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OCI YOUNG CREATIVES – 최현석, 이요나

2017.09.21 ▶ 2017.10.20

OCI 미술관

서울 종로구 우정국로 45-14 (수송동, 송암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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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ㅣ 2017년 09월 21일 목요일 05:00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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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현석

    우상협치십곡병 偶像協治十曲屛 마에 수간채색_140×700cm_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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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현석

    신기루_매난국죽 蜃氣樓_梅蘭菊竹 장지에 특수수묵_162×388cm_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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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현석

    직장회식계회도 職場會食契會圖 마에 수간채색_73×73cm_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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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현석

    사회초년생관문도 社會初年生關門圖 마에 수간채색_117×70cm_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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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현석

    고립무원 孤立無援_마에 수간채색 127×103cm_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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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요나

    Monochrome on display를 위한 구조물 샘플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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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현석

    Monochrome on display를 위한 모델링 스틸, 합판_가변크기_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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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요나

    Monochrome on display를 위한 구조물 샘플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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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현석

    Monochrome on display를 위한 구조물 샘플 2017

  • 작품 썸네일

    최현석

    Monochrome on display를 위한 모델링 스틸, 합판_가변크기_2017

  • Press Release

    최현석 ‘관습의 딜레마’
    전승과 전복, 세속화의 이중 전략


    최현석의 대다수의 작품은 기록화의 전통을 따른다. 먼저 형식적 측면을 보면, 작품의 기본적인 구도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사건의 풍경을 펼쳐서 조감하듯 보여주는 다중적인 시점이 일제히 기록화의 전형을 연상시킨다. 그의 작품을 보면서 조선의 여느 의궤도(儀軌圖), 반차도(班次圖), 계회도(契會圖) 또는 행렬도(行列圖)를 떠올리는 것은 그리 어색한 일이 아니다. 또한 내용적 측면을 보면, 그의 회화는 “특정한 사건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여 그 내용을 시각적으로 전달한 그림”이라는 기록화의 정의에 분명하게 부합한다. 전통적인 기록화가 왕실과 국가의 주요 행사와 사건을 그린 궁중기록화(宮中記錄畵)와 양반 관료들이 자신의 관직 생활과 관련된 기념할 만한 사건을 그린 사가기록화(私家記錄畵)로 대별될 수 있다면, 최현석의 기록화도 국가와 사회의 기억될 만한 사건을 그린 기록화와 그가 집안이나 주변에서 직간접적으로 체험한 사건을 다룬 기록화로 구분해볼 수 있다. 이처럼 최현석은 고전적인 기록화를 현대적인 맥락에서 전승하는 화가로 보인다.

    그러나 그가 전통적인 회화 장르를 그저 답습하는 작가는 아니다. 그는 기록화를 전복적인 방식으로 전승한다. 그에게 전승은 반드시 전복을 수반하는 것이다. 작가가 스스로 주장하듯이 그의 회화는 “기록화를 전복하는 기록화”인 것이다. 이때의 전복도 형식과 내용의 구분에 따라 서술될 수 있다. 먼저 최현석의 기록화는 전통적인 기록화의 형식만을 전승하지 않는다. 그의 화면을 채우는 산, 나무, 구름, 파도 등의 형상은 매우 반복적이고 도안적인 패턴을 띠는데 그것은 과거의 기록화가 아니라 민화나 고지도에서 가져온 것이다. 그리고 마치 커다란 울타리처럼 산맥이나 성곽으로 화면을 뱅 둘러싸는 양식도 우리가 고지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과거의 기록화가 주로 값비싼 비단에 그려졌던 반면, 최현석은 가장 저렴한 재료인 마(麻)를 의도적으로 선택해 그 위에 그림을 그린다. 이처럼 작가는 전통적인 기록화를 참조하지만 다른 종류의 형식과 재료를 도입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다른 한편, 내용의 측면에서도 그의 회화는 과거의 기록화와 다르다. 궁중기록화가 왕실과 국가의 주요 행사와 사건을 그리고 사가기록화가 양반 관료들의 관직 생활과 관련된 기념할 만한 사건을 그리는 데 반해, 최현석의 기록화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다수의 시민에게 절실하게 다가올 만한 사건을 대상으로 삼는다. 과거의 기록화가 지배권력의 정당화와 공고화에 이바지하는 것이었다면, 최현석의 그것은 오히려 그 권력을 풍자하고 비판하려는 의도를 지닌다. 지배권력의 ‘영광’이 아니라 ‘치부’를 드러내려는 것이다.

