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신(文信): 우주를 향하여
2022.09.01 ▶ 2023.01.29
2022.09.01 ▶ 2023.01.29
전시 포스터
문신
자화상 1943, 캔버스에 유채, 94×80cm, 개인소장
문신
고기잡이 1948, 캔버스에 유채, 53.5×131.5cm(액자 포함),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문신
소 1957, 캔버스에 유채, 76×102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문신
개미 1970, 참나무, 119.5×30×19.6cm, 개인소장
문신
무제 1977, 흑단, 54.6×128.5×23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문신
무제 1978, 흑단, 113.2×35×20cm,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컬렉션
문신
개미(라 후루미) 1985, 브론즈, 119.5×30×28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문신
우주를 향하여 3 1989, 브론즈, 67.8×38.5×22cm, 창원시립마산문신미술관 소장
문신
무제 1990, 브론즈, 69×45×23.4cm, 숙명여자대학교 문신미술관 소장
문신
우주를 향하여 1985, 스테인리스 스틸, 280×120×120cm, 창원시립마산문신미술관 소장
1부. 파노라마 속으로
1938년, 밀항하여 일본으로 건너간 문신은 이듬해 일본미술학교 양화과에 입학했다. 그는 일본 각지에서 모인 청년 예술가들이 각자의 다양한 정체성을 유지하며 교류하고 작업했던 도쿄(東京) 이케부쿠로(池袋) 시나마치(椎名町) 예술인촌에 거주하면서 화가로서 갖춰야 할 기본적인 소양을 다졌다. 광복과 함께 귀국한 문신은 마산 추산동 언덕(現 창원시립마산문신미술관 위치)에 터를 잡고 부산, 대구, 서울 등을 오가며 활발하게 작품을 발표했다. “화면의 기교를 위한 낭만”보다 “현실 생활의 체험”을 중시한 그는 온화한 기후에 산과 바다로 둘러싸인 마산의 풍경과 평범한 주변 사람들의 소박하고 거친 삶, 그리고 향토성 짙은 정물을 화폭에 담았다. 1957년, 문신은 反아카데미즘을 내세운 모던아트협회에 참여하면서 본격적으로 서울을 활동의 장으로 삼았다. 그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고층 건물과 가로수가 즐비한 도시풍경으로 이동했고 화면은 도시적 감각으로 충만해졌다. 이 무렵 그는 미술계의 흐름을 반영하여 평면화, 단순화 등 추상적 요소를 접목했다.
문신의 회화에서 구상 이미지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1961년 프랑스로 건너간 이후로, 그는 외부 세계를 재현하는 대신 점, 선, 면 등 순수 조형요소와 마티에르를 실험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변화는 그가 프랑스에서 목격한 앵포르멜(Informel)과 누보 레알리즘(Nouveau Réalisme) 등의 영향도 있었지만, 도불 직후 생계를 위해 파리 북쪽에 위치한 라브넬(Ravenel)에서 고성(古城)을 수리하는 과정에서 체득한 대상의 추상적 형태와 구조, 재료의 물성에 대한 감각에서 비롯되었다. 이후 그는 조각으로 영역을 전환하지만 회화를 포기하지 않았다. 문신의 회화는 우리에게 그의 삶과 예술을 파노라마처럼 펼쳐 보여준다.
2부. 형태의 삶: 생명의 리듬
1960년대 후반부터 문신은 최소한의 조형 단위인 구(球) 또는 반구(半球)를 다양한 방식으로 결합, 구축한 추상 조각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1970년 프랑스 남부 페르피냥(Perpignan)에 위치한 바르카레스항(Port-Barcarès)의 ‘사장(沙場) 미술관(Musée des Sables)’에서 열린 《국제 조각 심포지엄》에 출품한 13미터 높이의 나무 조각 <태양의 인간>은 문신이 조각가로 이름을 알리게 되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이후 그는 《살롱 드 메(Salon de Mai)》, 《살롱 콩파레종(Salon Comparaisons)》, 《살롱 데 레알리테 누벨(Salon des Réalité Nouvelle)》 등 다양한 전시에 초대받았고 그가 선보인 석고, 나무, 브론즈 조각은 프랑스 미술계로부터 독창성을 인정받았다. 2전시실에서는 특히 제작에 고도의 공력(功力)을 요구하고 복제 불가능한 문신의 나무 조각과 관련 드로잉을 소개한다.
문신은 조각을 제작하기 전에 무수히 드로잉을 그렸다. 그는 원과 선을 다양한 방식으로 연결하는 과정에서 만물이 원과 선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고, 반복을 통해 미묘한 차이를 지닌 다양한 형태가 창조되는 것에 매료되었다. ‘개미’로 불리는 그의 조각은 이렇게 탄생했다. 문신의 조각은 크게 <태양의 인간>처럼 구 또는 반구가 구축적 배열되어 무한히 확산되는 듯한 기하학적 형태와 <개미>처럼 생명체를 연상시키는 생명주의적 또는 유기체적 형태로 나눌 수 있다. 어느 쪽이든 그에게 형태는 무언가의 이미지나 의미를 지닌 기호, 또는 추상적 본질의 표상이 아니라 그 자체의 삶을 지닌, 즉 시간과 공간, 정신, 물질 등과 다양한 관계를 맺으면서 변화하는 구체적인 존재였다. ‘대칭’, ‘정면성’, ‘수직성’ 등을 특징으로 하는 문신 조각의 형태는 창조적으로 진화하는 생명 또는 약동하는 생명력 그 자체다.
