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대조
염원 3 Transparency,입체렌즈,light box,change color, 110x110Cm, 2010
박대조
염원 6 Transparency,변환렌즈,light box,change color, 110x85Cm, 2010
박대조
염원 8 Transparency,변환렌즈,light box,change color, 68.3x110Cm, 2010
박대조
염원 13 Transparency,변환렌즈,light box,change color, 105x70Cm, 2010
박대조
염원 16 Transparency,입체렌즈,light box,change color, 110x76Cm, 2010
상처의 미학 '목도(目睹)'라는 말이 있다. '일이 벌어진 광경을 직접 본 것'이란 의미다. 이말은 '당시', '현장'에 있었음을 강조, 혹은 증명하는 말이기도 하다. 박대조의 작업은, 특정 이슈와 사건이 발생한 곳에서, 그것을 함께 경험하고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키는, 살아 있는 현장감이 특징이다. 생생한 현장감과 함께 인물의 표정을 타고 흐르는 화면 가득한 긴장감이 가히 압권이다. 트레이드 마크가 되어버린, 그렁그렁한 아이들의 눈망울에 투영된 세상만사는 동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관객들의 공감대를 이끌어내기에 충분하다. 박대조가 만난 아이들은 그가 직접 몸으로 만난 아이들이다. 만나서 이야기 나누고 함께 공유한 기억과 추억들을 지난 3년 동안 제작된 개별 작품 속에 오롯이 담아냈다. 아이들 저마다의 소중한 바람과 개인적 사정을 공감각적으로 반추하며 동시에 반영해 왔다. 박대조는 지금도 요지경 속 같은 세상사를, 비록 간접적이기는 하지만, 때묻지 않은 아이들의 살아 있는 눈을 통해 생생하게 증거한다. 몸으로 확인해온 세상에 대한 지적 고민과 사진과 조각, 회화기법 그리고 석재를 다루는 특출한 내공이 함께 어우러진 박대조의 독특한 연금술은 보는 이를 더욱 강한 힘으로 빨아들이는 매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박대조를 일약 주목받는 현대작가 반열에 올린 이들 '불안한 시선'은 2008년도에 들어서면서 본격적으로 제작, 소개되기 시작했다. 이전에도 석재를 사용한 작업을 진행하기는 했지만, 이렇듯 인물이 등장하는 본격적인 석판 작업을 시작한 것은 불과 3년전이었다. 그동안 박대조는, 한국화가로서 다양한 수묵, 채색과 산수, 풍경 작업을 이어 왔다. 이른바 지필묵 중심의 작업이었다. 다른 장르도 그러하지만, 지지체와 안료, 즉 사용하는 재료가 바뀌면 작업에 일정한 변화가 생기는 법이다. 평소 자연물, 특히 자연석에 관심이 많았던 박대조는 우연한 기회에 석판 위에 산수와 풍경을 그려 넣거나 새겨 넣는 작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풍경 속에서 돌을 끄집어내어 산수를 담아내기 시작한 것이다. 직접 만나고 접한 이런저런 석재들은 겉으로 보이는 표정과 기존 선입견과는 달리 너무나도 고운 속살과 결을 가지고 있었다. 먹으로는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자연이 내재되어 있었다. 그동안 너무나도 간절하게 그리고자했던, 담아내고자 했던 기운이 이미 거기에 있었다. 더군다나 수백종이 넘는 다양한 석재는 박대조를 잡아매기에 충분했다.
다양한 소재와 재료의 발견, 도입에 목말라 있던 박대조 입장에서 석재는 매력적인 재료이자 새로운 지지체였다. 석재의 고유한 결과 한지의 결 사이의 유사함을 알게 되었고 또다른 몇 가지의 공통점들이 있다는 것을 작업을 진행하면서 이해하게 되었다. 오랜 시간 동안 한지의 결에 익숙했던 박대조에게 석재는 그다지 낯설게 다가오지 않았다. 먹을 빨아들이며 자기 호흡을 숨기지 않는 한지의 솔직함과 돌의 재료적 특성이 닮아 있었다. 발묵이나 파묵, 갈필 효과, 농담 변화 등과 같은 붓과 먹의 운용이 석판 위에서도 가능함을 경험적으로 간파해 나갔다. 이러한 경험은 박대조가 작가로서 좌표를 재설정하는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했다. 새로운 재료와 기법에 대한 이해와 체득을 통해 박대조의 창작 의욕은 배가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박대조는 몸에 익은 한국화의 감수성을 완전히 내려놓지 않았다. 사실, 그의 작업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곳곳에서 그러한 내밀한 감성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아크릴로 만든 라이트 박스 위에 마치 젖은 한지를 붙여 놓은 것 같은 느낌의―돌로 벽체를 축조할 때 석재와 석재 사이에 개입하는 줄눈, 혹은 창호지 문살과도 같은 경계를 연상시키는―작업에서 읽을 수 있는 여백, 간극들이 그것이다. 혹은 창호지를 통해 스미듯 들어오는 은은한 바깥 풍경과 어스레한 기운이 한지 이상으로 배어나는 얇은 석판의 표정들도 그러하다. 화면은 비록 조각조각 나뉘어 있지만, 나누어진 것이 아닌 전체적으로 하나의 커다란 메시지를 전달하고 강조하는 통합의 기운을 내포한다. 이는 평소 박대조가 작업을 통해 강조하는 평화, 사랑, 희망의 메시지와 일맥상통한다.
