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림다방, 30년 _젊은 날의 초상

2020.01.28 ▶ 2020.02.09

류가헌

서울 종로구 자하문로 106-4 (청운동, 청운주택) 전시1, 2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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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충열

    <학림다방 30년>_ 가수 김광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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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충열

    <학림다방 30년>_ 가수, 학전 대표 김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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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충열

    <학림다방 30년>_ 문인 이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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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충열

    <학림다방 30년>_ 1987년 민주항쟁의 태극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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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충열

    <학림다방 30년>_ 2002년 월드컵 축제의 태극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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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충열

    <학림다방 30년>_ 1990년대 학림다방

  • Press Release

    학림다방의 ‘일루전’

    사진이 만들어지는 원리는 눈으로 사물을 보는 것과 같다. 대상에서 반사된 빛을 눈이 감지하듯 카메라에서도 반사된 빛을 카메라 센서가 감지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카메라 센서가 렌즈를 통해 들어온 빛을 읽고 저장한 것이 사진이다. 그래서 사진을 빛의 예술, 혹은 빛이 그린 그림이라고 한다. 나는 사진을 그림자의 예술로 보기도 한다. 빛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림자가 존재한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피사체의 성격에 따라 빛이 더 중시되어야 하는 사진이 있는가 하면, 그림자가 더 중시되어야 하는 사진도 있는 것이다.
    ‘학림다방’이 피사체가 될 때 그림자가 더 중시되어야 한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학림에 고여 있는 시간은, 그 시간의 지층은 빛보다는 그림자 속에서 오히려 더 잘 보일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시간에 잠긴 피사체의 깊이는 그림자의 깊이와 밀접하게 연결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학림 안의 사물과 사람은 물론 학림의 창에서 내다본 바깥풍경도 그림자의 깊이가 요구된다. 대학로의 극장 내부 풍경도 마찬가지다. 극장은 이야기를 만드는 공간이다. 이야기 속에는 시간이 축적되어 있다. 극장이 시간에 잠긴 공간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학림다방 30년>의 모든 사진이 흑백인 것은 이런 나의 생각과 무관하지 않을 거라는 느낌이 든다.
    나를 학림의 그림자 속으로 이끈 이는 이덕희였다. 1956년 서울대 법대에 입학한 이덕희는 이듬해 문을 연 학림을 드나들기 시작했다. 관념에 홀려 위대한 망상을 꿈꾸었던 그녀에게 나무 계단 위에 다락처럼 떠 있는 학림은 아늑한 둥지와도 같은 공간이었다. 겨울 새벽 수유리 화계사로 산책 나갔다가 불현듯 모차르트가 듣고 싶어 미친 듯이 학림으로 달려와 LP판을 올려놓았던 곳이기도 했고, 자살로 생을 마감함으로써 영원한 아웃사이더가 되어버린 전혜린을 죽음 하루 전날 만난 곳이기도 했다.
    이덕희가 쓴 <전혜린 평전> 첫 문장은 ‘전혜린은 서른한 살에 죽었다“이다. 1965년 1월 10일이었다. 하루 전인 1월 9일 오후 3시 이덕희가 학림으로 들어섰을 때 ’오른편 맨 구석, 창가 자리에 웅크리고 앉은‘ 누군가가 손짓을 했다. 전혜린이었다. ’밤색 밍크코트에 몸을 감싸고 반은 축축한 긴 머리카락에 얼굴이 거의 가려진 채 두 눈만 불꽃처럼 번쩍거렸던‘ 전혜린은 ”덕흴 만나려고 세 시간이나 기다렸어!“ 하고 높은 목소리로 말하며 이덕희의 팔을 잡았다. 그날 그들이 헤어진 것은 저녁 10시 경이었다. 다음날 여느 날처럼 학림을 찾은 이덕희는 다방 전화기를 통해 전혜린의 죽음을 들었다.
