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길후: 혼돈의 밤

2021.07.21 ▶ 2021.08.22

학고재 아트센터

서울 종로구 삼청로 48-4 (소격동, 학고재) 1층, B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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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길후

    무제 Untitled 2021, 캔버스에 아크릴릭 Acrylic on canvas, 162x13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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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길후

    무제 Untitled 2021, 캔버스에 아크릴릭 Acrylic on canvas, 194x112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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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길후

    무제 Untitled 2021, 캔버스에 아크릴릭 Acrylic on canvas, 194x13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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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길후

    무제 Untitled 2014, 캔버스에 아크릴릭 Acrylic on canvas, 230x16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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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길후

    노자의 지팡이 Laozi_s Staff 2019, 나무, 합판 Wood, plywood, 205(h)x54x57cm

  • Press Release

    치유로서의 그림

    Ⅰ.


    ‘불광불급(不狂不及)’이란 말이 있다. 뭔가에 미치지(狂) 않으면, 미치지(及) 못한다는 뜻이다. 이 말은 인간 정신의 지고한 상태를 가리킨다. 무슨 일에 빠져 몰입된 상태가 오래 지속되는 상황이다. 예컨대 바둑에 미쳤거나 어떤 기예에 빠졌을 때 우리는 이 말을 쓴다. 그러나 좀 더 이 글의 논지에 가까운 예를 들면, 그림에 비유할 수 있다. 이 경우, 어떤 화가가 그림을 그릴 때 미친 듯이 빠져들지 않으면 경지에 오르지 못함을 뜻한다.

    내가 보기에 김길후가 딱 그런 사람처럼 보인다. 그는 그림에 미친 사람이다. 약간 과장하면, 밥 먹는 시간을 빼고는 온통 그림 생각에 젖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다작(多作)의 작가라고 부른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50호 정도 크기의 작품을 단 10분만에 그릴 정도다. 아주 빠르면 5분, 늦어봐야 30분이다. 그러니 그의 작업실은 넘쳐나는 그림들로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다. 화면이 온통 시커먼 검정색 일색(一色)으로.

    미국의 서부영화를 보면 권총을 빼는 주인공의 솜씨가 놀랍다. 눈 깜짝할 사이에 여러 명의 적을 쓰러트린다. 일본의 한 사무라이 영화에는 주인공인 맹인 검객이 휘두르는 칼에 적병들이 추풍낙엽처럼 쓰러지는 장면이 나온다. 어디 그뿐인가. 1950년대 자유당 시절 명동거리를 누빈 협객 시라소니(본명 이성순)의 싸움 솜씨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치는 장면을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맞아서 쓰러진 깡패들이 거리에 즐비했다는 전설같은 이야기가 세상에 떠돈다.

    작가의 작품을 논하는 글에 웬 싸움 이야기? 김길후에게 있어서 일획(一劃)이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다. 김길후는 오랜 기간 검정색과 흰색이 대비되는 단색조의 그림을 그려왔는데, 인물화가 주종을 이룬다. 그것도 거의 전부가 자화상이다. 김길후는 거울도 보지 않고 내면의 이미지를 이끌어낸다. 머리를 박박 깎은 모습이 누가 봐도 영락없는 김길후 자신이다.

    일획에 검정과 흰색이 자아내는 콘트라스트가 강한 화면 효과는 김길후 그림의 특징이다. 얼핏 보면 비슷해 보이기도 하지만, 그러나 거기에는 서로 다른 미묘한 차이가 있다. 김길후의 작품을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서는 그 차이를 변별할 줄 아는 능력이 필요하다. 그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가? 그때 그때 작용하는 미묘한 마음의 변화에서 온다. 그럴 때, 그 서로 다른 마음을 포착해서 표현하는 구상력이 얼마나 특출한가 하는 것이 탁월한 예술가와 그렇지 못한 예술가를 구분하는 시금석이 된다. 그것은 오로지 작품으로만 판명되는데, 김길후의 경우는 물론 전자에 속한다.


    Ⅱ.

