 특이한 분위기가 연출되게 하였다. 또한 배우들의 행동이나 의상, 소품 등을 이용하여, 영화 적인 내러티브를 통한 이야기들로 작가는 인간 문명에 대한 의구심을 던지고 있다.
특별히 이 사진들은 구체적이거나 특정한 국가성이나, 지엽적인 지식을 배제하여 이국적인 정서를 보여주고 있는데, 그 어느 문명에도 속하지 않으면서도 모호하게 인간 문명의 흔적들을 남기고 있다. 그것을 작가는 중간지대, 혹은 모호한 경계를 통하여 문명에 대한 질문을 던지며 그러한 공간을 유리의 공간이라 정의한다. 유리의 공간이라 함은 마치 동물원이나 박물관의 전시되어 있는 동물과 문화재, 미술품 등을 인공, 또는 가공 하여 보여주는 것으로 유리라는 하나의 투명한 막을 통해 사라지거나 소멸화 하는 문명과, 현상들을 이야기화 하여 보여 주고 있다.
거기서 작가는 현실과 예술의 위치를 찾고 있다. 세상에는 명쾌한 것들보다 여러 지점이 교차하는 모호한 ‘경계’가 존재한다. 어쩌면 그 경계의 의미는 인류의 문명을 반추해서 볼 수 있게 하는 거리 두기로, 분명하고 명쾌한 주장을 제시한다기보다는 모호한 경계의 여지와 여분이 현대문명 속에 살아가는 인류에게 문명에 대한 필요한 의식과 역할을 제공한다고 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예술과 현실의 위치를 점철하는 것이며 관객들과의 여유 있는 대화를 제공한다는 측면에서 의미를 갖는다고 할 것이다.
유리의 공간
이미지를 파는 상인은 많은 식솔과 고가의 장비를 들고 저 멀리 모래사막으로 갔다. 지평선의 끝은 아무것도 없이 모래바람만 하늘로 날리고 있었다. 그 소리를 들어 보았는가. 잠시 바람이 멈추면 찡그린 이목(耳目)은 전에 갔던 그곳을 찾기 시작한다. 불편하다. 힘들다. 여기서 건질 게 없다면 고생과 빚만이 쌓일 것이다. 잠시 사막에 피어난 신기루에 실크로드를 횡단했던 우리의 선조를 회상한다. 유일하게 동양과 서양을 왕래했던 그들이 새로운 문명의 발견자들이다. 허풍쟁이 마르코 폴로(Marco Polo)는 사실과 판타지를 오고가며 언어를 통하여 세계의 그림을 날조하였다. 어쨌거나 그것은 인류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미지의 세계를 쟁취하기 위하여 그들의 도시를 끊임없이 강대하게 성장시켰다.
과연 거기에 그런 것이 실제로 존재하였던 것인가. 길고 긴 실크로드를 따라 상인이 가지고 온 물건들만이 신비롭게 포장되어 인간의 욕심을 키워 가고 있다. 과거에도 그러했을 터 여기, 여전히 변하지 않은 사막에서 멈춰진 시간의 발자국이 길게 늘어지고 있다. 한 사람이 무리에서 떨어져 검지 손톱만큼 작아졌다. 이제는 멈춰진 시간에 약간의 각색이 더해진다. 세심하게 배려된 연기자들이 춤을 춘다. 현대인이 아니고자 하며 현실의 무게가 걷힌다. 또렷한 인식은 아련한 지평선의 경계로 사라진다. 남은 것은 현실과 설정의 교집합, 어떤 무대가 되었다. 인류의 역사는 비극에서 시작되었다. 죽음과 절망, 운명이라는 카테고리에 갇혀 그것을 벗어나고자 분명하고 명쾌한 사고를 키웠다.
결국 인간의 투쟁에서 비롯된 편리하고 윤택한 매체의 발전이다. 한편으로는 저항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편리를 취하며 간사하고 이기적인 시선이 언제부터인가 우리의 눈을 가렸다. 자연이 주는 수평의 길이를 기억한다. 끝없이 펼쳐진 대지의 고요함. 인간이 만든 시끄러운 수직의 길이를 그 어디에도 비교할 수 없다. 문명의 현장에서 이렇게나 멀리 떨어진 이곳에 사람들은 배우가 되었다. 과거의 시절을 각성하고자 하는 게 아니라 정말이지 우리가 원했던 것은 대지가 주는 목가적 삶이었다. 이곳에서 주인공은 인간이다. 주인으로서가 아니라 자연이 부여한 서정적 그늘 아래서 하나의 그림을 만들어 내기위한 주요한 역할을 한다. 최소한 이 화면에서 그들은 무절제하지 않다. 짐작컨대, 그 장소에 대한 면밀한 감상과 해석이 선행되어 바로 그 위치에 놓기만 하면 되는 관찰자의 답사가 선행되어 있었다.
그의 화면에서는 비극적인 운명의 그림자가 없다. 또한 이상향을 쫓는 요정도 그 어디에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세상의 저편이 아니라 잊혔던 곳과 모든 것이 허락되는 세계다. 그곳을 중간지대라고 한다. 그 어디에도 그 어느 곳에도 마차가 멈추면 무대는 마련되고 그곳이 시선의 중심이 되어 공기를 환기시킨다. 오래전 저장 술의 발견으로 본적(本籍)을 점철하게 된 정착과 고착된 터전을 기억한다. 더 이상 이동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지평의 너머를 판단하였다. 시간의 흐름과 가물거리는 지평으로 그렇게 우리의 기억은 희미해져 갔다. 저 너머에는 진귀한 비밀들이 숨어 있을 것이다. 혹은 또 다른 세계가 펴져 있을 것이다.
가설은 이론이 되었다. 그리고 학문이 되었다. 학문이 제시하는 관점에서 기인한 비난의 눈초리는 증명된 시선에서만 가능하다. 그렇지 못하다면 속되고 미개하다. 완벽한 도시화, 완전한 논리는 가상의 현실에서도 그 어떤 오류가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두루뭉술한 원형의 시선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다. 거기서 모서리를 찾기는 참 힘들지 않은가. 그것을 좌표로 하여 야금야금 안쪽으로 물고 들어가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 사실 동그란 눈은 하얀 여백을 갖고 있다. 더불어 세상의 여백은 시선의 여백과 동일하여 이미지의 공간을 그렸다. 그 여백에 분명한 입장이 감춰져 있다. 그것은 말간 가능성으로 잿빛 하늘에 닿아 색깔을 무기력하게 만든다. 누구의 입장도 이곳에 들어오면 사막의 한 가운데로 젖어 들어간다. 사람들뿐만 아니라 사물들도 그렇다. 그리고 상식이라는 것도 그러하였다. 동그란 풍경, 무엇인가를 가늠하는 건 현실과 재현 사이가 거짓이라는 사실을 밝히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간섭하는 장소로 실제 그곳을 촬영했다는 것과 그 작업과정 또한 실재라는 사실이다. 빛이 유리를 통하여 공간을 적실 때 그 그림자도 색을 갖고 있는 빛이었다는 사실이다.
미술 비평가 김용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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