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포스터
권인경
넘어진 자리 1 2021, 한지에 고서 콜라주, 수묵과 아크릴물감, 136×176cm
권인경
넘어진 자리 2 2021, 한지에 고서 콜라주, 수묵과 아크릴물감, 136×176cm © 2021 In Kyung Kwon / dorossy
권인경
넘어진 자리 3 2021, 한지에 수묵과 아크릴물감, 61x83cm © 2021 In Kyung Kwon / dorossy
권인경
변곡점 1 2021, 한지에 고서 콜라주, 수묵과 아크릴물감, 142x72cm © 2021 In Kyung Kwon / dorossy
권인경
변곡점 2 2021, 한지에 수묵과 아크릴물감, 141x73cm © 2021 In Kyung Kwon / dorossy
권인경
피어난 틈 1 & 2 2021, 종이에 수묵과 아크릴물감, 24×15.5cm (각) © 2021 In Kyung Kwon / dorossy
넘어진 자리
매번 다니는 시골 길을 이미 알고 있는 버스 기사는 굴곡진 길을 갈 때마다 몸을 왼쪽으로 틀어야 하는지 오른쪽으로 틀어야 하는지를 알고 있어서 자연스럽게 그 흐름에 몸을 맡긴다. 그렇지만 그 동네에 처음 온 사람은 길의 굴곡을 알지 못하기에 사정없이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무방비로 멀미를 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 흐름을 읽어내는 것이 주역이라 배운 적이 있었다. 삶의 전반적 흐름은 이렇듯 주역으로 예측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인생에는 생각보다 예상치 못한 변화의 지점들이 곳곳에 놓여 있다. 여기서 나는 예상치 못하게 넘어져 버리는 그 순간들에 대해 생각을 해보았다.
롤러코스터나 바이킹을 처음 타면 하강 때 예측할 수 없어 더 무서움을 느낄 수밖에 없다. 두 번째는 어느 정도 예상을 하기에 그런 무서움까지는 느끼지 않게 될 것이다. 그냥 그 내려감을 예상하고 흐름에 몸을 맡기게 될 것이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들이 모두 처음이다. 어느 나이든 유명 배우도 그런 이야기를 했었다. 나도 이 나이가 처음이라고. 인생의 모든 일들은 절대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어느 정도 예측이 가능하다 해도 중간에 그 어떤 변화의 기점이 생길지 예상하기 힘들다.
넘어진 자리에 대한 이번 전시는 이런 생각에서 출발을 했다.
지금 닥친 현재의 순간들은 모든 이들에게 처음의 경험이다. 그래서 예측과 다른 상황에 놓일 때 넘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거기서 멈추기도 하고 또는 새로운 길을 발견하기도 하면서.
살면서 붙잡으려고 애쓸 때 오히려 잘 되지 않다가 놓아버리면 되었던 순간들.
넘어진 그때에 오히려 새로운 길이 발견되는 순간들.
최선이라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닐 수도 있음을 깨닫고 쉼을 택하는 순간들...
우리는 넘어진지 모른 채 억지로 나아가려 하거나 넘어진 것을 알면서 피하기도 한다. 넘어진 상황을 직면하고 인정하고 다시 나아갈 수도, 그 자리에서 멈추고 쉼을 택할 수도 있는데 말이다. 나아가는 것만이 답도 아니고 멈추는 것만이 정답도 아니다.
넘어진 그곳이 쉼의 자리일수도, 도약의 자리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결국 어떠한 형태이든 넘어진 그 자리는 새로운 전환점이 될 것이다.
인생의 방향성에 변화가 피어나고 있는 그 자리가 바로 변곡점(Point of inflection)이다. 진퇴가 그리고 성패가 공존하는 자리. 상황이 새롭게 급변할 수도 멈출 수도 있는 자리인 것이다.
살아남기 위해 변화의 무게를 절감하고 넘어진 것을 깨달을 때 새로운 변화는 시작될 수 있고 이는 새로운 끝이 되기도 한다.
생물의 성장을 그래프로 표시한 ‘시그모이드 곡선’(Sigmoid curve) 이라는 것이 있다. 처음에 완만하다가 급속히 성장하는 부분을 거치고 마지막에 서서히 성장 후 정지하는 생장의 S 자형 곡선. 정지하기 전 새로운 도약을 이룰 수도, 멈출 수도 있는 그 지점에서 넘어져 있을 때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과거에서 벗어나 판을 뒤집고 새로운 상승곡선을 창조하기 위해 불안한 자유를 택하든, 과거의 영광에서 멈춰 쉼을 가지든 그것은 타의에 의한 것이 아닌 정답이 없는 자신의 자유 선택이다.
인생의 방향에 변화가 생기려는 순간,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무엇을 쥐고 어떻게 나아가야 할까. 흔들리기도 하고 엉키기도 하면서 우리는 멀미를 할 것이다. 넘어진 그 곳에서 멈추든 나아가든.