    역시 이번 전시에서도 씁쓸한 웃음을 자아내는 “기록화를 전복하는 기록화”가 눈에 띈다. 특히 이번엔 대침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청장년의 현실을 작가적 상상력을 동원해 기록한 회화들이 선보인다. 일반인 같은 군인, 또는 군인 같은 일반인, 즉 예비역들이 훈련소에 모여서 천태만상의 군상을 이루고 있다(<예비군훈련도(豫備軍訓鍊圖)>). 군복을 벗어던진 그들은 노동 같은 연회, 또는 연회 같은 노동, 즉 직장의 회식자리에 모여서 각자의 직급에 따라 갖가지 행태의 역할극을 벌이고 있다(<직장회식계회도(職場會食契會圖)>). 이 고달픈 연회에 어떻게든 발을 들여놓고자 사회 초년생들은 면접관 앞에서 과장된 독백을 구사하며 오늘도 데뷔가 유예된 리허설을 이어가고 있다(<사회초년생관문도(社會初年生關門圖)>). 그런가 하면 그들은 주택이 돈벌이 대상으로 전락한 현실 속에서 자의든 타의든 한군데에 정착하지 못하는 ‘유목민’이기도 하다(<신유목민도(新遊牧民圖)>).

    최현석의 전복적 기록화를 채우는 풍자와 비판이 웅대한 규모로 표현된 회화가 이번 전시의 도입부에 드리워진 <현실장벽도축(現實障壁圖軸)>이다. 가로 1미터, 세로 4미터에 달하는 이 거대한 족자에는 오늘날 청년의 막막하고 고단한 일상이 험준한 암벽을 어렵사리 기어오르는 몸짓에 빗대어 수직의 파노라마로 표현되어 있다. 추락하지 않기 위해 아등바등하며 저마다 독특한 동작으로 암벽을 기어오르는 수많은 청년의 형상이 화면에 빼곡히 들어 있다. 말단에서 허우적거리는 인간부터 상부에 다다른 인간까지 수직적 위계에 따라 처한 상황은 천차만별이지만 그들은 모두 추락에 대한 불안을 공유하고 있다. 그러나 이 회화는 이 시대의 모든 청년이 공통적으로 겪고 있는 실존적 불안을 제시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빈부의 격차, 출신의 격차 등을 이유로 저마다 등반의 시작이 다를뿐더러 그 과정도 다르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암벽의 밑바닥부터 맨몸으로 위태롭게 안간힘을 쓰며 기어오르는 반면, 누군가는 적당한 높이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암벽의 정상까지 단번에 올라간다. 요컨대 이 회화 속에는 현실이 곧 장벽인 시대에 직면한 청년의 실존적 불안과 사회적 불평등이 복합적으로 뒤섞여 표현되고 있다.