    그런 학림이 사라진 것은 1983년이었다. 주인이 학림을 팔고 미국으로 이민을 간 것이었다. 새 주인은 대학로라는 새로운 소비문화 거리의 고객 취향과 맞지 않는 학림의 60년대 분위기를 벗겨내었다. 1985년 가을 오랜만에 학림을 찾은 이덕희는 경악했다. 젊은 시절의 아늑한 둥지였던 그곳이 상업적인 냄새가 물씬 풍기는 레스토랑으로 변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신의 일루전(illusion)이 훼손된 듯한 고통을 느꼈다.
    “우리가 사랑하는 대상은 실상 우리가 만들어낸 일루전에 불과하다는 것, 우리는 일생 동안 자신을 이해해 줄 사람, 서로의 영혼을 비춰줄 대상을 찾아 헤매지만, 언제나 우리가 돌아오는 지점은 허허한 벌판 위에 고독하게 서 있는 무서운 실존밖에 없다는 것......”
    이런 절망을 견디는 방법의 하나가 음악이라는 일루전이었다. 음악이 이덕희의 일루전이 된 데에는 학림의 역할이 컸다. ‘존재의 중심이 음악으로 꽉 채워지는 느낌’을 학림에서 자주 받았기 때문이다. 그 소중한 공간이 황폐하게 변해버린 것이었다.
    학림이 옛 모습으로 복원된 것은 1987년 이충열 대표가 학림을 인수하면서였다. 그 사실을 몰랐던 이덕희는 학림 근처에도 가지 않다가 1992년 늦여름 나에게 이끌려 학림으로 들어갔다. 학림이 옛 모습을 되찾았다는 사실을 확인한 이덕희는 한동안 멍하니 서 있다가 어린 아이처럼 환한 표정으로 주위를 찬찬히 둘러보고는 창가 테이블에 앉았다.
    “여기가 내 자리였어. 해질 무렵 여기에 앉아 있으면 창호지 문살을 뚫고 연한 노을이 쏟아져 들어왔지. 그 노을들은......”
    기쁨과 슬픔이 뒤섞인 표정으로 ‘학림 시절’을 회상하는 그녀에게 낯선 남자가 다가와 “이덕희 선생님이 아니냐”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충렬 대표였다. 1960년대 학림을 드나들었던 ‘옛 손님’들에게 학림의 터주와도 같았던 이덕희의 전설적 이야기를 여러 차례 들었던 이충열 대표는 이덕희가 언젠가 학림을 찾을 것이라는 믿음에서 사진에서 본 그녀 모습과 비슷한 손님을 보면 유심히 살폈다고 했다. 그날 이후로 이덕희는 학림 커피 마니아가 되었다.
    글을 쓰지 못하면 죽은 목숨이라고 했던 이덕희가 건강 악화로 글을 거의 못 쓰게 된 것은 70세로 들어서면서였다. 시력이 약해져 책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도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다. 만성적인 수면 부족에 시달렸던 그녀에게 환청 증세까지 생겨 짧은 잠마저 잠식당했다. 그녀가 유일하게 누리는 호사는 커피였다. 커피를 마시기 위해 억지로 하루 한 끼를 먹었다. 외출이 힘들어지고부터는 학림 커피를 택배로 받았다.
    2016년 8월 11일 나는 시내로 외출했다가 집으로 들어가던 도중 혜화역에서 내려 학림을 찾았다. 사흘 전인 8월 8일 이덕희와 전화 통화에서 “너무 힘들어 전화 받을 상태가 아니다, 이번은 회복이 힘들 것 같다, 전화 줘서 고맙다, 며칠 후 다시 전화해 달라”고 그녀는 힘겹게 말했다. 평소와는 전혀 다른 목소리인데다 ‘다시 전화해 달라’는 마지막 말이 마음이 걸려 있었는데, 이덕희에게 정기적으로 커피를 보내는 이충렬 대표가 그녀의 상황을 알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어 학림으로 간 것이었다. 이충열 대표는 7월에 커피를 보낸 후 연락이 없었다고 했다. 이상한 예감에 바로 전화했다. 전화를 받은 이는 이덕희가 아니었다. 그녀의 여동생이었다. “언니가 오늘 돌아가셨다, 영정사진을 가지러 여길 들렀다가 전화를 받았다”고 했다. 저녁 10시경이었다. 외부에는 장례식을 다 치르고 알리려 했다는 가족의 말을 장례식장에서 들었다.
    <학림다방 30년> 28페이지에 이덕희의 사진이 있다. 창가 테이블에 앉아 밤의 불빛이 비치는 창을 등진 자세로 왼쪽 손을 턱에 살짝 괴고 학림 내부에 있는 무언가를 혹은 누군가를 보고 있다. 멍해 보이는 표정에 슬픔이 느껴진다.
    이덕희는 전혜린의 죽음을 늘 가슴 속에 지니고 있었다. 그 죽음의 무게, 그 죽음이 불러일으키는 슬픔과 고통을 나는 가늠할 수 없다. <전혜린 평전>에서 “나는 그녀를 대신할 어떤 대상도 다시는 발견하지 못했다. 우리가 함께 누린 시간, 우리가 함께 나눈 대화, 우리가 공유한 세계는 진실로 일회적인 것이고 유일한 것이었음을 세월이 갈수록 더욱 절감하게 된다”고 썼다. 이덕희에게 학림은 ‘젊음의 성소’였고, 전혜린의 추억과 연결된 상실과 슬픔의 공간이었다. 이런 점에서 이충열 대표가 카메라로 포착한 이덕희의 모습은 절묘하다.
    롤랑 바르트는 <카메라 루시다>에서 “나에게 ‘시간’의 소리는 조금도 슬프지 않다. 나는 종, 괘종시계, 손목시계를 좋아한다”고 썼다. 그러면서 “카메라는 무언가를 보게 하는 괘종시계였으며, 나의 내부에 있는 어떤 구식 사람은 아직도 카메라에서 목관악기의 생생한 소리를 듣는다”고 했다.
    1987년 학림의 잃어버린 공간을 복원한 이충열 대표는 시간까지 복원하는 작업을 30년 전부터 하고 있었다. 그 결실이 <학림다방 30년>이다. 학림을 복원한 이가 이충열 대표 내부에 있는 ‘어떤 구식 사람’이었듯이 <학림다방 30년>를 만든 이도 그의 내부에 있는 어떤 구식 사람이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 구식 사람은 어쩌면 지난 30년 동안 자신의 카메라에서 목관악기의 소리를 들었을 지도 모른다.
    ■ 정찬 소설가