    김길후는 허공에 긴 칼을 휘두르는 검객일 수도 있고, 흐드러지게 한 판의 춤을 추는 춤꾼일 수도 있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흔적이 있느냐, 없느냐’일 뿐이다. 검객이나 춤꾼은 행위를 드러내지만 흔적은 남지 않는다. 그러나 김길후는 화가이기 때문에 붓을 들어 행위를 하고 흔적을 남긴다. 그런 의미에서 김길후는 붓을 들고 흐드러지게 진한 춤을 추는 무당(shaman)이다. 신명에 빠져 붓춤을 추면서 잃어버린 먼 태곳적의 ‘영기(靈氣)’를 불러내고자 한다. 예술이 지닌 치유의 기능을 초혼(招魂)을 통해 오늘 이 자리에 임재하게 하는 샤먼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앞에서 잠시 살펴본 것처럼 숱한 덧칠로 이루어지는 서양의 그림과는 달리 김길후의 그림은 일획으로 이루어진다. 머리 속에 떠오른 영감과 이미지를 순식간에 화면에 옮긴다. 그것은 찰나에 이루어진다. 머뭇머뭇하다가는 이미지가 사라지기 때문에 순식간에 포착하여 일획으로 단번에 그려내야 한다. 전광석화처럼 이루어지는 그 동작은 서부영화에 나오는 총잡이의 속사(速射)를 닮았다. 아니, 그보다는 오히려 한국의 사극에 등장하는 검객의 칼솜씨에 더욱 가깝다. 그것이 곧 일획이다. 한 번의 결정적인 내리그음이 곧 일획인 것이다. 그것은 고도의 신체적, 정신적 수련에서 나온다.

    왜 오늘의 상황에서 일획론이 그처럼 중시돼야 하는가? 다름을 위해서이다. 수많은 같음의 범람 속에서 다름을 이루기 위해서는 각고의 노력 끝에 얻은 필법이 필수적이다. 1999년 김길후는 제2의 질적 도약을 위해 수많은 작품을 불태운 바 있다. 그리고 거듭 태어났다. 이제까지 그려 온 방식이 아닌, 전혀 새로운 방식의 그림을 위해 그 이전에 그린 드로잉, 수채화, 유화, 파스텔화 등등, 내용상으로는 구상화를 비롯하여 추상화, 그리고 80년대 당시 한창 유행하던 민중화에 이르기까지 모든 그림을 폐기한 것이다.

    그렇다면 새로운 화풍이란 과연 무엇인가? 그의 말에 의하면 “간단명료한 것으로 승부를 걸자”는 취지로 검정과 흰색을 주조로 한 종이 그림에 빠져들었다. 그 기간이 한 오 년쯤 되었다. 그러다가 마침 기회가 찾아왔다. 서울시립미술관이 주최한 [삶의 풍경]전(2004.8.19 - 9.17)에 초대를 받은 것이다. 이 전시는 서울시립미술관이 그동안 한국 미술계가 지나치게 추상화 일변도로 전개돼 왔으며, 미디어, 영상, 개념, 설치미술 등등에 편중돼 왔다고 판단, 소외된 장르인 구상회화에 주목한 기획전이었다. 김길후 는 황영자, 이흥덕, 임만혁, 공성훈, 남기호 등등 다른 구상화가들과 함께 이 전시회에 참가, 2백호에 달하는 대작 5점을 출품했다. 김길후는 이 전시회를 계기로 새로운 세계를 열어가기 시작한다.


    Ⅲ.

    김길후에게 있어서 새로운 출발이란 과연 무엇이었던가? 일획에 의한 검정색 일변도의 화풍이었다. 2000년 무렵부터 태동된 이 화풍은 김길후의 작업에서 이제까지의 그것과는 완전히 다른 전환기적 변화를 예고하는 것이었다. 가령, 2000년대 초반에 나타난 〈검은 눈물(Black Tear)〉을 보자. 이 연작은 김길후의 전체적인 검정색 그림의 태동을 의미한다. 그것은 어떻게 태어났는가?

    이른바 ‘금욕’의 상징으로서의 검정색은 한편으로는 그 반대급부로서 모든 것에 열려 있다. 색채학적으로 이야기하면 모든 파장의 색을 흡수하는 포용의 색인 까닭이다. 그 검정색을 어떤 연유로 자기 작업의 주조색으로 정했는지는 딱히 알 수 없으나, 다음과 같은 진술을 통해 짐작해 볼 수 있다.