통합과 화합을 지향하고 강조하는 독특한 박대조식 심리풍경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렇듯 석판의 사용과 석판 표면을 다스리는 전혀 새로운 기술을 도입, 개발하면서 박대조의 작업 방향은 뚜렷하게 전향되었다. 산수와 풍경을 벗어나, 여행을 통해 만나고 채집한 이런저런 경험과 상념들을 석판에 올려놓기 시작했다. 자연으로부터 떠낸 듯한 석판면의 결은 복잡다단한 세상사의 얽히고설킨 관계를 풀어내듯, 잎맥처럼, 초월자가 빚어낸 자연 질서를 유지하며 화면 깊은 곳에서 유려하게 흐르기 시작했다. 주지하다시피, 박대조의 작업은 미세한 돌가루로 동종(同種)의 돌을 쪼아내는(pecking) 작업이다. 돌로서 돌에 상처를 내는, 흠집을 내는 과정이다. 인간에 의해서 인간이 상처를 받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차이점이 있다면 아름다운 상처라는 것이다. 또한 한번 어긋나면 돌이킬 수 없는, 수정이 불가능한 섬세한 작업이라는 점이다. 온갖 신경을 곤두세우는 숨죽이는 과정일 수밖에 없다. 박대조의 예민한 촉수가 석판 표면을 더듬으며 결을 침투해 들어가기 시작한다. 습관처럼 손에 들고 있었던 붓을 과감히 버리고 바늘과도 같은 에어건(air gun)을 양손으로 다루면서 석표면과 마주한다. 광속보다도 빠른 속도를 자랑하는 에어건을 통과한 돌가루들은 가공할 공기압으로 석표면을 쪼아낸다. 석판 표면에 상처를 낸다. 박대조의 과감하고 거침없는 결행과 경험을 바탕으로 한 노하우, 섬세한 감성과 석재의 물성에 대한 오랜 경륜이 송두리째 녹아들고 집약되는 과정이다. 거문고를 뜯으면, 거문고가 울면서 거문고를 타는 이와 듣는 이의 심금을 울리듯, 박대조의 석판들도 박대조의 열정을 받아 뜨겁게 온몸으로 화답한다. 이와 같은 과정은, 이를 테면, 석판 표면에 돌로 드로잉을 하는, 밑그림과도 같은 과정이다. 다음 공정은 먹과 아크릴로 표면을 어루먼지는, 석판에 안료를 입히는 과정으로, 전쟁터와도 같은 이들 석표면의 거친 호흡을 고르고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이다. 박대조 특유의 인간적인 호흡이 섬세하게 개입되는 과정이다. 초기에는 주로 먹을 사용했지만, 차츰 아크릴 물감을 더해나가기 시작했다. 먹이 주된 물감으로 운용되면서, 화면은 잿빛 단색조로 주조되었다. 가끔 아크릴 물감을 사용하기도 했는데, 5-6 종류의 색을 통해 무채에서 유채로의 표정 변화를 시도하기도 했다. 자신감을 얻은 박대조는 적게는 5가지, 많게는 16가지의 색을 풀가동하며 화려한 변주를 선사하는 화면 연출을 이어갔다. 마치 육안으로 볼 수 있는 무지개색을 더 늘려 놓은 듯한, 혹은 세상에서 경험할 수 없는 신비와 내세의 표정, 우주의 삼라만상 등 모든 외계를 압축한 듯한 다양한 색조를 선사했다. 석판 배면에 특수 조명장치와 색상변환 어댑터를 장착하면서 그의 작업은 비로소 완성되었다.