    기록화를 전복하면서 전승하는 최현석의 전략은 기록화의 ‘세속화(世俗化)’라고 명명될 수 있다. 조르조 아감벤은 “세속화한다는 것은 단지 분리들을 폐지하고 말소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것들을 새롭게 사용하고 그것들과 유희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과거의 기록화가 왕실과 관료로 대변되는 지배계급을 그 외의 피지배계급과 분리하기 위해서 제작된 것이라면, 최현석의 기록화는 그 목적을 무효화할 뿐만 아니라 전통적인 작법을 차용하여 새롭게 사용하고 풍자와 비판을 구사하며 유희하는 것처럼 보인다. 즉 최현석은 기록화의 본래적인 목적을 거부함으로써 그것을 전복하지만, 그와 동시에 기록화를 유희의 방식으로 새롭게 사용함으로써 그것을 전승한다. 이러한 전복과 전승의 동시적 수행을 통해 기록화는 세속화된다. 즉 사회계급의 분리에 복무하기를 그치고 공통의 사용 대상으로 갱신되는 것이다.

    세속화는 본래적으로 종교와 관련된 용어이다. 세속화의 일차적 대상은 일상과 분리된, 종교적이고 신성한 존재인 것이다. 종교가 세속의 인간을 성인으로, 세속의 사물을 성물로, 세속의 장소를 성소로 격상시켜 분리하려는 활동이라면, 세속화는 그렇게 분리된 신성한 모든 것들을 다시금 세속에 되돌려주는 활동이다. 이런 맥락에서 최현석이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신성함에 관한 회화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먼저 <고립무원(孤立無援)>에서 그가 기록한 탑골공원의 모습은 마치 퇴락한 성소처럼 보인다. 한국 최초의 공원이자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의 발상지로 유서 깊은 이곳은 이제 과거의 영광을 상실한 장소로서 갈 곳 없는 노인들의 쉼터가 되었다. 최현석이 기록한 공원 안팎의 살풍경은 이곳이 신성한 분리의 장소이기는커녕 ‘고립되어 구원을 받을 데가 없는(孤立無援)’, 차라리 적극적인 세속화를 갈구하는 장소로 보이게 만든다. <벌초대행도(伐草代行圖)>는 조상들의 산소가 밀집한, 가문의 신성한 선산을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산소로 거의 포화상태에 이른 선산의 벌초는 이제 후손들이 아니라 대행업체의 몫이 되었다. 이곳 역시 과거의 신성함은 명목상 남아 있을 뿐이고 실상은 서비스업의 작업장일 뿐이다. 이처럼 최현석은 여러 층위의 신성한 장소가 허울뿐인 분리를 유지한, 세속화의 대상임을 보여준다.

    그런가 하면 <우상협치십곡병(偶像協治十曲屛)>과 <종교비치도(宗敎備置圖)>는 직접적으로 종교를 소재로 삼은 회화들이다. 전자는 예수, 부처, 알라 등 여러 종교의 신적 존재를 기존의 관습을 참조해 사실적으로 그린 병풍이며, 후자는 고지도의 형식을 빌려 서울 시내에 분포한 여러 종교의 성전들을 배치하고 그곳에서 일어난 몇몇 사건들을 묘사한 기록화이다. <우상협치십곡병>은 얼굴을 지운 각 종교의 신들을 나란히 놓음으로써 그들 각자의 개별적 정체성을 약화시키고 그들이 공유하는 도상적 유사성을 드러낸다. 그리하여 여러 종교의 개별적 신격은 서로 상승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상쇄되어 엇비슷한 관습적 이미지의 패턴으로 환원되고 만다. <종교비치도>는 교회, 성당, 사찰, 모스크 등을 한 화면에 배치함으로써 종교 간의 개별적 차이를 약화시키고, 각각의 사원에서 일어난 사회적 사건들을 그려 넣음으로써 이곳들이 세속과 온전히 분리된 신성한 장소가 아님을 보여준다.