2021. 10. 권인경
권인경 KWON In Kyung 은 꾸준히 도시를 그린다. 2005 년 첫 개인전에서 작업을 선보인 후 2021 년 오늘까지, 그의 작업에서 도시는 빠질 수 없는 화두이자 소재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도시에서 나고 자랐고, 지금도 살고 있다. 현대도시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고층빌딩과 고층아파트가 즐비한 도심에서 나고 자란 그에게, 도시를 그리는 것은 어쩌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의 도시가 특별한 것은, 현대적이고 서구적인 이미지가 강한 고층건물로 가득한 도시 풍경을 전통적인 동양화 기법으로 동양화 재료(먹)와 서양화 재료(아크릴물감)를 혼합하여 그려내기 떄문이다. 동양화와 서양화를 구분하는 것이 큰 의미가 없는 지금이지만, 장지에 먹과 아크릴물감, 캔버스에 먹과 아크릴물감으로 동양화 붓을 사용해서 그려낸 도시 풍경을 보는 것은 여전히 조금은 낯설고도 매력적이다.
여기에 한 가지 더, 권인경은 동양화 재료와 기법으로 한 작품에서 만나기 흔치 않은 콜라주(collage) 기법을 회화 작품에 사용한다. 콜라주는 20세기 초 피카소와 브라크 등의 입체파 화가들이 인쇄된 종이나 신문 등을 오리고 찢어 붙이는 파피에 콜레(papier collé) 기법을 사용하면서 시작된 현대미술 기법 중의 하나이다. 권인경은 자신의 도시에 고서를 찢어 붙여 콜라주하면서 그림에 시간과 이야기를 더해준다. 동양화를 전공한 작가가 왜 작업에 콜라주 기법을 사용하냐는 질문에, 그는 단순히 도시의 외관을 그리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림에 누군가의 일상을, 누군가의 삶의 이야기를, 누군가가 보낸 시간을 더해주고 싶었다고 했다. 그래서 그냥 아무 종이가 아닌 오래된 고서(古書)를, 고서 중에서도 잡설(雜說)을 주로 찾아 구매하여 이를 작품에 더한다고 했다.
그래서 그런 것일까. 그의 도시 풍경은 사람의 향기가 난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풍경에 사람이 없다고 하지만, 굳이 그리지 않았을 뿐이지 도시 속 건물 안은 당연히 사람들이 점유하고 있다. 권인경의 도시 풍경은 매우 도회적이고 세련되었으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투박하고, 다정하다. 어쩌면 그것은 도시에서 나고 자란 그리고 여전히 살아가고 있는 작가의 도시에 대한 애정과 그가 그 안에서 경험한 것들에 대한 기억이, 그가 귀기울여 듣고 담아내려 하는 타인의 이야기와 함께 그의 도시 풍경 안에 담겨 있기 때문일 것이다.
권인경의 도시에 대한 관심과 애정은 그가 꾸준히 발표한 개인전의 제목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도시_일상의 삶(2005)>, <도시_변화 그리고 반영(2006)>, <도시_시간의 공존(2007)>, <도시_순간의 지속(2009)>, <도시_조망과 은거의 풍경(2011)>. 그는 ‘도시’라는 큰 제목 아래 부제로 그가 도시를 대하는 태도와 바라보는 시선을 설명했다. 그를 둘러싸고 있는 도시를, 고층아파트와 고층빌딩으로 빽빽한 서울의 도심 풍경을 다양한 구도와 기법으로 그려내며 발전시켰다. 오로지 빌딩들로만 가득찼던 그의 도시는 어느덧 물이 흐르고, 간간이 나무와 숲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눈 앞에 서있는 건물들의 수직성이 강조되는 풍경들을 그리던 작가는 어느덧 건물을 위에서 아래로 내려보며 조망하며 보기도 하고 조금 비스듬히 누운 시선으로 보고 그려내기도 했다. 그리고
그리고 오늘, 그는 <넘어진 자리 Sigmoid Curve(2021)>라는 조금 뜻밖의 제목으로 새 작업을 선보인다. 참으로 무던하고 성실하게 차근차근 작가의 길을 가던 그가 이번 전시를 준비하며 염두에 둔 것은 ‘변곡점’이었다고 했다. 미대에서 동양화를 전공하고, 모교 대학원에 진학하여 석사와 박사 과정까지 마친 후 작업과 강의를 병행하며 꾸준하게 각종 공모전과 지원사업에 도전하여 선정되고, 적어도 1~2 년에 한번씩 정기적으로 개인전을 치러내며 동시에 수많은 기획전과 그룹전에도 훌륭히 참여해냈던 열정과 성실의 아이콘인 그가, 잘 가고 있는 줄 알았던 그가 갑자기 넘어진 자리라니. 쉼없이 잘 달려가고 있는 줄 알았던 그에게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숨이 찰만도 했다. 잘 해내고 있었지만, 조금씩 잘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지만, 그가 원하는 속도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니었고, 언제나 원하는 방향으로 갈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달려간 곳이 생각했던 곳이 아닐 때가 있었다. 최선을 다해 달려간 곳이 최선이 아니었음을 알았을 때, 우리는 넘어지고 만다. 혹은 생각지 못한, 예샹하지 못했던 타격을 입고 생각지 못한 곳에서 넘어지기도 한다. 예상을 했어도, 예상이 빗나가 타격을 입고 넘어지기도 한다.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그 넘어진 자리에서 우리가 하는 그 다음의 행동이다. 넘어진 것이 대수인가. 툴툴 털고 일어나면 된다. 넘어진 자리에서 뒤도 한 번 돌아보고, 앞도 다시 한 번 쳐다보고 다시 나아가면 된다. 가려고 했던 곳이 아니었다고 속상해 할 것도 없다. 그저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다시 힘차게 나아가면 된다. 뒤돌아 보는 시간이 길어도 되고, 또 돌아보지 않으면 어떠한가. 어쨌든 우리는 가야 할 것인데. 주어진 시간과 공간 안에서 취사선택하며 살아가는 우리의 삶에서, 한 번쯤, 두 번쯤, 혹은 여러번 넘어진들, 다시 일어나면 되지 않겠느냐고 이야기하며, 작가는 S 자로 그려지는 식물의 생장곡선 Sigmoid Curve 를 예로 든다.
