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포스터
김영헌
P22018-일렉트로닉 노스탤지어 2022, 린넨에 유채, 184x184cm
김영헌
P22025-일렉트로닉 노스탤지어 2022, 린넨에 유채, 145x112cm
김영헌
P22040-일렉트로닉 노스텔지어 2022, 린넨에 유채, 112x145cm
김영헌
P22045-일렉트로닉 노스탤지어 2022, 린넨에 유채, 97x130cm
김영헌
P23043-일렉트로닉 노스탤지어 2023, 린넨에 유채, 100x80cm
창신(創新)의 열정과 이지적 사변의 합일
이진명, 미술비평ㆍ철학박사
충돌은 존재의 조건이다. 우리는 세계에 시달린다. 동시에 세계의 음덕으로 살아간다. 빛은 그늘과 어둠 때문에 본질을 드러낸다. 우리는 태양 가까이서 빛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없다. 여름날 쨍쨍한 태양의 작열보다도 동굴에 스며든 빛에서 그것의 위대함이 느껴진다. 빛은 어둠과 한 몸일 때 아름다움을 드러낸다.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 1887-1965)의 롱샹 성당(Notre Dame Du Haut, Ronchamp)은 어둠에 잠긴 채 작은 창들로 들어오는, 가늘게 겹치는 빛줄기와 한 몸이 되어 신성을 표현하는 것이다. 원대의 신비한 화가 예찬(倪瓚, 1301-1374)은 최소의 형상만을 남겨서 무한의 공간을 창조한다. 예찬의 무한 공간은 허무(虛無, nihil)의 공간이 아니다. 그것은 만상(萬象)의 연원이자 만동(萬動)의 근본이다. 예찬의 <용슬재도(容膝齋圖)>와 <여섯 군자 그림(六君子圖)>에 나타난 빈 공간과 최소화된 사물이 연출하는 허실(虛實) 관계야말로 대대적(對待的)이면서도 서로 기대어 자기를 있게 하는 존재의 천리(天理)를 여실하게 보여준다. 원수 구(仇)라는 한자는 원수라는 뜻도 있지만, 동시에 반려자[侶]라는 뜻을 동반한다. 모든 것은 대대적 관계이지만, 그 속에 나의 짝이 있으며 나는 대대적 관계에서 진정한 조화의 묘를 얻게 되는 것이다.
김영헌(金永憲, 1964-)의 회화세계도 그와 같다. 작가는 상반된 색의 충돌, 형의 구축과 형의 해체, 진동과 리듬, 수렴하는 상(象)과 확산하는 에너지를 대결시켜 믿기 힘든 회화적 에너지를 한 화면에 쏟아낸다. 그가 그리는 거의 모든 회화작품에 불가사의한 생명력과 힘이 분출한다. 모든 회화작품이 화가의 실존과 관련되듯이, 김영헌은 자기 회화의 본체를 말하기에 앞서 세 가지 경험을 이야기한다. 하나는 어릴 적 호수에서 느꼈던 신비한 경험이다. 둘째, TV 브라운관에서 발생한 노이즈 현상의 강렬한 기억이다. 셋째, 작가는 메타버스와 같은 새로운 개념의 공간이 도래할 것이라고 예견했으며, 이는 적중했다. 멀리 떨어진 공간에서 아들과 게임을 하며 함께 있는 듯 즐거웠던 인터넷 가상공간에서의 기억이 그것이다.
김영헌 작가는 어릴 적 낚시를 하다 찌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이내 찌에서 시선이 물결로 옮겨갔고, 끝없이 오가는 물결을 응시하다 급기야 시간과 공간이 미묘하게 왜곡되고 변화하는 전율을 체험했다고 한다. 5세기 동진(東晉) 때 쓰인 『세설신어(世說新語)』에 다음과 같은 말이 등장한다.
