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4(무의미를 목표로한 접속)
2010.07.23 ▶ 2010.08.01
초대일시ㅣ 2010-07-23 18pm
2010.07.23 ▶ 2010.08.01
초대일시ㅣ 2010-07-23 18pm
김윤섭
6.54 2010, 개인소장
김윤섭
6.54 유화, 100호, 2010, 개인소장
김윤섭
6.54 아크릴릭, 50호, 2010, 개인소장
김윤섭
6.54 아크릴릭, 50호, 2010, 개인소장
김윤섭
6.54 아크릴릭, 50호, 2010, 개인소장
김윤섭
6.54 아크릴릭, 50호, 2010, 개인소장
김윤섭
6.54 아크릴릭, 50호, 2010, 개인소장
김윤섭
6.54 아크릴릭, 50호, 2010, 개인소장
김윤섭
6.54 2010, 개인소장
김윤섭
6.54 2010, 개인소장
6.54
6.54. 나의 명제들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하나의 주해 작업이다.
즉 나를 이해하는 사람은, 만일 그가 나의 명제들을 통해 — 나의 명제들을 딛고 서 — 나의 명제들을 넘어 올라간다면, 그는 결국 나의 명제들을 무의미한 것으 로 인식한다. (그는 말하자면 사다리를 딛고 올라간 후에는 그 사다리를 던져 버 려야 한다.)
그는 이 명제들을 극복해야 한다. 그러면 그는 세계를 올바로 본다.
김윤섭의 이번 전시회의 제목은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의 『논리철학 논고(Tractatus Logico-Philosophicus)』에 등장하는 마지막 부분에서 모티브를 얻었다. 비트겐슈타인은 그 구절에서 『논고』의 모든 진술들을 모두 "무의미"라 고백한다. 그 고백을 진심으로 받아들일 때 세계는 올바로 보인다. 김윤섭은 이 구절에서 "무의미"란 단어에 주목한다. 이번 [6.54]의 작품들 역시 김윤섭은 무의미하다고 선언하고 있다. 그리고 그 선언은 비트겐슈타인의 고백과 유비적 방식으로 연결된다. 김윤섭은 자신의 작업의 무의미성을 깨닫는 것이 그의 작품을 올바로 보는 방법이라 주장한다.
자신의 작품들을 무의미하게 받아들이라는 김윤섭의 주장은 아주 단순하고 평범하다. 무의미의 고백 속에는 겸손의 표현 혹은 소수의 관객을 위한 숨겨진 전략 같은 것은 없다. 그가 그린 그림이나 설치한 조형물들은 모두 무의미하다. 회화를 바라보는데 있어서 관객은 김윤섭의 추상을 마주할 때 분명 특정한 욕망과 의지에 사로잡힌다. 그것은 바로 무언가 의미있게 말하려는 욕망과 의지다. 하지만 그러한 욕망과 의지가 만들어내는 언어적 표현들은 하나같이 무의미하다. 왜냐하면 생성하는 감각들과 그 사건들을 지시하고 설명할만 언어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김윤섭의 이번 작업을 지시하고 설명하는 언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화가는 자신이 느끼는 감각의 언어를 만들지 않는다. 다시 말해 화가는 감각을 말하지 않는다. 단지 화가는 자신의 감각들을 추상으로써 보여준다. 표현된 감각들 즉 여러 추상들은 각기 다른 감각들을 다루고 느끼고 있지만 독자가 볼 수 있듯이 공통의 논리, 즉 감각의 논리들을 보여(show)준다. 김윤섭의 이러한 신념은 오로지 감각과 감각의 논리는 보여질 뿐이지 말해질 수 없다는 명제로 압축된다. 김윤섭은 [6.54] 통해서 감각과 감각의 논리를 보여주는 자신의 추상이 이러한 주장의 직접적 예시가 되기를 희망한다. 따라서 김윤섭의 이번 추상은 언어로써 이해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오로지 관객들은 하나의 감각 덩어리들을 눈을 통해 체험함으로서 감각이 생성되는 사건들에 마주할 뿐이다.
김윤섭의 설치 미술에 쓰인 오브제는 일상 속에 쉽게 만날 수 있는 오브제들이 쓰였다. 각각의 오브제는 관객들의 일상의 기억과 감각들의 세계에 놓여져 있다. 하지만 그런 각각의 오브제들이 인위적으로 합쳐져 하나의 통일된 구성물이 되었을 때, 각각의 오브제의 종합으로 이루어진 구성물은 더 이상 관객의 일상적 기억과 감각들의 세계에 놓여있지 않다. 그 구성물은 또 다른 감각과 감각의 사건들을 발생시키며 관객들을 일상적 세계와 또 다른 세계의 장에 놓이게 한다. 따라서 각각의 오브제들을 지시했던 언어들 역시 자신의 의미를 상실하며, 언어와 오브제는 떨어져 나간다. 하지만 각각의 오브제는 순수한 물리적 덩어리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종합된 구성물과의 긴장과 리듬을 유지하며, 새로운 감각들과 감각의 논리들과 독자들의 세계 속에 공존한다. 이처럼 관객들은 감각의 새로운 세계와 사건들에 놓이게 된다. 따라서 관객들은 감각을 의미있게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감각들을 말하기 위해서는 감각의 사건과 세계 밖에 독자 자신을 위치시켜야 하는데, 이는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박하늘
작가노트
6.54 (무의이를 목표로한 접속)
작품의 의미화를 목표로 하는 작업을 한다는 것은 나에게 의미를 잃었다.
나는 무의미를 긍정하기로 했다.
무의미를 긍정한다는 것은 나에게 있어 나름대로 가장 순수했던 시절의 세계로 돌아간다는 것이지만 과거로 퇴보하는 것은 아니다. 존재들의 의미를 찾기보다는 무의미한 존재들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것들을 가지고 조금 더 흥미로운 세계를 구축해 보겠다는 생각이다.
이왕 무의미를 긍정하기로 했으나 사건만은 무의미화 시키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나는 무엇도 가능한 지시하지 않는, 혹은 강한 의미를 위해 만들어지지 않은 혼합물들을 가지고 최대한 무의미에 근접한 사건을 만들어내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 오브제들을 접속 시키고 그 접속이 가능한 무의미에 가깝게 느껴지는 작업을 만들기로 했다.
그 결과로 최대한 의미가 없는 작품들을 만들어내지만 그것들은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
6.54란 제목은 이 지점에서 나왔다. 철학을 전공하지는 않았지만 6.54의 명제를 가지고 영미 철학에서는 아직도 주석이 나오고 활발한 토론이 진행된다는 소리를 들었다. 논고의 모든 진술을 무의미하게 만들어 버리는 혹은 잘못된 예로 만들어 버리는 6.54라는 명제는 나의 이번 전시와 연결되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했다.
나의 이번 작품들은 6.54 이전의 모든 명제들과 입장이 같다고 생각했다. 말할 수 없는 것들을 말했던 6.54이전의 명제들과 의미를 가질 수 없는 예술품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 이것은 매우 형이상학적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분명히 말할 수 없는 것들을 만들어내고 있으며 어떤 수단을 쓰더라도 작품의 존재 자체가 스스로 의미화를 이루는 경우는 없다고 생각한다.
1983년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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