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포스터
김상돈
숲 100x60x78cm 목재, 단청 2022) 사진제공: 프로젝트 스페이스 미음
김상돈
카트 210x108x250cm 쇼핑카트, 목재, 단청 2019-20 사진제공: 프로젝트 스페이스 미음
김상돈
코스믹 댄스 30x30x80cm 목재, 단청 2022 사진제공: 프로젝트 스페이스 미음
김상돈
입 성운-1 80x120cm 잉크젯 프린트 2014 사진제공: 프로젝트 스페이스 미음
전이와 변증의 황홀경
아버지는 아버지를 싫어했다. 아버지 자신이 스스로를 싫어했다는 뜻이 아니다. 아버지는 아버지의 아버지를 싫어했다. 할아버지 말이다. 아버지는 아버지가 없는 사람인 양 살았다. 부끄러웠으므로. 아버지의 아버지는 무당이었다. 박수 무당이었다. 천호동 박수였다.
옹진에 살 적만 해도 박수는 아니었다. 개신교도였을 거라고들 했다. 모른다. 불교였을지도. 어쨌든 육이오 나기 전에 배를 타고 피란 나와 한강을 거슬러 올라와 광나루에 짐을 부렸다. 옹진에서는 살림이 넉넉했다. 천호동에서도 괜찮았다. 부동산 신화에 으레 나오듯 말죽거리에서 천호동까지 제 땅을 밟고 다닐 수 있었다. 그랬다고 한다. 다 둘째 아들이 둘째 아들을 낳기 전에 있었던 일들이다.
어째서 그랬는지 모른다. 알 수도 없다. 조부는 어느 날 잠을 자다가 문득 일어나 정처가 있는 것처럼 쏘아서 산으로 갔다. 넋이 나간 듯한 어른을 아들딸들이 말리면서 따라나섰다. 지금은 강남이라고 부르는 광주 땅 어디메 산비탈을 밤중에 맨손으로 파더니 칼과 요령방울과 쥘부채를 찾아왔다. 신이 내리거나 신에 홀린 것이었다. 그 길로 집에 신을 모셔 들이고 당을 세웠다. 몸주신이 최영 장군이었는지 임경업 장군이었는지 모른다. 당 바람벽에는 어떤 낡은 초상화, 그러니까 신장도 한 점이 걸려 있었다.
조부가 살던 곳은 앞쪽에 세든 사람들이 몇 집 있었고 다시 중문을 넘어가야 나왔다. 문을 밀면 왼쪽 끝방에 당이 설치되어 있었다. 조부가 거처하는 그 큰집에서 백여 걸음 떨어진 곳에 둘째네가 살았다. 둘째 며느리가 일을 나가면서 두 아들을 큰집에 맡겼다. 그리하여 일곱 해를 조부 슬하에서 살았지만 사는 동안에는 몰랐다. 그 뒤에도 몰랐다. 조부가 그에게 내리고 또 깃들 줄은. 그 둘째 아들네 둘째 아들이 난독증을 앓는 작가 김상돈이다.
천호국민학교에서는 손재주가 쓸 만한 아이였다. 왜 좋은지, 그걸 어디에 쓰는지 몰랐다. 다만 담임을 맡았던 여선생님이 이런 저런 일을 시켰다. 학교를 마친 뒤에도 격려를 잊지 않았다. 천호중 미술반에서도 주목 받았다. 대단한 건 아니었다. 형이 미술 솜씨를 인정 받는 걸 보고 자신도 덤벼보고자 했을 따름이었다. 둔촌동에 있는 동북고까지는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거기서는 미술부원이자 유도부였다. 그 시대 가난한 동네 소년들이 그렇듯 완력이 있어야 할 듯도 싶었던 거다. 그때 길동사거리에 있는 미술학원 강사가 학비가 덜 들어가는 쪽을 택해야 했던 그를 서울시립대 환경조각과로 이끌었다.
