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현주
SWING 캔버스에 아크릴채색, 과슈, 130.3 X 162cm, 2010, 개인소장
장현주
Truth 장지에 아크릴채색, 112×148cm, 2010, 개인소장
장현주
Gateway 장지에 아크릴채색, 과슈, 먹, 분채, 112×148cm, 2010, 개인소장
장현주
Voice in the air 캔버스에 아크릴채색, 과슈, 먹, 89.4×130.3cm, 2010, 개인소장
장현주
The saint 캔버스에 아크릴채색, 과슈, 먹, 89.4×130.3cm, 2010, 개인소장
장현주
Cloud 9 캔버스에 아크릴채색, 과슈, 먹, 75×162cm, 2010, 개인소장
장현주
먼 북소리 장지에 먹,아크릴,과슈 , 53X79cm, 2010, 개인소장
장현주
The Birth2 장지에 먹, 과슈,아크릴 , 89.4X130.3cm, 2010, 개인소장
장현주
The Birth 1 장지에 아크릴,과슈,먹 , 89.4X130.3cm, 2010, 개인소장
Swing, 삶의 표면에서 미끄러짐에 대하여
조은정(미술평론가)
장현주의 화면은 그 앞에서 멈칫거리게 하고, 선뜻 말을 내뱉기에는 망설이게 하는 힘이 있다. 그는 관람자 모두를 불러모아 소통하려는 듯 말을 내뱉고 고개를 끄덕이게 하고, ‘이제 당신이 말해 보시지?’라고 한다. 헌데 당황스럽다. 정작 작품 앞에서 작가의 고백을 들어주는 인물로서만 존재하는 확실한 타자인 관객인 나를 발견하는 것이다. 이렇게 흡입할 듯 끌어들이면서도 강하게 밀쳐내는 강력한 자장이 자기를 찾아가는 여정으로서 자기 고백적인 세계를 형성하는 여타의 작가들과 장현주를 구분짓는 경계이다.
흔들리며 부유하는 일상은 공동의 경험을 제거한 자신의 욕망, 관계에 대한 흔들리는 욕구이기에 늘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 하지만 평안하고 완벽해 보이는 현실로서 삶의 표면에서 살짝 미끄러져 들어가는 과거의 작은 사건들은 타인과 진정한 관계맺기가 가능한 것인가에 대한 질문으로 가득하게 만든다. 들뢰즈는 사건이란 의미와 무의미 사이에 생성되며 삶을 구성하는 복잡한 관계는 깊이와 높이, 표면의 관계를 통해 형성된다고 했다. 장현주의 화면은 ‘Swing’이라는 개념을 노골화하여 이 깊이와 높이가 맞부딪혀 진동하는 그 흔들림에 대한 보고서임을 명확히 한다.
형상과 텍스트로 이루어진 그의 화면은 자신만의 해독 방식을 통해 읽어야만 하는 코덱스로서 그의 일상을 들여다보려는 관자의 관음증에 정면으로 도전한다. 자기 노출증의 화면들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그의 화면은 드러내는 것과 숨기는 것, 원하는 것과 거부하는 것,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공존하는 표면이다. 그럼에도 그의 서술방식은 나레이션적 구조가 아닌 순간적이며 애매모호한 개념의 조합들로서 불연속적이어서 무의식과 의도의 경계를 넘나들며 초현실적 구조에 놓인다.
세 사람이 나란히 서 있는 화면을 보자. 왼쪽 인물은 “항상, 함께, 영원히”라고 말하는데 몰골법(沒骨法)을 이용하여 겉과 속이 하나로 표현된 인물이다. 가운데 인물은 “난 널 믿어”라고 말하는데 바느질의 홈질처처럼 점선으로 테두리져 있고 바닷물처럼 소용돌이치는 내장은 검은 액체를 흩뿌리고 있다. 속도감 넘치는 색선으로 그려진 오른쪽 인물은 “사랑”이라 외친다. 그의 또 다른 말풍선에는 물잔에서 엄청난 양의 물이 쏟아져 나오는데 검정 바탕에 붉은 글씨의 “영혼”이 떠오르는 가운데 인물의 말풍선과 X자로 교차된다. 가운데 인물의 왼쪽 인물과 맞닿은 장갑 같은 오른손, 그리고 왼쪽 인물과 맞닿아 나무처럼 자라나는 손은 고정적인 입지를 벗어난 포용하는 인간관계를 상징하는 듯하다. 컵에서 쏟아지는 엄청난 물의 실체는 성수(聖水)이다. 머그잔에 담긴 성수의 이미지는 정화시키고, 상승케 하는 힘이라기보다는 ‘정신’이 존재하는 현실을 굳건히 하는 매개물이다.