3부. 생각하는 손: 장인정신
문신은 하나의 작품을 시작하기 전부터 긴 준비 기간을 가졌는데 재료와 도구를 잡는 순간 계획에 의존하지 않고 손의 물리적인 동작에 철저히 몰입했다. 반복을 통해 숙련된 기술과 촉각적인 직감을 통해 손의 감각이 향상되면 동작은 즉흥적으로 리듬을 타게 되고 작가는 더이상 기술에 함몰되지 않고 상상력을 매개로 직관적인 도약에 다다랐다. 이와 같은 제작의 즉흥성은 예상치 못했던 형태가 스스로 창조되는 과정과 자연스럽게 겹쳐진다. 흥미롭게도 문신의 조각은 즉흥의 과정을 거친 후 고도로 섬세하고 치밀한 세부처리로 마무리되었다. 형태를 중시한 그는 조각에서 마티에르를 부차적인 요소로 간주했고 표면을 매끄럽게 연마했다. 문신은 같은 형태를 다양한 크기와 재료로 제작했는데, 어떤 형태가 주어진 재료에서 다른 재료로 옮아가면 변형을 겪게 마련이다. 때론 미묘하고 때론 드라마틱한 이 변형은 어떤 재료를 사용하든지 세련되게 마감된 문신의 조각을 감상하는 묘미 중 하나다. 3전시실에서는 브론즈 조각과 관련 드로잉을 소개한다.
문신은 다양한 재료와 기법을 능숙하게 구사하며 창조의 고된 물리적 행위를 즐겼고, 감상자는 그의 작품에서 강인한 체력과 인내심, 그리고 부단한 노동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그의 작품은 근대 이후 만들어진 예술가와 장인의 구분, 즉 독창성과 상상력, 자유를 지닌 전자와 기술, 노동, 서비스를 중시하는 후자의 구분을 무의미하게 만든다.
사실 문신의 조각은 완벽한 좌우대칭이 아니다. 마치 생명체가 정확한 대칭이 아니듯 그의 조각 역시 미묘한 차이를 지닌다. 문신의 조각에서 대칭은 엄격한 법칙이나 그에 따른 결과물이 아니라 하나의 과정이자 변화의 동력으로 작동했다. 덕분에 그의 작품은 마치 배아에 내재되어 있는 잠재성이 다양하게 분화되는 생명체처럼, 또는 원형에서 변형된 변이처럼 결과를 예측하기 힘들다. 그래서 그의 조각은 엄격하면서 동시에 유머러스하고 환상적이다.
4부. 도시와 조각
프랑스 체류 시절 문신은 도시와 환경이라는 좀 더 넓은 관점에서 조각을 바라보게 되었다. 그의 조각은 미술관뿐만 아니라 지하철역, 공원, 광장 등에 전시되었고 그는 조각이 미술관을 벗어나 도시인의 삶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것을 직접 체험했다. 1965년 잠시 귀국했던 작가가 1967년 2차 도불전에 발표한 ‘인간이 살 수 있는 조각’은 그가 환경으로부터 분리된 ‘자주적인 오브제’, 즉 자기지시적인 모더니즘 조각의 경계를 뛰어넘고자 했음을 보여준다. 또한 단체 활동을 거의 하지 않았던 그가 현대도시 미학에 관심을 다양한 전공의 예술가들이 만든 단체에 참여한 점 역시 도시환경에 대한 문신의 관심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와 관련해 전해지는 드로잉은 실제로 구현되지 못했지만 문신이 궁극적으로 지향했던 조각의 이상을 보여준다.
1980년 문신이 영구 귀국했을 무렵, 한국은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을 앞두고 도시 미관과 환경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어 1950-60년대 한창 제작되던 계몽적이고 권위적인 기념 동상과 다른 종류의 야외 조형물이 활발하게 조성되기 시작했다. 작가는 당시 국내 브론즈 주조 기술이 프랑스보다 떨어져 결과물이 만족스럽지 않자 이에 해결 방법을 찾던 중, 비교적 가볍고 부식이나 녹에 강해 야외조형물 재료로 이상적인 스테인리스 스틸을 발견했다. 그의 스테인리스 스틸 조각은 나무나 브론즈 조각과는 또 다른 현대적 감각을 발산한다. 완성된 조각의 매끄럽고 광택이 나는 표면은 빛을 흡수하기도 하고 반사하면서 보는 이를 포함한 주변 풍경을 반영한다. 거울과 유사한 효과를 지니지만 불룩한 곡면에 의해 왜곡된 대칭은 감상자로 하여금 특별한 시공간을 체험케 한다.
비록 문신이 “풍경과 건축 사이에 위치하는” 포스트모던한 조각을 적극적으로 의식하지 않았지만, 그의 조각은 주변 환경을 변화시키는 힘을 지니고 있다. 때문에 문신 예술의 본령은 조각, 건축, 공원, 도시 등 보다 확장된 맥락에 위치할 때 보다 풍부하게 발휘된다. 창원시립마산미술관은 그의 50년 예술 경력의 종합으로 비록 독특한 형태의 조각과 달리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모더니즘 양식의 건축이지만 그야말로 ‘인간이 살 수 있는 조각’이다. 작가는 영구 귀국 후 우공이산(愚公移山)의 열정으로 14년간 직접 산을 깎고 돌을 쌓아 옹벽을 만들고, 나무를 심고 연못을 만들었으며 건물을 설계하고 시공했다.
1923년 일본 규슈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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