대학생활은 기대보다 확실히 재미없었다. 다만 학내 시위가 있을 때 미술행위와 미술언어를 구사하는 일은 즐거웠다. 보통 데모와 달랐으므로. 어느 순간 자신이 그 일을 이끌고 있기도 했다. 그 무렵 프랑스에 가서 미술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와이엠씨에이 어학반에 등록하고 얼쩡거렸다. 학교는 그만 두고 있었다. 뒤셀도르프 예술아카데미와 교류를 하고 있던 계원예술대학 특별과정을 한 해 동안 다녔다. 거기서 운 좋게 백남준, 안도 다다오, 독일 작가들을 만났다. 시험을 보거나 하는 것도 아니었다. 독일과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군대 있을 때 묘한 꿈을 꾸었다. 산이 무너지고 하늘이 땅으로 내려왔다. 그날 별 이유 없이 포상휴가를 가라고 해서 집에 갔더니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직후였다. 미처 식구들이 그에게 연락하거나 한 게 아니었다. 괜히 버스를 한 정거장 먼저 내려서 큰집부터 들렀다. 무심히 그러하였다. 큰집 앞에는 막 초상집 등롱이 내걸리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지만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어찌어찌하여 독일로 사진 공부를 하러 갔다. 겨울에 눈 치우는 일, 생선공장에서 상자 나르기, 클럽과 레스토랑 접시닦기 등 학비를 벌기 위해 별별 일을 다 해봤다. 조금도 억울하지 않았다. 졸업작품은 나무를 따라다니면서 마무리했다. 베를린 크리스마스에 쓰는 탄넨바움 Tannenbaum(전나무)의 생을 쫓아 기록했던 것이다. 해마다 덴마크, 체코, 폴란드에서 들어오는 축제용 나무는 거의 40만 그루에 달했다. 시즌이 끝나면 나무는 다시 폴란드로 가서 분해되어 화분용 흙에 섞여 베를린으로 돌아왔다. 그는 버스와 트럭을 얻어 타고 다니면서 한 그루 나무가 태어나서 성장 촉진제를 맞고 돈 많은 도시로 팔려왔다가 완전히 해체되어서 다시 아무런 흔적없이 베를린의 흙이 되는지를 집요하게 추적했다. 그곳에서 달리 할아버지 생각에 몰입하거나 한 적은 없었다. 다만 나무들에게 말을 걸 수 있는 애니미즘의 힘은 거기에 내력이 닿아 있다고 해야 좋을 게다. 조부는 아무 데도 없었고 김상돈 안에서 녹아 아무 데서나 출몰하였다. 액체로, 기체로.
몇 해 동안 독일 소시지에 빵을 먹고 독일말을 익혀도 난독증은 변화가 없었다. 김상돈은 글자만 읽는 학생이 아니었다. 소싯적에도 그랬다. 글자 위에 점이 있거나 종이가 구겨진 것까지 함께 읽었다. 그걸 빼고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는 문자를 읽는다기보다는 책을 보았다. 통째로 책을 봤다. 발터 벤야민을 오직 시력으로 외웠다. 표지에서 뒷장 출판사 이름까지. 책 읽는 속도가 다른 사람들보다 몇 배 느렸지만 다른 사람보다 책을 밥처럼 씹어먹고 눈 속에 우겨 넣었다. 책은 그렇게 그의 몸 속으로 들어왔고, 그런 순간 그는 황홀경을 맛보곤 했다.
베를린국립미술대학 마이스터슐레Meisterschueler를 마치고 서울에 돌아온 김상돈은 흔히 유학을 끝낸 귀국자들이 대학 강의 자리를 찾으러 다닐 때 왕십리 푸줏간 동네에서 도축한 소와 돼지를 등에 메고 다니는 일을 했다. 숙소에 오면 늦도록 작업을 했다. 몸에서 풍겨 나오는 죽은 돼지 냄새도 그에게는 코로 읽는 책이었다. 인테리어 일도 했다. 레스토랑 일도 했다. 비엔날레, 미술관에 작업을 설치하고 다니는 작가였지만 먹고 사는 건 그닥 달라지지 않았다. 늘 일을 해도 따로 넣어두고 쓸 수 있는 돈은 없었다. 돈을 모아보려고 한 적도 없었다. 일을 하고 몇 푼 챙겨서 작업을 하면 족했다.
이런 일도 있었다. 동두천 상패동에 가면 무연고자 묘지 사천여기가 있다. 묘비 대신 겨우 번호가 박힌 나무 말뚝이 서 있다. 이름은 없다. 미군 위안부들, 그러니까 ‘양공주’, ‘와이캡’ 따위로 자기 땅에서 비하 당해 온 여인들이 묻힌 묏등이었다. 김상돈은 이름 없는 떼무덤을 기록하는 작업을 했다. 어쩌다 이 무덤을 파헤칠 때 땅을 파도 뼈가 나오질 않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모른다. 그 시신들이 어디로 훌훌 떠나버렸는지도. 주위를 돌아보면 가까운 곳에 서 있는 소나무가 유난히 푸르고 속이 붉었다. 그때 노을이 끼치고 있었는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았다. 사람은 사라진 자리에서 소나무가 타오르고 있었다. 그 전이를 문득 발견할 때 뜨거운 경이가 어디선가 밀려왔다.
