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수진 - 현시(現視)
2010.09.02 ▶ 2010.09.29
2010.09.02 ▶ 2010.09.29
정수진
Actor oil on canvas, 200x200cm, 2008
정수진
People in Landscape oil on canvas, 150x200cm, 2007
정수진
People in Landscape oil on canvas, 150x200cm, 2007
정수진
Still-Life in Progress oil on canvas, 150x200cm, 2007-2010
정수진
Untitled oil on canvas, 194x259cm, 2009
정수진
Untitled oil on canvas, 200x200cm, 2009
보는 것’과 ‘보이는 것’
유준상(미술평론가)
1)새삼스러운 이야기이지만, ‘미술’은 ‘눈’으로 보는 예술을 가리킨다. 조금 유식하게 말하면 시각예술이라는 것이다. 누구나 말하고 있는 이야기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누구나 ‘눈’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새삼스럽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 “새삼스러운....?”이야기를 꾸준히 탐구해온 한 미술가를 소개하고 함께 알아보자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지금 우리들이 눈으로 보고 있는 작품에 관해서 말이다. 이 그림을 그리고 있는 미술가는 정수진이다. 그리고 지금 눈으로 보고 있듯이, 그의 ‘이야기’는 ‘글’이 아니라 ‘그림’으로 말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새삼 새롭다는 것이다. 다시금 새롭게 우리들의 ‘눈’을 뜨게 하자는 것으로 인지(認知=perceive)된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눈’은 늘 일정한 공간에 멈추어 있지 않고 시간과 더불어 흐르기 때문이다. 이른바 ‘역사’라는 것이다. 다시 되풀이하자면, 우리들의 삶은 늘 새삼스럽다. 우리들은 살아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우리들 ‘눈’의 기능에 관해서, 영어권의 사람들은 “본다(looking)는 것은 항시 안다(seeing)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보는 것을 보는 것과, 아는 것을 보는 것은, 다르다는 말이다. 곧 눈으로 보고 있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알고 있는가의 문제라고 하겠다. 왜냐하면 ‘그림’은 그냥 그림이 아니라 그 속에 ‘뜻’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비근하게 예시하자면, 지금 독자들이 읽고 있는 이 ‘글’을 외국 사람들도 그 글씨를 ‘눈’으로 볼 수는 있지만 그 ‘뜻’을 전혀 풀어내지 못하는 경우와 같다고 하겠다. 정수진의 ‘눈’은 우리들의 눈과 다르지 않다. 우리들이 보는 것처럼 그녀도 본다. 하늘, 땅, 바다, 산천초목 그리고 인간들……. 그런데 이러한 ‘눈’의 정보(기호)들을 수용하는 그의 시각중추의 기능이 그의 전체(全體)로 지체 없이 파급되어(그린다던가, 칠하는 활동) ‘보는 것’을 ‘보이는 것’으로 바꾼다. 이것을 지금 우리들은 ‘눈’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그의 ‘그림’이다. ‘그림’은, 증명이나 설명을 하지 않아도 저절로 우리들의 ‘눈’에 들어온다.
2)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그림(pictura=picture)은 정신적인 영위이다.”는 유명한 말이다. ‘그림(회화)’은 눈이라는 감각기관에 비친 단순한 감각적인 소여(所與=sense data)가 아니라는 강렬한 주장이었다. 오백 년 전의 일이다. 그가 살던 당시의 세계는, 중세라는 이름의 유구한 세월에 걸쳐 온 세상이 거대한 심령(心靈)의 도가니 같은 엄청나게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공간이었으며, 그는 한 인간(개인)이 자신의 감각의 실마리를 통해서 정신의 전체상(全体像)을 구성해보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시련이었던가를 이겨낸 본보기 같은 인간이었다. 이러한 벙어리 냉가슴 같은 인종의 속사정은, 그 정도의 차이를 불문할 때, 정수진에게도 해당된다고 하겠다. 미술을 한 마디로 줄여서 “그림의 떡”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화가의 삶이란, 세상살이의 강약의 리듬…….이른바 현실이라는 통념하고는 무관하게, 주어진 자그마한 공간(아틀리에)에 틀어박혀 오직 자신의 ‘눈’에 비친 세계로 몰입하는 인간을 가리킨다. 이러한 삶을 비난하고 불평할 어떤 정치적인 또는 사회적인 권리도 우리들에겐 없다.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세잔이나 반 고흐들의 삶이 그러했다. 그들이 남겨 놓은 것은, 평평하고 밋밋한 종이조각 같은 2차원의 공간 위에 그리거나 칠한 캔버스들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들이 말하는 ‘그림(회화)’이며, 문제는 이러한 것이 우리들의 문화의 실체라고 한다면, 그 근원(뿌리)은 대체 무어라는 것일까…….