2009년에 들어 화면에 컬러가 본격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했다. 전면에 걸쳐 등장했다기보다는 부분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특정 이슈를 강조하듯 부분적으로 색채를 개입시켰다. 「A wild flower」 연작은 화강석의 표면에 음각으로 이미지를 착상시킨 작업이다. 마치 포유류의 수정란이 자궁 속에 정착해 모체의 영양을 흡수할 수 있는 상태가 되듯, 이 과정이 박대조의 작업 공정 중 가장 예민하고 조심스러운 과정이다. 앞서 지적했지만, 작가 자신의 착상(着想)이 착상(着床)되는 은밀하고 직접적인, 섬세한 과정이다. 석재에 대한 박대조의 오랜 내공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작품의 성패를 좌우하는 중요한 과정이기도 하다. 이 과정에서 판재에 균열이 발생할 수도 있으며 오차 범위를 벗어난 공타(空打)는 자칫 전체적인 분위기를 거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시기 들어 주목할 만한 변화 중 하나는, 이른바 귀하디 귀하다는 황옥(黃玉)을 사용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broken heart」등의 작업이 그것이다. 이전 작업에서는 볼 수 없었던 대형화면의 등장이 가능했다. 황옥의 섬세하고 고운, 신비로운 결과 인물이 만난 작업이다. 공정은 전과 동일하다. 아크릴 물감 위주의 화면은 전보다 화려하고 대담해졌으며 보다 자극적이 되었지만, 박대조는 여전히 부분적으로 먹을 사용하고 있었다.「A wild flower」연작은 6개의 동일한 황옥판을 결합시킨 이른바 멀티작업이다. 소녀의 눈동자를 제외하고는 색감이나, 표정, 돌의 결, 명도, 채도 등이 미묘한 변화를 선사한다. 다양한 크기와 비례의 작은 황옥판들을 이어 붙인 작업이어서 주목할 만하다. 이밖에 9개의 동일한 황옥판 위에 음각 작업을 한 후 아크릴 채색을 한「Hope」작업, 수십개의 작은 황옥판들을 결합한 화면이 인상적인「기아」연작 등이 그것이다. 대형작업도 가능함을 직접적으로 암시하는 작업들이다.
2008년, 박대조의 초기 인물 작업은 시사적이고 서사적인 이슈들을 주로 담아낸 묵직한 작업들이었다. 작가로서 박대조라는 오늘의 존재를 있게 만든「Boom Boom」시리즈, 공장굴뚝의 오염물질 배출을 지적한「Smoke pollution」,「Rainbow」연작,「염원」등과 같은 작업이 그것이다. 당시 국내외 핫이슈였던 태안 기름 누출 사건, 핵무기 확산 공포 등을 직설적으로 담아냈다. 세간에 잘 알려진, 겁에 질린 깡마른 소녀의 얼굴 등이 제작된 시기로 대리석을 중심으로 제작된 작업들이 대부분이다. 전통 한국화에서는 금기시 되어온 다양한 지지체를 필연적으로 만나고 선택한 시기로, 점묘 음각기법을 주로 구사한 시기다. 대리석 등의 지지체가 순지, 혹은 장지라면, 돌의 표면에 상처를 내는 에어건은 세필과도 같은 것이다. 그것을 중봉, 혹은 측봉과도 같이 운용하며 아주 예민한 감성과 표현을 구현해냈다. 박대조에게 있어 돌은 각기 다른 색감과 결을 간직하고 있는 천연의 캔버스인 셈이다. 그것은 마치 한국화에서의 장지, 순지 등이 지닌 차이와 같이 각기 다른 두께와 밀도, 색감, 투명도, 질감 등을 가졌다. 박대조는 재료가 허용하는 범위의 극한까지 몰입해 나갔다. 고가의 석재가 한치의 오차로 인해 순식간에 산산조각나는 경험도 셀 수 없을 정도였다.