김상돈은 양공주들이 늘상 앉아서 미군 사내들을 기다리던 플라스틱 의자를 가져왔다. ‘불광동 토템’은 보통 동식물이 토템이 되는 게 아니라 사람이라는 동물, 그 중에서도 ‘양공주’들이 사용해온 플라스틱 의자라는 사물과 꽃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꽃은 인공꽃 조화造花이자 혼사나 초상 때 놓아두는 화환 혹은 조화弔花 모양을 하고 있다. 외부 세계에 있는 사물이 인간의 때, 시간의 때가 묻으면 새 기운을 얻는다. ‘불광동 토템’에서 개연성 없는 두 사물은 마치 원래 한 식구였던 양 대화를 하고 있다. 전혀 이질적으로, 적어도 몹시 불편할 듯한 사물들은 아무 탈 없이 홀연히 ‘불광동’이라는 거점을 두고 ‘토템’으로 만나 교접하고 있다. 거기가 김상돈이 불 지르거나 주술을 부여하고 있는 상상의 거처다.
‘입 성운星雲 Snout Nebula’은 사탕, 단추, 풍선, 소라껍질 따위 일상에서 온 오브제들을 매단 막대기가 도마에 꽂힌 채 서 있다. 여기서 입이란 말하는 입이다. 사물들은 사물들끼리 대화를 나누면서 사탕은 풍선에 가까워지고 단추는 소라껍질과 멀어진다. 이를 통해 오브제들은 본래 성질을 잃어버리거나 바뀌면서 어디론가 떠돌게 된다. 이 세속에 서 있는 별들은 아수라이자 천당의 혼융이다. 혼돈과 융합이 한데 끓어오르면서 모종의 황홀경으로 사태를 이끈다.
‘코스믹 댄스 Cosmic Dance’ 연작 중 버나를 돌리고 있는 형상은 김상돈 작업에서 창조에 이르는 ‘작용’을 위해 무엇이 필요한가를 단일체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가락과 춤은 질료의 성질 변화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행위이자 그 자체다. 다른 세계로 이동해가는 전이는 이렇게 형성된다.
김상돈의 사고와 작업이 집약되고 있는 건 ‘카트’다. 작가가 하나하나 깎고 파내고 조립한 남도 꽃상여가 쇼핑공간에서 사용하는 카트 위에 올라가 있다. 전통 사회에서 한국인은 살아서는 타지 못하던 가마를 죽어서는 누구나 누워서 타고 저승으로 갔다. 구석구석을 살펴보면 산 자, 죽은 자, 세월호 사람들까지가 상여를 구성하고 있다. 모든 생명체에게 죽음은 한 번뿐이다. 생명과 죽음이 한없는 절대성, 또는 비상대성을 갖는 이유다. 상여는 그걸 싣고 가는 가마다. 그게 임시 수단인 쇼핑 카트에 의지해서 움직이고 있다. 상두꾼도 만가도 있을 리 만무하다. 고도의 비의를 품고 있던 죽음, 또 죽음 문화는 진작에 죽었다. 전통 상징과 시장 상징이 이토록 통렬하게 한 작업 안에서 부딪힌 적은 일찍이 없었다. 그렇다고 ‘카트’는 굳이 항변하거나 하지는 않는다. 그저 넋처럼 상여가 오방색을 칠한 채 어디론가 달려가고 있다.
물질사회는 황홀경의 홍수 사회이지만 동시에 원형으로써 황홀경을 상실한 사회다. 광고, 성, 미디어, 쇼핑공간, 패션, 정보 따위 자본 사회가 뿜어내는 황홀경은 빈틈없이 꽉 찬 욕망이자 동시에 꽉 찬 공허다. 대중은 이 황홀경 속에서 도리어 고독과 마주선다. 김상돈의 황홀경은 포화상태에 도달한 시장의 황홀경과는 정반대 황홀경이다.
그는 천호동에서 선체험한 원시 원형에서 출발해서 현실에서 치열한 쟁투를 거쳐 다시 현재의 원형으로 귀환한다. 이 과정에서 싱싱한 전이轉移transference와 뜨거운 변증Dialektik이 발생한다. 색의 신명神明 또한 여기서 나오고 있다. 작가는 작업 전체를 통해 어느 대목에서도 관찰자가 아니다. 대부분 자신이 행한 기록들이자 작업 자체가 자신이다. 넋과 몸이 따로 노는 게 아니라 하나로 노래하고 있다.
상실했던 원형으로써 황홀경을 재구성하고 있는 작업은 실로 드물다. 김상돈이 획득하고 있는 이 사회적 황홀경은 한국 미술의 신비로운 성취다. 이번 전시는 김상돈이 고유하게 생성시켜내고 있는 황홀경의 좌표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는 유쾌한 기회다.
서마립(예술비평가)
1973년 서울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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