    마침내 최현석의 세속화 전략이 가닿은 대상은 한국화 자체의 신성함이다. <신기루_매난국죽(蜃氣樓_梅蘭菊竹)>은 제목이 암시하듯 한국화의 가장 고결한 형식인 사군자(四君子)를 소재로 삼는다. 이번에도 그는 전통적인 사군자 형식을 전승하면서 동시에 유희적으로 전복하는 세속화 전략을 구사한다. 사군자의 전통적 재료인 장지를 선택하고 정형화된 양식을 그대로 수용함으로써 충실한 전승의 태도를 취하지만 온도에 따라 변색하는 시온안료를 사용함으로써 새로운 방식의 전복을 시도하는 것이다. 이 작품은 전시공간의 기온과 관객의 체온에 반응하여 그 형상이 마치 신기루처럼 나타나고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그리하여 한국화의 불가침의 신성한 주제인 사군자를 일종의 유희적인 ‘인터랙티브 아트’로 변형시킨다. 매난국죽의 되풀이되는 나타남과 사라짐은 세속화의 딜레마를 효과적으로 예시한다. 신이 존재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허용되지만 또한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은 것이다. 신성한 존재는 전승의 대상이지만 동시에 전복의 대상인 것이다. 최현석의 회화 속 인물들의 지워진 얼굴은 모든 표정을 허용할 수 있지만 아무 표정도 선택하지 않는 것이다. 이런 모순된 상황을 긍정해야 하는 것이 바로 세속화의 딜레마이다. 전승과 전복의 길항작용 속에서 유희의 제스처를 거듭해야 하는 것. 매난국죽을 표출하고 은폐하기를 반복해야 하는 것. 끊임없이 사유하는 판단유보의 시간 속에서.
    ■ 김홍기 (미술비평가)



    이요나 ‘Monochrome on display’
    공간에 새긴 양립불가능성에 관한 가능성


    1. 루이지 루솔로(Luigi Russolo)가 미래주의 선언문 ≪소음의 미술(The Art of Noise)≫(1913)을 통해 현대미술에서의 소리를 언급하기 시작한 이후 ‘소리’는 세상에 ‘반응’하는 예술가의 또 다른 표현방식으로, 3차원 공간 내에서 반사와 흡수, 진동을 일으키며 새로운 시각적 파동을 선사하는 특별한 수단으로 존재해왔다.
    19세기의 낭만파 이래 소리를 예술 축으로 하는 이들의 작업은 기본적으로 기존 음계에 의해 구축된 음악을 해체하거나 탈 범주화하는 것이었고, 예술적 도그마(dogma)로부터 이탈한 학제 간, 장르 간 교종이라는 깊고 긴 터널에 위치하는 것이었다. 더구나 20세기 초중반 이후 자연발생적인 소리마저 하나의 예술재료-음악적 요소로 삼는 과감한 시도 등은 청각적 환희와 대각성상에 놓인 그 어떤 것까지 건드리곤 했다.

    소리, 화장하여 ‘음악’을 말하면 빼놓을 수 없는 작가 중에는 이요나가 있다. 작금의 작업과는 차이가 두드러지지만 2012년 오클랜드 테투히미술관에서 열린 ’Composition’ 전을 기준으로 한 그의 작업 역시 태동은 음악이다. 첼리스트가 꿈이었던 작가의 초기작엔 음악적 차용을 담보하는 구체적 지시성이 묻어난다. 다만 소리와 연계된 여타의 작업들이 어떤 물체에 에너지를 가했을 때 발생하는 파동을 직접적으로 다룬다면, 이요나는 예술적 도구로서의 음악적 요소가 어떤 식으로 인지될 수 있는지에 멈추지 않고 좀 더 공간과의 융합에 근접했다는 것이 특징이다. 그것은 바로 시청각적 여운을 넘어선 시지각적 재구성에 의한 타자의 발견이며, 공간까지 아우르는 변화무쌍한 상상력을 덧댄 미적 가치의 공명이다.