권인경에게 2020 년은 새로운 출발점이 된 해였다. 학교를 졸업한 후 처음으로 소속기관이 생겼다. 그 곳에서 작업도 하고, 학생들도 가르치며 이제 안정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다. 안정적인 것은 당연히 좋은 일이었지만, 전에는 없었던 의무와 책임도 따라왔다. 새로운 일과 환경에 적응하는 것은 흥미로우면서 동시에 쉽지 않은 일이다. 그리고 당연히, 매우 자연스럽게 작가의 작업에 영향을 미친다. 권인경의 작업에 새로운 내용과 형식이 나타났다. 사실, 그가 새로운 형식을 찾아 다양한 실험을 한 것은 이미 여러 해 전부터이기는 했다. 없는 시간을 쪼개 컴퓨터그래픽을 배워 서툴지만 영상작업도 선보이고, 설치작업에도 도전했다(2018). 도시의 외관을 그리다 조금씩 도시 안의 집과 방으로 들어가 실내도 함께 그리기 시작했던 작가는 이제 고개를 돌려 도시를 둘러 싸고 있는 산과 숲도 그리고, 도심의 가로수와 집 안의 화초에도 눈길을 주었다. 집과 건물만 그리던 그가, 이제 나무와 풀, 강과 호수만 있는 산수를 그리기도 한다. 물론, 그렇다고 도시가 그의 관심에서 멀어진 것은 아니다. 앞만 보고 묵묵히 나아가던 그는 이제 넘어진 자리에서 한 숨 돌리고, 뒤도 돌아보고 또 앞도 한 번 더 쳐다볼 줄 알게 되었다. 다른 이들의 시간을 자신의 그림에 더하여 담고 싶다는 생각을 붙들고 있지도 않는다. 어떤 작업에는 고서 콜라주가 있고, 또 어떤 작업에는 그냥 그림만 그렸다. 그렇게 그는 신나게, 새로운 것들을 시도하고 실험한다. 무엇보다도 작가는 그 어느때 보다도 그리는 즐거움에 푹 빠져있다고 했다. 자신이 선택했지만 새롭게 주어진 위치가, 그림이 아닌 것에 대한 책임과 의무가 그에게 그림에 대한 새로운 자극과 애정을 북돋아 주는 계기가 되었다. 변화를 주어도 될까, 다른 길로 가보아도 될까, 그러다 넘어져도 괜찮을까 조심스러웠던 그에게, 이 새로운 자리는 괜찮다, 넘어져도 된다, 넘어진 자리에서 잠시 숨 돌리고 툴툴 털고 일어나면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그가 아주 잘 넘어졌다가 힘차게 일어서고 있다고, 새로운 목적지를 향해 잘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그의 <넘어진 자리 Sigmoid Curve>를 통해 확인하고, 확신하게 된다.
얼핏 보면 많이 변한 것 같지만 여전히 그의 작업만이 가지고 있는 기운과 결이 살아 있는 넘어진 자리 Practicing Patience 와 변곡점 Sigmoid Curve, 의도치 않은 Unintentional, 피어난 틈 Blooming Gab, 새로운 계절 New Season, 찬란한 낙하 Splendid Fall 가 우리의 눈과 마음을 풍요롭게하고 안정되게 해준다. 권인경의 <넘어진 자리 Sigmoid Curve>는 그렇게 단단하고 힘차게 작가의 새로운 찬란한 시대를 예고하고 있다.
- 임은신 (큐레이터_도로시 대표)
1979년 서울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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