    “중학교 때 ‘고전읽기’ 시간은 흥미로웠다. 그때 만난 ‘명심보감’은 나의 일상이 되었다. …… 감수성이 예민한 나이에 ‘마음을 밝혀주는 보배로운 거울’을 자주 읽어서일까, 나는 금욕주의자가 되어 있었다. 마흔이 넘으면서 인생에는 정해진 법칙이 없다는 걸, 도덕적 관습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혹여 그 억압이 그림으로 분출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 김동기(김길후), 〈작가노트〉 중에서 -

    김길후가 검정색을 주조로 삼은 이유의 이면에는 이처럼 금욕주의적인 사고가 똬리를 틀고 있었다. 그것은 김길후가 그림을 일종의 수행으로 생각하는 것과 일치하는 지점이다. 김길후는 그 이후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오로지 검정과 흰색 등 무채색으로 일관해 오고 있다. 거기에 추가되는 색을 꼽는다면 노란 기미를 띤 동색(bronze)과 붉은 기미를 띤 구리색(copper), 그리고 가끔씩 첨가되는 청색 정도다.

    김길후는 이처럼 스스로 단순한 색들로 제한한 정해진 범주 안에서 붓과 물감 등등 그림 도구들을 가지고 논다. 그에게 있어서 그림은 진지하고도 즐거운 놀이에 다름 아니다. 그는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자랐으며, 유년시절에 꽃밭에서 놀던 즐거운 추억을 지니고 있다. 꽃 중에서도 특히 백합꽃을 좋아했다. 그의 그림에 백합꽃이 자주 등장하는 이유이다. 아버지는 서예와 독서, 꽃 가꾸기가 취미였다. 김길후에게는 어렸을 때부터 웃는 버릇이 있었다. 그러한 습관은 어느덧 환갑에 도달한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렇기 때문에 외견상 그는 타인의 눈에 매우 낙천적인 사람으로 비추어진다.

    그러나 김길후의 성격이 그렇다고 해서 그림까지 그런 것은 아니다. 그가 검정색 그림을 그린 2000년 이후 약 20년에 걸쳐 제작한 그림들에 나타난 인물상의 분위기는 물론 밝고 낙천적인 것들도 더러 있지만, 어둡고 묵시적이며, 절망에 몸부림치는 인물들이 주를 이룬다. 나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자기 자신이라고 술회했다. 그러고 보니 둥근 대머리의 등장인물들 거의 대부분이 김길후를 닮았다. 그렇다면 그것들은 작가의 분신이요, 내면의 풍경이 아니겠는가. 그 풍경들은 잔혹할 정도로 고독하고 외로우며, 고통에 찬 기록들이다. 특히 〈검은 눈물〉 연작이 그렇다. 이 점에 대해 작가는 다음과 같은 진술로 당시 내면의 풍경을 고백하고 있어 주목된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그림은 2001년부터 2004년까지 그린 ‘검은 눈물(Black Tears)’ 연작이다. ‘Black’은 내 마음이 마치 무너져버린 폐허와도 같고, 상실감이 납덩이처럼 누르고 있을 때 탄생했다. 전시장에서 내 그림을 보고 누군가 그랬다. ”죽으려고 했는데 당신 작품을 보니 나보다 더 힘든 사람이 그림 속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희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내 그림이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을 주다니……. 슬픔은 더 큰 슬픔으로 치유되는가 보다. 나는 평화로운 고도문명 속에서 참담함을 느끼는 인간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 김길후, 〈검은 상처가 눈물로 빛날 때/작가노트〉 중에서 -

    위의 진술을 참고할 때 ‘치유의 기능’으로서 김길후의 그림과 이를 매개하는 사제 혹은 샤먼으로서 작가의 역할을 상기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러한 기능과 역할의 진원지는 과연 어디인가? 나는 작품의 전편에 흐르는 강력한 정념(pathos)과 검정색에 방출되는 묵시적 분위기, 그리고 때로 연민의 정을 불러일으키는 등장인물의 표정과 몸짓을 들고 싶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화면을 뒤덮고 있는 끈끈하고도 일면 섬뜩한 분위기이다. 샤머니스틱한 느낌에 가까운 그것이 아마도 필경은 치유의 원인이리라.


    Ⅳ.

    2016년도에 접어들자 김길후는 이제까지 전념해 온 회화의 영역을 벗어나 관심을 입체와 설치로까지 확장시켜 나갔다. 주변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자투리 합판이나 각목을 이용하여 삼발이형 인물상을 만든 것이다. 지금까지 5년간 대략 1백여 개에 이르는 작품을 제작했으니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다. 이 나무를 이용한 입체, 설치작업은 김길후의 분방한 상상력이 더욱 증폭돼 나타난 경우일 것이다. 이 삼발이형 작품은 정(鼎) 자를 연상시키는 중국의 제기(祭器)에서 형태적 기원을 찾을 수 있으며, 가깝게는 시골에서 흔히 보는 작대기로 받혀 놓은 지게의 모습, 그리고 의미론적으로는 고구려 벽화에서 보이는 삼족오(三足烏)에서 그 선례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개발한 이 형식에 기울이는 관심과 노력이다.