    예를 들면 앞서 언급한 ‘Composition’은 첼로(cello)라는 사물로 작화(作畵)의 기원을 불러오고, 스틸로 건축된 공간의 규모와 특성을 전시장 고유의 특질로 치환한 작업이다. 여기서 덩그러니 놓인 첼로라는 오브제(Ready-made)가 생성하는 여백은 다층적이다. 작가의 정체성을 지시하는 것일 수도 있고 사연 있는 히스토리를 나타내는 상징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오브제는 공간에 들어선 순간 시각화-지각화 되면서 일견 ‘관찰하는 음악’이자 ‘보기의 음악’, ‘물질과 공간을 잇는 묵언과 다언’ 사이에 머물게 된다. 어찌 보면 청각으로부터의 은유가 시각의 결에 맞닿는 숙시(熟視)이기도 하다. 그리고 신체의 오브제, 공간예술로서 퍼포먼스부터 시작한 존 케이지(John Cage)처럼 미술은 본래 오브제적인 것임을 가리키기도 한다.

    2. 첼로가 등장하는 ‘Composition’과 불과 1년 남짓한 간극임에도 현(絃)의 역할이 공간을 분절시키는 역할로 전이된 이요나의 작품 (2013)는 (2012)나 (2016)처럼 연주되고 재생될 만큼 활동적이거나 극적이진 않으나(이들 작품은 하나의 기호공간에 가하는 불확정적이고 즉각적인 분할이라는 특징을 지닌다) 소리를 공간 속에서 보다 진화시킨 작업이라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잡지, 화분, 옷걸이, 가방, 옷, 양철통 등의 온갖 다양한 사물들이 철선에 매달린 이 작품은 기존의 현이 조형요소로 적극적으로 쓰임된 것이면서 공간을 어떤 방식으로 조직-작곡(Composition)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까지 포박한다.

    그러나 는 무엇보다 반응된 공간이 상황으로 치환된 것이라는 데 방점이 있다. 그건 기본적으로 청각의 영역이 ‘이미지’로 옮겨진 서술이며, 에서 유추되듯 조형(造形)이라는 궁극을 향해 시공을 포박한 비물질성이 물리적 주변 환경과 어떻게 조우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으로도 해석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작품은 관객이 마음껏 만질 수 있고 향을 맡거나 맛볼 수 있도록 한 관객 참여형 작품이기도 하다.

    음악적 요소로부터 출발한 작가의 작품은 마음 깊은 곳에 똬리 튼 내면의식과 외부와의 소통, 작가가 제시한 오브제로부터 빚어지는 주체와 타자 간 상호성의 문제를 거론한다. 삶과 예술 혹은 한국과 뉴질랜드라는 같은 듯 다른 환경 속에서 자연스럽게 스며든 시공간을 넘나드는 탈영역화는 궁극적으로 현존성에 관한 자문을 비롯해 ‘시각을 관통하는 청각과 청각을 통한 이미지’라는 예술을 배양해 왔음이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이요나의 작품들에선 음악적이거나 공간적-시각적인 ‘작곡’이 일상을 무대로 포획되고 전개되어 온 반면, 일상 속에서 시각예술로 다시 소환-연주된다는 것에 흥미로움이 있다. 시공을 가르고 나누며 그 내부에서 생성과 소멸-소환작용을 일으킨 채 재생음과 무음 사이에서 충돌하고 호흡하는, 그러면서도 음악과 시각이라는 각각의 고유한 성질을 비틂으로서 공간 내 보이지 않는 파동을 일으키는 상황은 일종의 감각의 배반을 일깨우는 작업이라는 것이다.

    이와 관련된 대표적인 작품이 바로 최근 뉴질랜드 오클랜드 ‘Te Tuhi Centre for the Arts’에서 선보인 (2017)이다. 2016년 대안공간 루프와 난지창작스튜디오(In Transit(Intro))에서의 작품을 연장하는 이 작품은 매우 큰 규모로, 전시실에 들어선 순간 관람객은 이미 작품 내부에 있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관람객은 작품의 일부가 된다. 상호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선 와 맞닿는다.