넘쳐흐르는 성수가 중심에 등장한 화면이 있다. 커다란 머그잔에 담긴 성수가 넘쳐 흐르자 몸을 담그고 있는 가운데 인물을 두고 우측 상단에는 성수를 두 팔로 들어올리는 세 사람과 같은 동작을 하는 두 사람 아래로 노를 저어 움직이는 배가 있다. 배의 좌우에는 희미한 자국으로서 인물이 존재하고 그 아래 성배를 향해 손을 뻗는 쭈그려 앉은 점선의 인물이 있고 넘치는 성수에 몸을 담은 인물을 쳐다보는 인물은 희미한 형태로 나타난다. 화면 우측 하단에는 색색의 동아줄이 얽혀 있고 좌측 하단 가장자리에는 바깥을 향하여 인물이 서 있다. 주변과 경계에 대한 작가의 고백은 사라져간 많은 인물들이 차지하는 중요성만큼 여백에 펼쳐져 있음을 본다. 표면에 미끄러져가기의 도구로서 안온하며 평화로운 삶의 일상을 에너지가 넘치는 유동물인 성수로 확인하는 것이다.
에너지 넘치는 폭발력을 지닌 매개로 작가는 또한 소리를 사용하고 있다. 그의 화면에서 인물들은 종종 헤드셋을 끼고 나타나는데 자기 소리를 극대화시켜 들을 수 있는 혹은 자기 소리를 듣지 않고 맘껏 내지를 수 있는 도구인 헤드셋을 착용한 인물은 작가 자신일 터이다.
헤드셋을 끼고 뫼비우스의 띠처럼 영원히 풀리지 않는 삶의 일상에 대고 소리치는 화면은 작가 자신의 일상에 대한 소리지르기, 감정의 표출을 의미할 것이다. 화면 왼쪽 하단에 위치한 볼링핀이 쓰러질 때 그녀가 외쳤을 “스트라이크!”라는 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것도 이러한 청각의 시각화 덕분이다. 달팽이가 아주 느리게 향하여 가는 작은 기물 안에서 사방으로 흩어지는 그 화려한 색의 분출 앞에서 불꽃놀이의 펑 하는 예외적이면서도 들뜨게 하는 소리가 온몸을 감싼다. 한편 분출되는 색의 스트로크가 중심에 자리한
도로가 이어진 커다란 다리, 허니문카와 색띠가 둘러진 공, 총석정처럼 바다에 뜬 섬, 고속도로 휴게실에서 만나던 빨강 플라스틱 의자, 점점이 뜬 검은 섬과 반복되는 계단, 튜브를 허리에 두른 인물들. 작가는 훌훌 떠나서 여행을 하고 싶다고 했고 이 모든 것은 마음 속에 떠오르는 여행의 추억들이다. 장지 바탕 위에 무채색의 얼룩은 구름 같기도 하고 일상의 울타리에서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연기 같은 몽상으로 보이기도 한다. 이 위에 선으로 그려진 꼬리에 꼬리를 무는 연속적인 이미지들은 시간이나 깊이, 높이의 순서가 아닌 그저 마음에 피어나는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각인된 기억들이다. 사건발생의 시간이 아닌 의식의 흐름으로서 순차가 정해진 이들은 명백히 자동기술적이며 초현실의 구조를 띤다. 그래서 화면 우측 하단의 작은 공간은 출구이자 입구로서 오롯이 하나의 공간 개념이자 모든 것의 생성과 소멸을 의미한다. 이 ‘좁은 문’은 대지와 구름을 소통케 하는 통로이자 일상을 떠나고자 하는 욕망과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아들이는 현실에 존재하는 몽상의 열쇠이다.