눈동자가 만물에 접촉하는 것인가? 아니면 만물이 눈 안으로 비쳐 들어오는 것인가? 1)
이 문장은 현대철학에서 사실주의와 관념주의 사이에 일어나는 논쟁을 선취하고 있다. 우리 앞에 놓여있는 만물은 실재하는 것인가? 아니면 우리의 지각이 만드는 상(象)에 불과한 것인가? 그것은 아무도 알 수가 없다. 물자체(物自體, das Ding an sich)는 인식능력을 벗어나기 때문이다. 우리의 지각(눈동자)이 사물(만물)에 접촉한다면 사물은 실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비쳐 들어오는 것이라면 사물은 지각에 비춘 상일 것이다. 원문에 나타난 ‘촉(屬)’과 ‘래입(來入)’의 관계는 회화에서도 매우 중요한 것이다. ‘촉’을 강조할 때 사실주의가 되고 ‘래입’에 초점을 맞출 때 인상주의가 되기 때문이다. 보다시피 김영헌의 세계는 이 둘을 모두 뛰어넘는다. 작가의 어릴 적 호숫가의 체험, 즉 찌를 응시하던 ‘촉’의 지각에서 변환자재로 물결이 파문을 이루다 이내 파장을 이루어 호숫가가 에너지의 장으로 변환되어가는 현상을 인식한 체험은 ‘래입’의 단계와 같다. 이 시기의 지각 체험은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듣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깨우침으로 도약한다.
TV 브라운관은 질서를 통해 영상을 재현한다. 질서가 어긋날 때 노이즈가 발생한다. 작가는 노이즈에서 지대한 미적 체험을 누렸다. 우리가 사물을 바라보고 예술작품을 감상하는 지각은 본성(nature)에 의한 것이거니와 역사적 조건과도 연관된다. 본성과 역사적 조건 중에 무엇이 중요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둘 다 중요하다. 예컨대,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밀로의 비너스를 경외(reverence)의 대상으로 숭배했지만, 중세 사람들은 불길한 우상(ominous idol)쯤으로 경시했다. (Walter Benjamin). 우리 시대의 감각은 이전 어느 시대보다도 첨예하다.
TV 브라운관의 색채는 일상의 색과 다를 뿐만 아니라 기존했던 회화의 색채와 천양의 차이를 지닌다. 작가는 현대회화에서의 새로운 형식과 색채를 예견했다. 벌써 20여 년 전 일이다. 브라운관에서의 노이즈는 사방으로 튀는 빛 알갱이의 질서를 잡아주던 인력(引力)이 해이(解弛)해지다가 와해하였을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노이즈가 발생할 때 빛 알갱이는 폭주하여 색은 서로 충돌하며 형상은 이내 붕괴한다. 그런데 언제나 그렇듯 무질서의 혼돈 속에서도 주기와 리듬이 존재한다. 작가는 이를 주파수, 즉 프리퀀시(frequency)라고 명명한다. 그런데 무질서 속에서 주기와 리듬에 익숙해지다 보면 무질서는 혼란이 아니라 찬연한 질서의 가능태로 보이게 된다. 이러한 인식이 확장되다 작가는 메타의 세계를 상정하기에 이른다. 2)
작가는 이를 메타리버(meta-river)라고 명명하는데, 또 다른 질서와 인식을 낳을 새로운 시공을 뜻한다. 그리고 질서와 인식의 유유한 흐름을 ‘리버’라고 명명한 것이다. 기존의 메타버스가 현실의 모방과 그 적용이라면 작가가 상정하는 메타리버는 순수 사유의 에너지장(場)이다. 그런데 작가의 이러한 내용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위에서 언급한 사유는 작가의 회화세계에서 아주 일부분을 차지하는 내용이다. 중요한 것은 작가가 지금 새로운 회화(new painting)를 구축하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작가는 화면에서 상반된 색을 충돌시키면서 형상을 구축함과 동시에 해체한다. 구축된 형상을 다시 지우고 덧씌우고 가르고 베며 모호한 블러링으로 새로운 공간을 산생(産生)시키다 이내 다시 접는다. 그리고 이러한 회화의 제스처를 무수히 반복하면서 놀라운 화면을 잉태하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가 사는 현상계는 펼쳐짐(enfolding)과 접힘(unfolding)의 간단(間斷) 없는 흐름이기 때문이다. (David Bohm). 가장 추상적인 작가의 회화세계는 물리계의 진실과 닮아있다. 더욱이 작가가 산생하는 진동과 리듬, 수렴하는 상(象), 그리고 무한히 확산하는 에너지의 대조는 새로운 회화의 경지로 우리를 이끌어간다.