    어릴 적에 나는 내 얼굴이 아주 잘 생겼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진에 나온 내 얼굴은 내가 생각하는 얼굴이 아니었다. 이건 카메라가 잘못된 것이든가 사진을 잘 찍지 못해서 일거라 생각하면서, 사진 찍히는 걸 아주 싫어했다. 그렇다 보니 어느 자리에서건 사진을 찍는 일은 항상 내 몫이었다. 어떻게 하면 더 잘 찍을 수 있을까 궁리한 것이, 사진을 계속 찍는 계기가 된 것 같다.

    1974년인가 YMCA에 사진학원이 처음 생긴 해에 1기로 등록했는데, 연세가 많으신 최수길 선생님이 수강생들을 가르치셨다.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안셀 애덤스 같은 사진가들처럼 멋진 흑백사진 찍는 법을 배울 줄 알았는데, 주로 원판필름 수정하는 법, 화공약품을 저울에 달아 현상약 만드는 법 등을 배웠다. 당시 겉멋이 잔뜩 들어서는, 카메라가 좋지 않아 좋은 사진을 못 찍는다고 여겼다. 장비욕심은 많은데 돈은 없으니, 당첨되면 라이카 핫셀블러드를 살 수 있을 것 같아 주택복권을 사기도 했었다.

    그러다 입대를 했는데, 운 좋게 국방대학원 비서실에서 사진병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의무와 취미가 겹친 행복한 시기였지만, 제대하고는 학업과 취업 등으로 사진과 멀어지고 꿈만 꾸는 어려운 시절이 이어졌다.