3)정수진의 근작에 대해서 뉴욕태생의 평론가 J. 도날드는 “그는 ‘넌센스’에 관해서 바른 ‘눈’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넌센스’를 우리들의 말로 의역하면 “말이 안 된다”는 뜻이고, 따라서 ‘무의미’하다는 뜻이다 “바보 같다.”던가 “터무니없다.”는 말의 뜻으로 대신하기도 한다. 말 그대로 직역하면 ‘센스’가 없다는 뜻인데, 실증적(實證的)으로 증명되고, 감각적으로 지시할 수 있는 현장(現場)이 없는 뜻이라는 것이다. 비유로 빗대면, 장님이 ‘미술’이라는 ‘것’을 더듬는 현상 같은 비유라고 하겠다. 한마디로 굳히면, 언어(言語)의 허구(虛構)를 말하고 있다. 우리들은 ‘하늘’이라던가 ‘바다’ 또는 ‘인간’이라는 ‘말’을 가지고 어떤 ‘뜻’을 의식한다. 그 ‘뜻’을 머리라는 뇌수(腦髓)속에 저장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들이 세상을 의식하고 인간을 이해하는 관례적인 인식의 방법이라고 하겠다. 하지만 ‘하늘’이라고 말할 때 그 광대 무비한 물리적인 우주공간이, 어떻게 우리들의 그 자그마하고 어두운 뇌수 속에 들어 있는지에 대해서 생각하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고 하겠다. 과학자들은 이러한 우리들의 뇌수의 기능에 관해서, 생리학의 입장에서 감각(感覺)은 ‘기호(旗號)’ 라고 말한다. 기호는 그 자체가 어떤 뜻이 아니라, 그러한 ‘뜻’을 대신하고 유발(誘發)은 촉매(觸媒)역할로서의 ‘기호’라는 뜻이다. 그래서 정수진은 자신의 ‘그림’이 그려지는 캔버스를 구조주의(構造主義)의 입장에서 구성한다고 말한다. 캔버스는 하나의 2차원의 공간이다. 한편 ‘구조’는 전체(全體)와 단위(單位) 그리고 변환(變換)으로 구성된다. 이것을 우리들이 늘 눈으로 보는 ‘바다’라는 물리적인 공간으로 비유하면, 이러하게 설명할 수 있겠다. ‘바다’라는 전체상은, 해맑은 빗살아래 저 멀리 잔잔하게 가라앉아 있으며, 이것을 의식하는 우리들의 마음을 푸름의 숭고함의 감정으로 종합해준다고 하겠다. 이러한 전체상을 구성하는 ‘단위’는 물이다. 수치로 계산할 수 없는 물(물방울)들이 모여서 구성되는 공간이 ‘바다’라는 전체상이다. 이러한 전체를 구성하는 물방울 하나하나는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 그것은 전체를 구성하는 원소(元素)이며, 과학에서 말하는 H2O이다. 잔잔한 바다이건, 노도질풍으로 휘몰아치는 바다이건 간에, 이 단위는 변하지 않는다. 물방울은 늘 바다라는 ‘전체상’의 구조(構造)에 소속된 단위이며, 구조의 법칙을 보존하는 요소로서의 단위이기 때문이다. 늘 스스로를 다스리는 제어(制御)의 단위로서 존재한다고 하겠다.
여기서 정수진의 ‘그림’으로 되돌아와 보자. 그의 전체상을 구성하는 여러 가지 단위들, 인간들, 여러 가지 사물들이 가득하게 채워져 있다. 인간의 ‘그림’으로 제한해서 말하면, 그 하나하나는 그 하나하나 대로의 용모를 가지고 있지만 서로 서로의 연관은 무관하게 그려져 있으면서, 하나의 ‘전체’를 구성하는 ‘단위’로서만 그려져 있다고 하겠다. 조금 어렵게 말하면, 공시적 균형(公示的 均衡)인 것이다. 정수진도 다른 화가들과 다름없이 미술의 흐름에 관해서 생각해왔다고 한다. 그의 의식 속 흐름에 관해서 수 없는 자성(自省)을 거듭했다고 한다. 그리고 누구나 그렇듯이, 미술은 어떻게 샘솟았는가에 대한 기원(起源)의 물음에 한때 함몰 당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미술의 흐름은 어떻게 샘솟았으며 오늘처럼 도도한 흐름을 구성하게 되었는가의 문제의식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하나의 샘에서 솟아오른 샘 줄기가 궁극에 바다라는 전체상을 구성하는 게 아니듯이, 그의 관심은 어떤 단면(斷面)에서 멈추게 되었다는 것이다. 샘물은 하나의 샘에서만 솟아오르는 게 아니라. 도처에서 서로 다투듯이 샘솟는 것이기 때문이다. ‘구조’에 대한 그의 관심은, 곧 그의 의식의 흐름은, 그 기원에서가 아니라, 그 흐름의 변환(trans-forme), 곧 관념의 절단면(切斷面)에서 판단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지금 우리들이 ‘눈’으로 보고 있는 그의 캔버스이며, 이 2차원의 단층(斷層)이 앞으로의 우리 미술사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되는, 우리들의 관심인 ‘보이는 것’이라 하겠다.
1969년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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