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라
호접지몽 캔버스에 연필과 아크릴, 71x61cm, 2022
박영라
주유周遊 캔버스에 흑연과 아크릴, 50x50 cm, 2022
박영라
오딧세이아 캔버스에 연필과 아크릴, 71x61cm, 2016
박영라
아주 오래된 이야기 캔버스에 연필과 아크릴, 71x61cm, 2017
박영라
꼭 그렇지만도 않아요 종이위에 인디언잉크와 연필, 20x20cm, 2023
박영라
메멘토 모리 캔버스에 연필과 아크릴, 50x50 cm, 2023
라인 메타포
박영라의 작업은 어떤 암시적 힘의 발산이다. 그의 캔버스와 종이 위에는 얼핏 많은 것이 드러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나, 거기에는 거대한 우주가 숨겨져 있다. 몇몇의 선들은 자신들의 길을 찾아나서고, 섬세하게 떨리는 획의 무리는 산재되어 이미지 저 깊은 곳으로부터 도출된다. 배경은 대개 여백으로 남고, 더러는 작은 면들이 파스텔톤으로 정의되곤 한다. 이 추상의 레퍼토리는 절제와 유보를 특징으로 한다. 개개의 선들은 각각 자기만의 고유한 특질을 드러낸다. 어떤 선들은 힘차게 움직이는 듯하고, 어떤 선들은 내내 변함없이 그 자리에 머물러 있을 듯하며, 또 어떤 선들은 계속 나아가기를 머뭇거리는 듯한 어떤 식의 주저가 들어 있기도 한다. 때로 그들은 갑자기 끝나버리거나, 희미해지거나, 순순히 길을 잃기도 한다. 때로 그것은 섬세한 선구조물들을 가로지르며 맞서거나, 혹은 조밀조밀 꿈틀거리는 선들로 이뤄진 어두운 그물구조로 직조되기도 한다.
선들의 이러한 고유한 특질들은 연필, 숯, 먹, 볼펜을 통해 그래픽 기호로 옮겨진다. 배경과 선들은 완벽한 균형을 이루면서 역동적으로 구성되어 진다. 그림을 가득 메운 여백은 정교하게 주조된 선들이 충분히 움직이도록 하는 강력한 조건이 된다.
그의 오브제들은 종종 어떤 식물적인 형태를 연상시킨다. 그들은 언뜻 흐드러진 나뭇가지나 잎사귀들을 떠올리게 하거나, 시야를 가리는 어떤 풀덤불, 혹은 허공에 매달려 있는 넝쿨등으로 보여지기도 한다. 또한 구름, 물, 안개나 빛의 반사들이 묘사된 듯도 하다. 그러나 우리의 눈이 그의 모티브로부터 어떤 구체적인 사물을 포착하려는 순간, 그 연상된 사물은 어느새 달아나 그림 속 심연으로 물러나 버린다. 이러한 연상들은 종종 그림에서 만나는 모티브를 구체적인 사물과 연관시켜 이해해 보려는 관객의 태도와 욕구에서 기인한 것일 뿐, 화가 자신은 그림 속 사건을 구체화하려고 의도하지 않는다. 그는 이제껏 존재해 왔던 일체의 현상들을 '묘사'하는 데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 보다는 어떤 커다란 관계에 집중한다.
작가는 모티브들이 그에게 '전달'된다고 설명한다. 이 때 그는 그것들의 특질이 선명하게 감지될 때까지 마음을 집중하고 차분히 기다린다. 이 과정에 작가 자신의 의지는 배제되고, 다만 부유하는 정보들이 화면 위로 옮겨 앉도록 도울 뿐이다. 작가는 그리하여 자신을 '매체'로서 이해한다.