    내 생에 행운이 찾아온 것은 1987년이다. 대학로에 있는 ‘학림다방’을 운영해보라는 권유를 받게 된 것이다. 서울대학생들의 아지트였던 학림다방은 나 같은 사람은 몇 번 밖에 못 가본 다방이었다. 75년에 서울대학교가 관악캠퍼스로 이전한 이후로 힘겨운 시기를 보내다가 결국 새 주인을 찾는 중이었다. 실내 분위기도 클래식음악이 흐르고 젊은이들이 모여앉아 진지하게 토론하던 모습은 간 데 없고 유선방송 가요에 나팔바지를 입은 웨이터가 와서 주문을 받는, 그런 모습으로 변해있었다. 내가 학림다방을 시작한 것은 87년 3월 20일이었다. 나는 먼저 음악을 클래식으로 바꾸고 3월인데도 주렁주렁 걸려있던 크리스마스 장식들을 치웠다. 집에도 가지 않고 소파를 붙이고 잠을 자면서 내가 동경했던 옛 학림다방의 모습으로 하나씩 하나씩 어색하지 않게 고쳐나갔다.
    옛 학림의 모습을 얼마나 되찾았는지에 관해서는, 이런 일화가 있다.
    지금은 작고하신 문인 이덕희 선생님은 서울법대 시절 ‘학림다방 비품’이라 불릴 정도로 단골손님이었다. 그런 분이 나중에는 크게 실망하여, 아예 학림이 있는 대학로 방향으로는 다니지도 않고 창경궁 쪽으로 에돌아 다녔다. 어느 날, 소설가 정찬 씨가 이덕희 선생과 식사를 했는데, 식후에 학림에서 커피를 하자고 권했더니 이덕희 선생이 한사코 싫다하셨다 한다. 변해서 나는 안 간다고. 어떻게 변했기에 저러실까 싶었던 정찬 씨는 자기가 한번 올라가 보겠다며 학림엘 혼자 왔다. 그런데 변했다던 학림은 예전 그대로 클래식음악이 흐르는 조용한 분위기가 아닌가. 결국 함께 올라와서 놀라 눈이 휘둥그레진 이덕희 선생님을 내가 알아보았다. 그 과정이 정찬 씨 소설 <베니스에서 죽다>에 한 줄거리로 나온다. 학림의 단골이라 할 수 있는 여러 문인들과 마찬가지로, 이 선생님과의 교류는 돌아가실 때까지 이어졌다.

    80년대 90년대, 대학로에서는 민주화 시위가 연일 이어졌다. 그걸 막는 경찰과 시위대의 충돌로 거리는 소음과 최루탄냄새가 가득했다. 그 시절 학림다방은 학생들이나 데모하는 사람들의 피난처였다. 장사는 잘되지 않았지만 학생운동의 시발점인 학림다방을 운영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큰 자부심이 있었다. 학림의 창밖으로 대학로 거리의 데모 장면을 사진 찍을 수 있었다.
    ‘연우무대’가 신촌에서 대학로 극장으로 옮겨오고 나서부터는 연우무대의 연극사진을 찍게 된다. 김민기, 이상우, 김석만, 김광림 등 서울문리대에 다녔던 문화예술계 사람들이 단골손님으로 오기 시작했다. 그때 연우무대에 지금은 유명한 대배우가 되어있는 송강호 씨가 신입 단원으로 연극 <동승>에서 조연을 맡고 있었다. 지금처럼 유명해 질줄 알았으면 사진을 많이 찍었을 텐데.

    ‘학전소극장’에서도 <김광석 콘서트>, <뮤지컬 지하철1호선> 등 많은 공연이 열렸다. 가수 김광석의 빛나던 시절과 설경구, 황정민 그리고 이름은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얼굴을 보면 누구나 알 만큼 열심히 활동 중인 여러 배우들의 초기 사진도 찍을 수 있었다.

    학림다방 한 장소에서 30년 넘게 지켜본 사람들, 주변의 풍경들,,, 사진을 보면 모든 것들이 참 많이 변해 가고 있는 걸 느낀다. 그동안 학림다방에 오신 손님들을 한분한분 촬영했으면 지금쯤은 우리나라 근대인물사가 되었을 텐데 그걸 기록하지 못한걸 보면 유능한 사진작가의 자질은 없는 것 같다.
    그나마 여기에 보여 드리게 되는 사진들은 30여 년이 지나고 보니 세월이 귀한 사진으로 만든 것 같아, 오래 동안 사진기를 놓지 않은 보람을 느낀다.
    ■ 학림에서 이충열

    전시제목학림다방, 30년 _젊은 날의 초상

    전시기간2020.01.28(화) - 2020.02.09(일)

    참여작가 이충열

    관람시간11:00am - 06:00pm

    휴관일월요일

    장르사진

    관람료무료

    장소류가헌 Ryugaheon (서울 종로구 자하문로 106-4 (청운동, 청운주택) 전시1, 2관)

    연락처02-720-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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