박대조의 작업은 사진을 인화하듯, 석판 위에 실사한 것이 아니다. 석판 위에 그림을 그리고 종이로 찍어낸 것도 아니다. 사진술을 참조하되 조각, 회화술의 적극적인 개입을 통해 완성시켜 나가는,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지난한 노력 과정이다. 인물의 표정을 몰골기법으로 처리하거나 명암과 중간톤을 줄이거나 늘려나가는 등 몸에 밴 기법들도 여전히 적극 개입시켜 나갔다. 박대조가 최근 들어 선보이는 신작들은 하나의 동일 판재에 단일 이미지들을 과감하게 크게 담아내고 있다. 전시기에 비해 상대적으로 서정성과 정적인 이미지를 비중 있게 강조하고 있다. 때론 김연아 선수도 눈망울 속에 등장한다. 희망이 살아나고 있음이다. 손가락이라든가 이목구비 중 특정 부분이 이중, 혹은 다중노출로 중첩되거나 아이들을 만난 지역의 풍경이 오버랩되는 작업도 자주 등장한다. 단순 인물 중심에서, 서로 나눈 대화 내용과 촬영 당시의 시공을 공감각적으로, 보다 입체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앵글을 잡을 때에도 심원, 고원, 평원 등 전통 삼원법을 적용하고 있다. 이렇듯 동일 인물을 다양한 시점에서 담아내거나 동일 인물의 다양한 표정, 혹은 각기 다른 메시지를 동일 인물에 개입시키고 있는 점이 이채롭다. 주로 아이들에 눈에 투영되는 이미지도 기존 이미지에 촛불이라든가, 연꽃 등이 새롭게 더해지면서 종교적인 염원과 바람, 치유의 감정을 복합적으로 담아내고 있다. 2008년, 지금 다시 보아도 섬뜩한, 피눈물 흘리는 인형,「Stubbornness」작업에 이어 최근에는「human happiness」등과 같은 미소녀풍의 가공할 사이보그, 아바타 형식도 등장하고 있다. 그녀들의 눈 속에는 엄마의 등에 업혀 환하게 웃고 있는 모녀의 모습들이 등장한다. 사람이 되고픈 그들의 간절한 바람일 것이다. 외모라든가 표정, 입고 있는 옷들은 사람보다 더 사람 같지만, 결코 사람이 될 수 없는 한계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한계상황을 그렸다. 과도한 현대인의 욕망 구조를 건드리고 있다. 가장 인상적인 작업은 고향의 친구, 아버지, 가족을 그리워하는 소년의 그렁그렁한 눈망울에 손에 잡힐 듯 가까이 있지만, 다가갈 수 없는 고향의 풍경이 중첩되어 있는 작업이다. 결과적으로 사진술을 중심으로한 지난 시기의 작업이 회화적인 맛이 물씬 풍기는 작업으로 이행하고 있음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 시기의 작업과는 또다른 표정과 감흥을 선사하는 일종의 변환점으로, 박대조의 또다른 내밀한 감성변화가 읽혀지는 대목이다. 박대조는, 안타깝게도, 아직까지는 투명하지만, 이제 곧 세상사에 무차별적으로 노출될 수 밖에 없을 아이들의 눈을 통해, 혹은 오지의 때묻지 않은 아이들의 눈을 통해 인간의 희노애락을 담아내고 있다. 이들은, 역설적으로, 우리네 퇴색한, 흐려진 눈과 마음을 정화시켜 준다. 이른바 일종의 안구정화, 마음정화, 정신정화다. 박대조는 그들과 우리들의 바람을, 두려움을, 소망을, 간절함을, 분노를 그렁그렁한, 이글거리는 그들의 눈망울을 통해 이입한다. 전시기에 비해 선묘기법을 자주 구사하는 등, 직접적인 표면질감과 시각적 가촉성을 극대화하고 있다.