이러한 작업태도로 인해 작가는 2차 대전 이후 많은 중요한 선구자들로부터 오랫동안 이어져 온 추상미술의 전통 속에 자리하게 된다. 그러나 박영라의 작품들은 그들의 비구상 작업들과는 근본적으로 구분된다. 그 보다는 오히려 전후 유럽 화가들의 작업들과 보다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들 중 대부분은 예술의 사회정치적 역할보다 작가의 개인적인 경험을 보다 중요시하며 이를 작품속에 구현하고자 했다. 이는 나치시대와 세계대전의 경험이 그들로 하여금 현실을 떠나 자신의 내면을 깊이 성찰하는데 집중하도록 요구했기 때문이다. 베르나르트 슐쩨의 무수히 뻗어 나가는 선작업들 역시 자아표현을 위해 자신의 내면을 탐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박영라의 작품에서는 축약된 문자 드로잉을 회화의 영역으로 들여온 싸이 톰블리의 작품구성의 원리 또한 읽혀진다. 그러나 싸이 톰블리의 암호화된 묘사들이 구체적인 역사적 내용과 연결되는데 반해 박영라의 작품은 그 시작점과 지향점을 사뭇 다른 곳에 두고 있다. 그는 선들에게 우주적인 의미를 부여한다. 그는 가시적인 일체의 현상들 속에 선은 이미 내재되어 있어, 산이든, 식물이든, 생물이든 또는 사람이 만들어낸 어떤 사물이든 모두 선을 통해 그 구성요소와 존재형태를 기술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의 신념에 따르면, 존재하는 모든 것은 저마다의 특정한 방식으로 스스로를 드러낸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작업들 또한 "특정한 사물들"이라 부른다. 그는 선을 통해 이 '특정함'을 탐구한다. 작업이 완료되고 완벽한 선을 얻게 되면 대상의 특정함은 자연스레 그 속에 들어 앉게 된다. 이는 대상이 아니라 내용을 다루는 것이며 그 내용은 논리적으로 추상으로 귀결된다. 선은 비유가 되어, 높이 솟은 것, 구부러진 것, 곧추 서있는 것, 정지한 것, 망설이는 것, 충동적인 것, 동적인 것 등의 서로 다른 실존적 경험을 드러낸다. 동시에 그들은 동적인 흔적들을 전달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존재하는 모든 것은 진동을 내보내기 때문이다. 이는 물질적 대상을 포함해서 모든 종류의 생물, 혹은 파동을 기반으로 한 어떤 정보에도 해당된다. 심지어 하나의 행동이나 행위는 신경생리학의 영역에 흔적을 남기기도 하며, 우리의 삶은 우리 자신과 주위 사람들의 생애속에 기록을 남기기도 한다. 이러한 에너지의 상호교환은 박영라가 표현한 진동하는 선들에서 보여주듯이 서로 다른 특질들을 지니고 있다.
박영라의 작업방식은 또한 은유적인 색과 형태의 공감각적 효과에 집중했던 바실리 칸딘스키를 떠올리게 한다. 잘 알려진 대로, 그는 음악과 시각예술 사이의 유사성을 파악하고 "영적인 예술"을 만들어 내고자 했다 (1911). 칸딘스키는 각 색상에 고유한 특성을 부여하고, 그 것을 특정한 형태와 결합시킴으로써 어떤 정서적 상태를 드러나게 한다. 이를 통해 그는 묘사하거나 서술하지 않고도 자신의 오브제들을 본질적이고도 실재적으로 구현할 수 있었다. 박영라도 매우 유사한 의도를 가지고 있지만, 그는 칸딘스키와는 다르게 오브제들의 시각적 균형을 위해 조형적 장치들을 활용한다.
두 화가는 또한 외적으로 인식되는 현상 너머의 어떤 실체를 탐구한다는 면에서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박영라의 그림에 있어 화면을 가득 채운 여백은 도가적 이상의 반영이다. 그곳에서는 깊은 침잠과 무위의 상태에서만 현상 뒤의 세계가 그 진정한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 캔버스 위의 여백은 바로 내면의 여백과 조응한다. 이 여백은 모든 세속의 번잡함과 거리를 만드는 것이다. 그러한 여정을 시작하는 사람만이 물질적인 것에서 찾을 수 없는 충만함을 보상으로 얻는다. 그것은 분명 고갈되지 않을 충만함이다. 최근 그의 캔버스 위에 파스텔조의 부분들이 산발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단순한 조형요소의 변화 그 이상을 의미한다. 흰 여백의 배경은 그리하여 특정되지 않은 어떤 심연의 공간으로 확장된다. 우리의 세계관이란 이러한 조건들을 해석하는 데에 그리 도움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유클리드 공간은 명백하게 버려졌기 때문이다. 유클리드의 공간 말고, 선의 유희 뒤에 숨은 심연의 차원이 있다. 바로 그것이 박영라의 작업을 이해하는 데에 결정적인 것이다. 박영라는, 여기 우리에게, 현상들의 참모습을 찾으려던 보다 넓은 인식의 세계에 대해, 어떤 하나의 시선이 열렸음을 명료하게 보여준다. (번역_박영라, 2023년 5월) ■ 지그리트 호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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