    김길후는 이 일련의 삼발이형 작품을 제작하면서 형식의 전개에 집중했다. 그것은 의미론적으로는 회화와 조각의 영역을 융합하는 형식이라는데 의미가 있다. 붓과 물감통을 들고 있는 이 추상적 형태의 인물상들은 자화상이다. 어떤 것은 완전히 추상적 형태를 이루고 있으나 또 어떤 것은 위 부분에 얼굴이 그려져 있어 인물상임을 암시한다.

    평면이 됐든, 입체물이 됐든 김길후의 예리한 일필휘지가 스치고 지나가면 순식간에 기운생동에 충만한 작품이 탄생하는 과정은 거의 신비에 가깝다. 길이가 무려 15센티에 달하는 평붓에 검정색 물감을 듬뿍 묻혀 캔버스 위를 한번 휘저으면, 예리한 칼날에 뎅겅 목이 달아남과 동시에 검붉은 피가 솟구치는 것처럼 순식간에 죽음의 묵시록적인 이미지가 탄생한다. 고도로 긴장된 순간이다. 그림을 그리는 순간에는 머리 속에 피가 솟구치는 전율이 온몸을 파고들면서 초긴장 상태에 도달한다. 여기서 다시 획(劃) 자가 칼 도(刀) 변임을 상기하자. 작가가 든 것은 붓이 아니라 은유로서의 칼이다. 그 칼로 단번에 내리치는(一劃) 것이다. 바로 그런 이유에서 김길후의 그림은 말하자면 죽임의 과정이자 죽음의 결과물이다. 죽음으로써 살아나는 이 역설의 미학! 그 피가름의 현장 한복판에 실행자 겸 목격자인 작가 김길후가 서 있다.

    묘사가 잔인하다고? 그러나 여기서 한번 곰곰이 생각해보자. 죽음은 곧 새로운 탄생이 아니던가. 고대인들은 저녁에 해가 죽으면 아침에 새로운 해가 태어난다고 믿었다. 낙엽이 땅에 떨어지면 그 이듬해 봄에 새싹이 돋아나지 않던가. 그런 맥락에서 볼 때 김길후의 묵시록적인 분위기의 작품들은 죽음을 딛고 일어선 새로운 탄생, 즉 창조의 기쁨을 구가한다.


    Ⅴ.

    무엇에 미친다는 것은 대상과 일체가 돼 가는 과정을 이름이다. 그것은 바람, 즉 원망(願望)의 마음이 너무나도 극진하여 두 개의 원이 점차 가까워져 하나의 원으로 합체되는 ‘투 문 정션(Two Moon Junction)’에 비견된다. 따라서 화가가 그림에 미치면 그림과 일체가 되는데 그 과정에서 강렬한 정신적 에너지(氣)가 터져나와 물감과 같은 물질로 전도된다. 따라서 이 과정에서 예술가의 정신은 무아(無我)의 상태에 빠지게 되며, 강렬한 엑스터시를 경험한다. 드리핑 작업 후에 잭슨 폴록(Jackson Pollock)이 “나는 내가 무엇을 그렸는지 모른다”고 한 발언은 바로 이 몰입의 상태를 두고 한 것은 아닌가 짐작해 본다.

    나는 김길후 역시 이와 유사한 경험을 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가 한자리에서 아주 빠른 속도로 그림을 그려나갈 때, 캔버스를 향해 휘두르는 붓이 예리한 소리를 내면서 허공을 가르는 검처럼 느껴지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죽음이 곧 새로운 탄생임을 확신하면서 말이다.
    ■ 윤진섭 (미술평론가)



    사르트르는 자신의 저서 『존재와 무』(1943)에서 “자아는 의식에 머무는 거주자가 아니다”라고 이야기했다. 무언가에 진정으로 몰두하게 되면, 의식은 비로소 저 먼 우주의 끝과 깊은 해저세계에 도달할 수 있다. 의식은 다른 사물처럼 주어진 정체에 머물지 않으며, 관습에 의해 고착된 본질을 넘어서는 탈존(脫存)의 움직임을 보인다. 의식에는 주인이 없다.