이번 작품의 표제는 <일렉트로닉 노스탤지어(Electronic Nostalgia)>이다. 주지하다시피 ‘노스탤지어’는 고대 그리스어 ‘노스토스(nostos)’와 ‘알고스(algos)’의 합성어이다.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데 가지 못하는 고통을 의미한다. 따라서 작가가 작품의 표제를 일렉트로닉 노스탤지어라고 명명한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21세기의 관점에서 그동안 집적된 문명을 바라보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리라. 특히, 현대회화에서 더는 새로운 의제나 스타일이 창출되지 않고 있다. 그런데, 작가의 생각은 그와 다르다. 기술과 정보의 교환으로 새로운 회화가 창출될 수 있는 요건이 종전보다 더 나아졌다는 것이다. 작가는 무엇보다도 글로벌 회화의 변화 요소로서 작가는 색상의 변화를 손꼽는다. 동시에 감수성과 지각의 변화도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많은 화가가 CMYK에서 이동하여 RGB 체계를 도입하고 있으며, 자연에서 수용했던 감수성에서 매체와 영상, 게임에서 보고 느꼈던 감수성을 회화에 옮기는 현상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종래에 없었던 감각과 감수성이 도래한 것은 명명백백하다.
그러나 작가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는데 회화적 회화(painterly painting)가 지니는 근원적 미감을 새롭게 구축한다는 점이다. 회화적 회화는 일체의 외부적 요소와 내용에 오염되지 않고 순수한 회화 그 자체를 추구하는 경향의 회화 창작을 가리킨다. 이 정의가 맞는 것이라면, 김영헌 작가의 회화는 새로운 회화적 회화의 가능성을 가장 잘 구축한 우리 시대 작가 중 한 사람이다. 김영헌의 회화를 바라볼 때, 우선 화면의 높낮이, 즉 층위를 보아야 한다. 그것은 절대 엷지 않고 두텁다. 두꺼운 회화는 불투명하다. 반대로 투명한 회화의 표면은 엷다. 따라서 두터우면서도 투명하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그런데 작가는 불가능을 헤쳐서 가능의 영역에 안착시킨다. 또한 작가가 어렵사리 여러 층위를 구가하는 것은 색과 색을 충돌시키고 층위와 층위가 저마다 에너지를 발산시켜, 마치 TV 브라운관의 노이즈가 격렬하게 끓는 것 같이, 강렬한 시각적 충격을 주기 위해서이다. 동시에 관객은 가르고 베는 작가의 재빠르고 기민한 제스처에서 끝없는 운동감과 리듬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작가의 정교한 터치와 대비되는 강렬한 운동감은 화면에 벡터(방향성)를 구성한다. 물결을 연상시키는 부분은 물 흐르듯이 경쾌하게 화면을 유영(遊泳)하며, 지층이 퇴적되어 쌓인 단괴(團塊)를 연상시키는 부분은 둔중하고 무겁게 화면 속으로 침잠(沈潛)한다. 반면에 허공을 가르는 연기를 연상시키는 부분은 한없이 투명하여 화면 밖으로 부유(浮遊)한다. 유영(遊泳), 침잠(沈潛), 부유(浮遊)에 함축된 뜻은 무엇일까? 김영헌의 회화작품은 중력을 지녔다는 뜻이다. 유영은 액체의 유동을 뜻한다. 침잠은 고체의 낙하를 뜻한다. 부유는 기체의 기화를 뜻한다. 이러한 공간과 물질, 사유의 흐름을 하나의 화면에 펼친 작가는 일찍이 없었다.