헤르만 헤세는 <관찰, 해는 저문다>에서 하늘에 무늬를 그리고 있는 구름이 언뜻 처음에는 가장 어두운 곳이 깊은 곳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상 구름에서는 그와 반대임을 지적하였다. 밝을수록 깊고 어두울수록 얕은 곳인 이 구름의 세계는 은유적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직접 위용을 드러내기도 한다. 화면 우측 하단에 아름다운 색점이 뿌려진 위에 하얀 날개의 천사가 서 있고 그 머리 위에는 촛대에서 가져온 이미지인 별모양의 입방체가 있는 화면은 <동방의 별>이다. 이 별모양 위에는 인체모양의 초가 흘러내리고 있다. 셍텍쥐베리가 말한 스스로를 태워 주변을 밝히는 초 혹은 숭고함의 속성을 가시화한 것이다. 그 왼쪽 아래에는 주둥이 부분에 ‘happy’라는 단어로 설명되는 파란색 말이 있고 그 위에 앉은 인물이 아래를 내려다보는데 1225라는 숫자가 적혀있다. ‘road’라 적힌 짙은 구름 위의 인물들과 무관한 듯하지만 그 존재 하나하나가 있어 완성되는 이야기 구조이다. 도상에 기대지 않고도 수태고지와 성탄을 알아볼 수 있고, 되돌아 생각해보면 너무나 미안해서 슬프게 기억되는 이 성인의 삶을 내부에서 도출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의 화면 전체에서 드러나는 얼룩이나 옅은 무채색들은 물의 움직임, 에너지로서 습윤함을 보여준다. 바탕인 대지에 뜬 ‘대지의 구름’이다. 바슐라르가 말한 “물의 형태나 운동으로서” 미끄러지는 표면을 지닌 구름은 현실을 나타내기에 안성맞춤인 것이다. 미끄러운 표면에 위치한 형태들은 가시적인 현상계의 표상들이다. 하지만 그의 구름은 본질적으로 땅에 스며든, 혹은 땅에서 솟아난 세계의 구조로서 존재하는데 무한한 경외심을 가진 경건함으로, 십자가나 진리 혹은 영혼 같은 언어들과 어울어져 성역(聖域)으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무한공간의 여백 위에 자리한 얼룩은 샷을 날리는 그린이나 심연을 알 수 없는 망망대해이기도 하며 어머니 자궁과 같은 유기적이며 뭉클뭉클한 내장기관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등짝에 304라는 숫자가 적힌 뒤로 돌아선 인물이 바라보는 이 세상은 그의 뇌 속에 위치한 감각과 인지에 의해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상을 분리하고 규정지을 것이다. 무엇보다 이 화면에서 눈을 끄는 것은 작은 나룻배를 연상시키는 형태 속에 담긴 두 그루의 나무이다. 그들 우측에 돌고 있는 작은 행성 형태는 이 나무가 어머니와 아들이라는 두 인간을 의미한다는 기호를 명백히 드러낸다. 집에 대한 상념, 표랑과 정착이라는 일상을 유지하는 것들이 이들을 둘러싼 축축하고도 엄청난 에너지에 의해 운영되는 구름과 그 경계에 위치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구름이 땅과 하늘 사이에 망설이며 동경하고 저항하면서 자랑스럽게 걸려 있듯이 인간의 영혼 또한 시간과 영혼 사이에서 망설이며 동경하고 저항하면서 자랑스럽게 걸려 있는”(헤세, <향수>) 때문인 것이다.
장현주의 화면에서 성수, 구름과 함께 자주 나타나는 배는 불완전한 정착, 공간을 가로지르는 항해 등을 통해 푸코가 제시한 헤테로토피아의 영역에 그의 세계가 위치함을 드러낸다. 배는 내적으로 양립할 수 없는 공간과 장소를 하나의 장소에 담아 무한한 시간의 축적을 이룬다. 하지만 전통적인 시간과 절대적인 시간의 균열 속에서 단절이 생성되는 것처럼 그의 작품에서 화면 속 내가 응시하는 나와 현재로 표상되는 나는 시간의 지속성이나 공간, 시간이 다른 개념에 속하는 존재이다. 이들은 서로 소외와 관통이 가능한 존재로서 결국 현실의 타자로서 나를 응시하게 한다. 현실과 타자를 직면하여 획득한 깊이에 대한 체험은 ‘swing'이라는 상태 혹은 운동으로 나타난다.
화면 좌측 상단에 달이 위치하고 커다란 인물이 멋지게 유영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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