    후설의 선험적 현상학은 순수 의식을 탐구한다. 실상 자아가 의식의 주인처럼 보이는 것은 본연의 순수한 의식이 오염된 탓이다. 어린 아이는 몰입을 통해 자연스럽게 의식한다. 아이의 자아는 성장 과정에서 부모의 교육, 사회적 관습 등 외부 환경의 영향을 받고, 정신분석학에서 말하는 이드 및 초자아와 상호작용하면서 자라난다. 성인이 된 의식은 스스로 자아로부터 통제를 받는다고 착각하게 된다.

    예술 표현의 핵심은 작품을 통해 자아를 실현하겠다는 욕구를 지우는 데 있다. 니체에 따르면 인간의 자아는 아무런 목표 의식 없이 짐을 실어 나르는 ‘낙타’와 같은 상태로부터 관습을 부정하고 대항하는 ‘사자’를 지나, 선입견 없이 순수한 ‘어린 아이’의 모습으로 변신해간다. 아이는 창조의 행위를 한다. 공기놀이에 푹 빠진 아이의 마음처럼 그림을 그리는 행위에 순수하게 몰두할 때 비로소 자아를 비워낼 수 있다. 노동과 놀이가 일치된 상태이자, 의무감에서 벗어나 오로지 자신을 위하여 행하는 행위다. 바닷물에 휩쓸려 무너질 것을 알면서도 거리낌 없이 모래성을 다시 쌓아올리는 일과 같다.

    후설은 자아를 ‘선험적 자아’ 즉 순수 의식과 ‘경험적 자아’로 구분하면서, 그중 전자를 지향했다. 자아가 그림 그리는 주체를 통제하고 검열한다는 생각은 자아와 대상을 분리하여 바라보는 이원론적 태도를 전제한다. 이는 곧 경험적 자아다. 반면 후설이 강조한 선험적 자아는 비(非)자아의 상태를 가리킨다. 주체와 객체가 분리되어 있지 않으며 하나로 존재한다고 간주하는 일원론적 태도다. 화가의 자아는 그리는 행위의 의식을 검열하여서는 안 된다. 의식이 비(非)자아 상태에 이를 때, 그림은 비로소 현상학의 토대 위에서 창조된 작품으로서의 맥락을 획득한다. 동양의 물아일체(物我一體), 불교의 삼매(三昧)의 경지와도 맞닿는 생각이다.

    근작 화면에서 형상은 해체되지만, 이를 추상으로 규정할 수는 없다. 추상의 개념을 정의하는 일은 이원론적 태도를 고수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개념의 정의는 작가의 철학적 세계관에 기반하여 일어나는데, 그 기반의 구축 또한 주체와 객체를 분리하는 행위로부터 시작된다. 화면은 구상도 추상도 아닌, 나아가 구상일 수도 있고 추상일 수도 있는 모호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하이데거는 의식이라는 단어 자체를 부정했다. 나는 의식을 완전히 비워낸 상태를 확립하는 것이 작업의 가장 주요한 지점이라고 본다. 아이가 공기놀이에 몰입한 상태와 같은 마음을 투영하는 일이다. 행위만이 남을 때, 그림이 완성된다.

    도덕경에서 노자는 “도는 이루기 어렵지만 지키기는 더 어렵다”라고 했다. 그림을 그릴 때에도, 호흡을 취득하기 어려우나 그것을 체득하기가 더 어렵다. 장자의 ‘포정해우(庖丁解牛)’라는 우화가 있다. 포정(백정)은 19년이라는 세월 끝에 소를 잡는 방법을 터득했다. 칼을 망가뜨리지 않으며, 소에게 고통조차 주지 않는 경지였다. 포정은 완벽에 도달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 포정이 말하기를 “비록 도축에 능숙하다 한들, 매번 살과 뼈가 엉킨 자리에 이르러 또 다른 어려움에 처한다.” 그림을 그리는 매순간 관념을 떨치고 순수한 행위만을 행하고자 노력하지만, 자아는 늘 예기치 못한 순간에 개입한다. 빈 캔버스를 응시하는 순간마다 끝없이 두려워하고 긴장하며, 삼매의 경지에 이르리라는 노력을 멈출 수 없는 까닭이다.
    ■ 김길후

    전시제목김길후: 혼돈의 밤

    전시기간2021.07.21(수) - 2021.08.22(일)

    참여작가 김길후

    관람시간10:00am - 06:00pm

    휴관일월요일 휴관

    장르회화, 조각

    관람료무료

    장소학고재 아트센터 Hakgojae Art Center (서울 종로구 삼청로 48-4 (소격동, 학고재) 1층, B1)

    연락처02-720-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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