더욱 다양한 석재의 선택과 실험, 도입과 함께 달인과도 같이 무르익은 특유의 손놀림으로 에어건을 움직이며 박대조는 작품의 완성도와 밀도, 회화적 메시지를 극대화하고 있다.「Broken Heart」의 경우, 지지체로서의 판재를 고의로 깨뜨린 특이한 작업이다. 그것은 잔인하기도 하고 인공스런 균열로 읽혀지기도 하는데, 중요한 점은 기존 작업에 등장했던 이미지를 다시 불러내 새로운 시도로 풀어 보인다는 점이다. 이른바 회화적 변주가 시작된 것이다. 일부 작품은 좌우 눈동자 속에 투영된 동일한 이미지가 서로 전도되어 있기도 하다. 만화경 같은 대칭구조다. 어느 것이 원본인지 알 수 없는 세상을 닮았다. 또는 세상에는 상반된 가치와 입장이 공존하고 있음을, 혹은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음을 지적한 것으로 이해된다. 또하나 눈에 띠는 점은 판재면에 유기적인 곡선이 자주 등장하면서 화면이 전체적으로 풀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자유로운 감성이 한층 두드러지고 있는 것이다. 역시 회화적인 감성을 조금씩 더 드러내려 하고 있음이다. 한편 전 시기의 작업들이 인물의 전체적인 표정보다는 눈에 담아낸 그것에 더욱 주목하게 하였다면, 금번 신작들은 인물들과 함께 주위의 표정을 꼼꼼하게 살피게 한다. 현지의 내음이 화면 가득 강하게 풍기고 있다. 아이들은 과감히 입을 드러내되 굳게 다물고 있다. 시선을 살짝 피한 모습으로 강한 눈빛과 인상을 던져 주었던 아이들은, 정면을 과감히 응시하거나 얼굴 전체로 화면을 가득 채운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박대조는 여행에서 만난, 세상에서 만난 아이들의 표정과 이야기에 귀 기울인다. 그들과 눈을 통해 만난다. 눈을 통해 들여다본다. 눈을 통해 받아들인다. 눈을 통해 기억한다. 눈을 통해 다시 세상에 드러낸다. 세상의 모든 눈과의 만남이다. 박대조의 작업에는 여러 가지 눈이 동시에 개입하고 존재한다. 작가의 눈, 카메라의 눈, 박대조를 기억하는 아이들의 눈, 개인적인 트라우마나 바람을 호소하는 아이들의 눈, 그것을 보는 관객의 눈 등이다. 흔히 여행길에서는 인물보다 주위 풍경에 주목하거나 시선을 두기 마련이다. 사람은 그 다음이다. 박대조는 사람에 우선 관심을 둔다. 소년과 소녀의 때묻지 않은 동심을 만나면서 커다란 성인이 된 현재의 자신을 비춰본다. 그 무엇으로도 다시 되돌릴 수 없는, 돌아갈 수 없는, 눈만 감아도 주마등처럼 지나가는, 생각만으로도 눈물이 주르륵 흐를 것 같은 어린 시절이 나온다. 박대조는 렌즈를 통해 그들을 물리적으로 견고하게 저장장치에 담아 놓았지만, 마음의 눈을 통해 망막에, 기억에, 가슴에 새긴 그 무엇들이 그리워 오늘도 여행을 준비한다. 사람과 자연에 대한 사랑과 애착이 그만큼 강함이다. 무엇이 박대조로 하여금 문명의 혜택으로부터 소외, 격리되어 있는 변방의 아이들에 집착하게 하는 걸까. 꾸밈이 없고 솔직하기 때문일 것이다. 한지의 성결과도 유사하다. 때묻지 않고 열려 있기에 그것이 충격이든 상처든 기꺼이, 깊숙이 받아들이지 않던가? 모두를 감당하면서 자신의 성결을 더해서 표정으로 화답하지 않던가?
그의 석판들도 자신의 살이 파이고 떨어져 나가는 고통을 감래하면서, 자신의 예민함을 삭이면서 표정으로 가감 없이 화답한다. 박대조의 작업은 재료에 대한 이해, 기법에 대한 이해, 우주에 대한 이해, 인간에 대한 이해 등이 개입되는 총체적인 작업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박대조의 인간에 대한 이해일 것이다. 기술이 뛰어나 이름난 장인을 명장(名匠), 혹은 명공(名工)이라 한다면, 온몸으로 지적 성찰을 실천하는 박대조는 학문과 기술이 균형을 이루는 뛰어난 장인, 즉 명장(明匠)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하나 중요한 것은 '만남'과 '사랑'이다. 오늘도 박대조는 이들을 만나러 떠날 준비를 서두른다. 작가의 그러한 성결과 심결은 소년, 소녀들의 선한 눈을 통해 우리에게 또다른 모습으로 다가올 것이다. 인터넷과 온라인 개념이 등장하지 않았던 지난 시절, 내셔널지오그래픽 지면을 통해서나 간헐적으로 접할 수 있었던 가공하지 않은 천연 이미지들을, 자연의 '생얼'을 우리의 마음속에 또렷하게 새겨 넣어 줄 것이다. 석재에 대한 관심과 그것을 부여잡고 씨름해온 시간과 내공이 상당하다. 