회화사에서 이제껏 무의식의 심연에서 우연히 심상(心象)을 건져 올리는 작가의 세계가 있었다. 숭고적 회화라고 하여 신성을 표현하는 작가도 있었다. 현재에 이르면 물론 미시세계를 그리는 작가도 있다. 불확정성을 의제로 삼는 작가도 있는가 하면 제임스 웹 망원경으로 촬영한 미지의 세계에서 암시를 받는 작가도 있다. 그렇다고 그것이 새로운 것은 아니다. 새롭다는 수식이 붙기 위해서는 미술사와의 부단한 대화를 통해서 엄중한 시험을 겪고 그것을 견디면서도 앞으로의 후세대에 영향을 미쳐서 새로운 선로를 잇게 할 수 있는 생명력을 화면 속에 배태해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러한 면에서 김영헌 작가는 미술사의 시련을 감내할 수 있는 작가라고 믿는다. 작가의 회화세계에는 아날로그의 유연한 본질과 디지털처럼 분절되고 객관화된 세계가 절묘하게 절충되었거니와, 작가는 회화에 신안(新案)을 제안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프랑스 사상가 클로드 엘베시우스(Claude A. Helvétius, 1715-1771)의 유명한 문장을 번안해서 김영헌 작가가 나아가는 목표를 재구성하고자 한다.
물리적 세계가 움직임의 법칙에 지배받듯이 도덕적 세계는 관심이라는 법칙에 지배받는다.3) 엘베시우스의 문장이 그렇다면 김영헌의 문장은 다음과 같다. “물리적 세계가 움직임의 법칙을 따르고, 도덕의 세계가 관심의 법칙에 좌우된다면, 예술 세계는 창신(創新)의 충동에 고무된다.” 이는 나의 말이기도 하고 작가의 말이기도 하다. 올가을 10월 13일 나는 작가의 작업실이 있는 서종면에서 작가와 함께 늪지를 바라보며, 많은 것을 배우고 느꼈다. 김영헌 작가는 자신감에 충만하여 있었으며, 확신에 차 있었다. 나는 그날의 생생한 생명체험을 여전히 간직하면서 작가의 그림을 떠올리고 있다. 나 역시 확신할 수 있다. 별을 새롭게 산생시키는 우주의 화이트홀처럼, 늪지에 알을 낳으러 오는 잉어의 생명력처럼, 광활한 창공에 울려 퍼지는 재두루미 울음소리처럼, 김영헌의 회화에는 진실한 생명체험으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1) 劉義慶, 『世說新語』 「文學」 48: “殷ㆍ謝諸人共集. 謝因問殷: ‘眼往屬萬形, 萬形來入眼不?’”
2) 메타버스는 주지와 같이 물리적 현실계를 넘어선 새로운 가상계를 뜻한다. 그런데 우리가 사는 이곳이 가상계가 아니라고 보장할 수 있는 근거는 희박하다. 장자(莊子)의 나비에 관한 꿈[胡蝶夢]은 아주 유명한 이야기일 것이다. 내가 나비의 꿈을 꾸는 것인지 나비가 장주(莊周)가 된 꿈을 꾼 것인지 우리는 철학적으로 구분할 수 없다. 우리는 1982년 철학자 힐러리 퍼트넘(Hilary Putnam, 1926-2016)의 사고실험인 ‘통 속의 뇌(the Brain in the Vat)’에 관하여 기억하고 있다. 온도와 산소, 영양염류가 완벽하게 구비된 통 속에 적출된 인간의 뇌를 넣어 생명을 유지하고 뇌에 슈퍼컴퓨터의 신호단자를 연결하여 오감과 현실감을 주면 뇌는 현실과 가상을 구분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는 어디에서 사는지 그 진실을 모른다. 옥스퍼드 대학 철학과 교수인 닉 보스트롬(Nick Bostrom, 1973-)은 「당신은 컴퓨터 시뮬레이션에 살고 있는가?(Are You living in a computer simulation?)」라는 논문에서 우리가 실재계에서 살고 있을 확률보다 가상현실에서 살고 있을 확률이 더 높다고 주장했다.
3) Abert O. Hircshman, The Passions and the Interests: Political Arguments for Capitalism Before Its Triumph(New Jersey,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13), p. 43: “As the physical world is ruled by the laws of movement so is the moral universe ruled by laws of interests.”
1963년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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