    하지만 스테인리스스틸로 제작된 이 구조물은 단순한 설치 작업이라기 보단 스테인리스스틸 파이프의 기능적인 측면에 주목해 인간 삶의 거처와 이동(In transit), 메워지길 기다리는 공간을 묻는 건축물에 가깝다. 서울 지하철역, 뉴욕 지하철로 진입 할 때 마주하는 개찰구를 응용한 듯 보이는 이 거대한 금속 구조물은 전시장의 크기와 형태, 공간의 평활도와 수직 및 수평의 지점까지 고려된, 매우 치밀하게 계획된 것으로, 공간과 공간을 묶고 개별적인 반응과 상황을 ‘공유의 무대’로 소환한다.

    때문에 은 익숙한 듯 낯선 차원의 공간을 형성하지만 그러므로 다분히 동시대성(Contemporaneity)을 함의한다. 왜냐하면 동시대성은 집단적 혹은 개별적으로 시대를 살아가는 데 있어 새로운 방식을 끊임없이 드러내는 문화적 상태로의 역사적 전환을 촉발하며, 세계화와 중첩된 채 서로에게 투자하고 간섭하며 필요에 따라 개별적인 양태를 띠기 때문이다.

    더구나 ‘OCI미술관’에 소개될 작품을 포함한 이요나의 근작은 ‘동시대적(contemporary)’이라는 개념까지 포괄한다. 다름의 직접성인 이것은 시간 안에 존재하는 다양한 방식, 우리와 시간성을 고르게 함의하지만 동시에 각자 고유의 시간성을 살아가는, 현재의 시간 안에 존재하는 것들을 타인들과 지분하며 공존하는 다양한 방식을 가리킨다.

    3. 이요나의 근작에서 마주할 수 있는 문명적 삶과 그 삶들의 조합, 그것은 공간성과 더불어 ‘공소(空所)’의 미(美)라는 원리, 시간성을 함께한다. 동시에 각자 고유의 시간성을 살아가는 현재의 시간으로 파편화된다.(공간은 크게 실제의 공간과 기호의 공간으로 구분되고, 실제의 공간과 기호의 공간은 모두 시간으로 측정되는 공통점이 있다.) 그리고 그 파편화를 담보하는 것은 그의 손에 의해 선택되어진 여러 사물들, 다시 말해 옷걸이에서부터 전등, 버스 핸들, 거리 표지판, 의자, 장난감, 우산에 이르는 다양한 일상의 물체들이다.

    이 사물들은 공간과 일상의 복제 장치이지만 시공의 변주와 맞물려 끊임없이 수다스런 소리-잡담-소음 속에선 결코 들리지 않을 침묵의 언어(카오스적 언어)를 애써 찾아내려는 것만큼이나 아이러니함을 내재한다. 그러면서 매일 듣게 되는 소리(음악)처럼 일상에 침투한 미술의 일상성을 의미하는 이요나 만의 언어로 귀납된다. 우린 그 속에서 언제나 이동-탈범주화 하는 동시대인들의 특성을 반영하는 이미지를 마주한다.

    이요나의 작품들은 음악과 미술을 연계한 ‘대단히 체계적이나 즉흥적이고 임시적 공간’을 통해 공감각적 상황을 연출하고, 신체를 위시한 촉각의 가능성을 탐구하며, 일상 속 예술의 심리성을 탐색한다. 이는 어쩌면 관객들의 인지와 사고, 개념에 혼란을 초래하는 작업들일 수 있음에도 그것을 통해 새로운 미적 가치를 일깨우기 위한 시도라는 점에서 눈여겨볼 만하다.

    비록 누구에게나 인식 가능할 만큼 이해가 원활한 것도 아니고, 취합의 구조 역시 음악에서의 음계나 이치를 따지기도 어렵지만 미학자 유은순의 서술처럼 “물리적, 심리적 제약을 작품에 그대로 끌어들여 자연스럽게 삶의 일상성이 미술에 침투하게 둔다. 그리고 목적과 동선에 따라 효율적으로 최적화된 기존의 건축적 설계에 반하도록, 즉 끊임없이 길을 잃고 헤매도록 공간을 설계한다. 이를 통해 삶의 일상성을 깨트리고, 관객에게 물리적, 심리적 해방감을 선사한다. 또한 공간특정적인 이요나의 설치는 비가시적이거나 숨겨진 공간을 드러내면서도 동시에 기존의 열린 공간을 구획 짓는다는 점에서 양가적 속성을 지닌다.”