어쩌면 작업을 떠나 박대조에게 있어 돌과의 인연은 때려고 해도 땔 수 없는 운명과도 같은 것이다. 단순 석판재가 아니다. 요즘 표현을 빌리면, 하이테크놀로지로서의 초박막 석판인 셈이다. 그의 관심과 사랑은 결과 결 사이를 점진적으로 파고들고 스며든다. 고압의 공기압과 돌 파편과 부딪히고 본능적으로 튕겨 나가는 이런저런 돌조각들을 몸으로 버티어 막아내며 과정과 표정을 목도한다. 온갖 고생을 마다않고 찾아가 만난 아이들과 당시의 감정과 시공을 더듬고 반추한다. 마음으로 분사 압력과 깊이 등을 조율한다. 마치 손놀림과 붓놀림으로 이미지를 얹어나가듯 움직인다. 그러나 생각처럼, 설명처럼 과정은 간단치 않다. 요즘 대유행하는 포토샵처럼 본다면 무리다. 석판에 단순하게 이미지로 얹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음각으로 새긴 것이다. 지울 수 없이 깊숙하게 침투해 있다. 각인되어 있다. 그들의 아픔과 상처를 눈과 귀로 보고 듣고, 속 깊이 보듬어 안은 박대조가 가슴으로 받아들인, 마음속 깊이 각인된 그 모든 것들에 다름 아니다. 상처가 나는 곳이 비단 석판의 표면뿐이랴. 작가의 손등과 공정에 개입하는 신체에 수많은 상처를 남긴다. 자잘한 상처들이 생겨나고 아물기를 반복한다. 위험하기도 하고 힘든 과정을 마다 않는 이유는 인간에 대한, 자연에 대한, 세상에 대한 그의 지적 관심 때문일 것이다. 그들이 박대조를 부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주유천하(周遊天下) 개념의 나른한 일반 여행이 아닌, 지적 방랑에 가까운 탐사과정이다. 몸으로 밀고 나가는 고육의 과정이다. 박대조는 몸을 들어 세상과 아이들과 자신과 뜨겁게 조우한다. 작업의 모든 과정은 그 모두를 추억하고 떠올리며, 세상의 온갖 세속적인 유혹으로부터 자신을, 자신의 일을, 사명을 걷잡는 과정이다. 이러한 지난하고 예민한, 디테일한 공정과 수많은 상처를 마다 않는 노동과 공정, 수고가 개입되는 것이 박대조의 작업이다. 작품 속 주인공의 시선만큼이나 복잡하다. 간단하고 명료할 수 없다. 애틋함과 간절함, 말하고 싶은, 전하고 싶은 그러나 말 못하는 심정과 희구, 간구, 간절함, 바람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순진무구하면서도 큼직한, 커다란 대부분의 눈망울은 그런 바람을 더욱 간절하게 담아내려는 박대조의 내밀한 감성과 어우러져 보는 이의 심금을 울리는 것이다. 감추고 싶은 인간의 원초적 감정, 내면이 살아 꿈틀거리며 가장 잘 드러나는 곳이 아마도 '눈'일 것이다. 외부의 자극을 받아들이는 감각기관이 인간의 신체에는 여럿 있지만, 외부로부터의 위험상황이나 긴박한 상황변화를 가장 먼저 감지하여 인지하게 하는 감각기관이 눈이다. 박대조의 작업은 박대조의 눈과 아이의 눈, 박대조의 눈과 카메라의 눈, 아이의 눈과 카메라의 눈, 작품 속 아이의 눈과 관객의 눈 등 세상의 모든 눈과 눈의 만남이요, 밝고 깨끗한 마음과 마음의 발가벗은 만남이다. 따라서 박대조의 작업은 한마디로 '만남'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여행에서 그저 우연하게 만나고 획득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진정한 바람이 마음과 함께 다가가서 그들의 간절한 바람과 진정으로 하나가 되는 경험 그 자체인 것이다. 눈은 마음의 창이라 했다. 눈에는 감정의 희노애락이 가감 없이 드러난다. 중요한 것은 눈의 마주침, 눈맞춤일 것이다. 대상을 담아내는 렌즈도 따지고 보면 카메라의 눈이다. 최초로 자신의 육안을 통해 눈맞춤한 아이들의 눈을 박대조는 카메라의 눈을 빌어 담아낸다. 박대조의 작업에는 아이들의 눈과 표정, 그들과 눈맞춤한 실로 수많은 감정과 이야기들이 등장하고 있다. 관객의 뇌리에 끝까지 남는 것은 아마도 그렁그렁한 눈망울일 것이다. 우리가 애써 부정하거나 잊고 살아온, 잃고 살아가는 세상사의 다양한 명암을 담고 있어서 일까. 그것은 애틋하다. 박대조의 작업이 보는 이의 마음에 울림과 떨림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그가 스스로 몸을 세워 가슴으로 다가가 마음으로 담아낸 사람 내음 나는 작업이기 때문일 것이다.
- 박천남
1970년 경상남도 사천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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