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창섭
공방 캔버스에 유채, 239x129cm, 2010, 국립현대미술관
정창섭
귀 77-N 한지에 혼합매체, 197x110cm, 1977
정창섭
닥 86088 캔버스에 닥, 330x190cm, 1986, 국립현대미술관
정창섭
왼쪽)묵고 97701,중앙) 묵고 99606, 오른쪽)묵고 캔버스에 닥, 194x259cm, 1999
정창섭은 해방 후 한국에서 교육받은 한국현대미술의 제1세대 화가로서 우리나라 현대 미술의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작가이다. 한국전쟁의 화염이 채 가시지 않았던 1953년 제2회 《국전》에서 특선하며 화단에 등단한 이후, 그의 삶은 앵포르멜에서 시작하여 모노크롬을 거쳐 닥종이를 사용한 <닥>, <묵고> 등 한국 고유의 전통적 울림을 내포한 작품들을 통해 독자적인 예술세계를 모색하고 구축하는 여정이었다.
전후의 불안과 위기의식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던 1950년대 후반, 그는 당시 신세대 작가들의 저항과 도전정신에 동조하면서 새로운 미술로 떠오른 앵포르멜 회화를 실험하였다. 회화의 기초를 서양화 교육을 통해 연마했던 정창섭은 그러나 기름진 유화 기법과 융화되지 못하는 자신의 체질을 깨닫고 마치 동양의 수묵화처럼 엷게 번지고 스며드는 자연주의적인 화법을 실험하게 된다. 그러던 그에게 일대기적 전환이 이루어진 시기는 1970년대 중반이다. 평생을 함께 할 동반자로서 종이, 즉 한지(韓紙)를 운명처럼 만나게 된 것이다. 한국인의 보편적인 민족성과 정신성을 상징하는 재료인 종이를 사용하고, 더 나아가 종이의 원료인 닥을 주재료로 다루기 시작하면서 정창섭만의 독창적인 예술세계가 구축되었다.
물기를 머금은 닥 반죽을 캔버스 위에 올려 손과 닥의 직접적인 교감을 통해 발현되는 섬세하고 미묘한 종이 결이 인상적인 <닥> 연작과 금욕주의적인 색채와 질서정연한 사각의 형태 등 최소한의 언어로 귀의한 그의 마지막 연작 <묵고>는 정창섭의 작품 세계를 대표하고 있다. 그의 작업은 닥이라는 물질이 지닌 고유의 생명력을 이끌어내기 위해서 자신을 비우고 잊는 침묵과 무명의 상태를 전제로 한다. 그것이 그가 평생토록 일관되게 추구한 전통과 현대, 동양과 서양, 정신과 물질 등 이질적 개념이 합치되는 ‘물아합일(物我合一)’의 세계인 것이다.
정창섭은 전통을 현실의 문맥 속으로 끌어 들여 한국인의 미의식이 추상이라는 새로운 미술 형식과 만나는 접점을 실험해 왔고, 우리 민족 고유의 아름다움을 머금은 한국적 추상 회화의 성립에 기여하였다. 본 전시는 한국미술의 정체성과 자생성 모색에 대한 소명의식으로 심화된 그의 작품을 통해 한 예술가의 고뇌와 깊이 그리고 한국현대미술사의 굴곡을 조망해보고자 한다. 시대감각에 부합하는 한국적 미술을 창조하고 전통에 대한 자각을 당대의 정신 속에 이어나가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현대미술에 있어서 가장 절실한 과제이기 때문이다.
[작가어록]
나는 종이와 만나기 전 유채 작업을 했는데 영 이게 아닌데 듯싶어서 3, 4년이 멀다 하고 실험적인 변화를 거듭해 왔어요. 유채의 그 끈적끈적하고 기름진 것이 싫어서 테레핀유를 아주 많이 섞어 쓰곤 했지만 그래도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그러다 70년대에 들어서서 한지(寒紙)와 만났는데 그때 느낌은 '요걸 한 번 써보자'가 아니라 '만났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아주 자연스럽게 내 속에 다가오는 것을 느꼈어요. 그래서 한지와 만나자마자 그것에 몰두하기 시작했지요.
어린 시절 아침에 잠을 깨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창호지를 통해 들어오는 부드러운 햇빛입니다. 그리고 창호지에 넣은 코스모스나 국화 꽃잎 등이 은은하고 아름답게 비쳐오면 그 곳에서 하얀 밥에 파르스름하게 군 김과 된장을 먹고 자랐으니까요. 그것은 그림을 떠나서도 뭔가 그리운 것이에요.
그뿐 아니라 우리 민족은 종이와도 관련이 깊은 민족이지요. 종이로 채광을 하고 누런 장판지, 벽지 등 종이 자체가 방안의 온도 습도를 조절했어요. 그래서 종이를 내가 표현하고픈 물성으로 택했을 때 나는 아무 친밀하고 자연스럽게 그것이 내게로 오는 느낌을 받았어요.( 정창섭 화백: 충북 출신 원로작가를 찾아서」, 충청일보, 1986. 4. 26. 작가와의 인터뷰 기사 中)
1927년 충청북도 청주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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