    하지만 그것이 하나의 공간 속에서 병렬-중첩되면 기존 시청각적 체계는 무너지고 새로운 영역이 만들어진다. 여기엔 얽기 설기 엮은 구조물의 안전성에 반하는 구분, 제지, 차단이라는 규칙적 용도의 의미까지 포함된다. 따라서 관객은 양립불가능성에 관한 가능성의 이미지를 훑으며, 특정 카테고리 내부로 스스로 귀속시켜온 각자의 신체-관념을 해체함과 더불어 새로운 질서마저 맛보게 된다. 그건 바로 우리네 삶에서 익히 마주하는 상치되고 대립하며 조화로운 성격을 지닌 자웅동체와 같은 의미론적 시스템과 결이 같다.

    근래 이요나의 작업은 과거 대비 훨씬 넓은 확장성을 지닌다. 이번 ‘OCI미술관’ 전시에 출품된 작품에서 알 수 있듯 공간을 한층 더 새롭게 구조화하는 방향에서 설정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뉴질랜드와 한국을 관통하는 내적 상황-내레이션을 담아내듯 문화적, 물리적 측면으로의 소통과 함께 장소 특정성과 무형의 시간성마저 넘어선다. 이는 시간, 공간, 관계성을 함유한 여러 종류의 공간을 지나가면서 경험하는 삶, 인지각적 관점에서의 서술이 우선되고 있다 해도 무리는 없다.

    그래서일까, 필자는 전시 이전 이 원고를 작성해야하는 탓에 그의 실제 설치작품을 볼 순 없었지만, ‘Monochrome’을 주제로 한 작가가 보내온 다양한 자료를 통해 적어도 이요나의 공간 특정적 설치, 전치(轉置)되는 공간, 건축적인 설치작품을 통해 낯설지 않은 일상에서 접하는 익숙한 공간과 사물이 선사하는 낯선 경험을 목도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한다. 물론 머잖아 공간을 텃밭으로 수없이 변모하는 상황과 반응을 체감할 수도 있을 것이다.
    ■ 홍경한 (미술평론가)

    전시제목2017 OCI YOUNG CREATIVES – 최현석, 이요나

    전시기간2017.09.21(목) - 2017.10.20(금)

    참여작가 최현석, 이요나

    초대일시2017년 09월 21일 목요일 05:00pm

    관람시간10:00am - 06:00pm / 수요일 10:00am- 09:00pm

    휴관일일,월요일 휴관

    장르회화

    관람료무료

    장소OCI 미술관 OCI Museum Of Art (서울 종로구 우정국로 45-14 (수송동, 송암미술관) )

    연락처02-734-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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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akeshi Machiya展

    갤러리 담

    2017.10.12 ~ 2017.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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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하 노피곰

    롯데갤러리 광주점

    2017.09.23 ~ 2017.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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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재의 가벼움, 가벼운 존재 Lightness of Being, Absence of Ego

    갤러리 이즈

    2017.10.18 ~ 2017.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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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억의 활용 –상상과 실재

    대안공간 눈

    2017.10.13 ~ 2017.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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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공관_기억의 공간 그리고 관계에 대하여

    대안공간 눈

    2017.10.13 ~ 2017.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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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속에서 나를 보다

    대안공간 눈

    2017.10.13 ~ 2017.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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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빛으로 물든 가을

    전북도청 기획전시실

    2017.10.16 ~ 2017.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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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색실험

    서울시청 하늘광장 갤러리

    2017.09.04 ~ 2017.10.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