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The Wall)
2011.02.09 ▶ 2011.02.15
2011.02.09 ▶ 2011.02.15
이만나
벽 앞 캔버스에 유채, 170x227 cm, 2009, 개인소장
이만나
벽 캔버스에 유채, 145x112 cm, 2011, 개인소장
이만나
정원 캔버스에 유채, 60x50 cm, 2009, 개인소장
이만나
정원 컨버스에 유채, 60x50 cm, 2009, 개인소장
백사장을 한바탕 헤집고 다니던 두 소년은 어느덧 나란히 서서 먼 수평선을 응시하고 있다.
맑은 날엔 대마도가 보인다는 얼핏 들은 얘기를 상기하며 나는 저 멀리 가물거리는 수평선을 유심히 살핀다.
혹시나 보인다면 어떤 모습일까? 영화에서 흔히 보던 섬 모양일까? 어쩌면 흐릿하게 수평선에 납작 붙어있어서 잘 안 보이는 건지도 몰라. 어느 날 장막이 걷히듯 저 너머가 선명해지면서 도시의 모습이 생생하게 펼쳐지면 어떨까…… . 이런 상념에 빠져있는데, 옆에 그 아이가 갑자기 소리쳤다.
“우와! 저기 봐라! 니도 저거 보이나? 저기 용이 꿈틀 꿈틀하면서 날아가는 거 보이재?”
친구가 이번엔 수평선과 하늘의 경계를 이글거리며 피어 오르는 아지랑이에서 용을 발견했나 보다.
같이 감탄하며 새삼 친구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지만, 늦은 봄날의 아지랑이로 마음이 아득해질 뿐이다. 친구의 그런 아이 같은 상상력이 내심 부러웠다. 타지출신인 나에게는 백사장에서 연속 덤블링 하는 것도, 자연과 하나가 된 듯 이끼 낀 갯바위 사이를 날렵하게 건너 다니는 것도, 아직은 찬 바닷속으로 거침없이 뛰어들어 헤엄치는 것도 부럽고 대단하게만 느껴졌다.
철망 울타리 사이로 삐져나와 탐스럽게 익은 딸기들을 따먹다가, 그것도 모자라 철망 사이로 손을 집어넣어 닿는 데로 따서는 한 움큼씩 손에 쥐고 걸음을 재촉한다. 약간의 죄책감 같은 것도 있었지만, 갓 따낸 딸기의 향긋한 유혹을 이기지는 못한다.
그 길가 밭고랑 저 너머에는 주변과는 어울리지 않게 네모 반듯한 5층 정도 되는 회색건물이 있다. 창문도 별로 없는 그 건물 옥상에는 무수히 많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은색 기구들이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다. 무슨 확성기 같기도 하고, 수면 위로 올라온 잠망경 같기도 한 그것들은 하나뿐인 눈으로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며 정찰임무를 수행 중이다. 그 비밀 연구소 안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비밀스러운 일들에 관해 친구와 얘기하며 걷는데, 옥상 위의 기구 중 하나가 우리와 눈이 딱 마주쳤다. 순간 움찔했지만 아닌 채 하며 발걸음을 재촉하는데, 그 눈이 우리를 계속 따라오는가 싶더니, 주변의 다른 기구들도 일제히 우리를 향해 고개를 돌리는 게 아닌가!
“엎드려!” 친구의 외마디 소리와 동시에 우린 밭두렁에 몸을 철퍼덕 내던졌고, 간신히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니 그 기구들이 당황한 듯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면서 우리를 찾고 있는 듯 했다. 그들이 포기한 듯 다시 유유히 다른 곳으로 고개를 돌리기 시작할 때까지 우린 진흙범벅이 된 채 가슴 졸이며 엎드려있어야만 했다.
고참은 이미 초소 한 켠에 앉아 졸고 있다.
이곳의 시간은 참 더디게도 간다. 특히 한 겨울의 야간경계근무는 한 시간이 1년 같다. 특별히 지킬 것도 없어 보이는 이곳에서 제일 시간이 잘 가게 하는 방법은 밖에서의 추억을 회상하거나, 휴가 나가면 일어날 즐거운 일들을 상상하는 것이다. 제대까지는 아직 까마득하고, 이제는 제대한 이후 다시 사회에 적응할 수 있을지 두렵기까지 하다.
밀려오는 졸음과 추위를 떨쳐내려 초소주변을 종종걸음으로 서성이다 불 꺼진 막사 쪽을 내려다본다. 차고 앞 공터쯤이었을 그곳에 마침 무언가 움직이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눈을 부릅떠보지만 뭔지 통 알 수 없는데,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그 시커먼 물체는 계속 같은 자리에서 꾸물꾸물 움직이고 있었다. 야간경계수칙을 떠올리며 주변으로 시야를 넓혀 훑어보지만, 그럴수록 그 움직임은 더 또렷해져 갔다. 그건 테트리스에서 매 단계마다 나와서 춤을 추는 병정의 실루엣을 꼭 닮았다. 뭔가에 홀린 듯 시선을 떼지 못하고 지켜보니, 그 놈은 총을 어깨에 매고 제자리걸음을 하다가 폴짝폴짝 부드러움 몸놀림으로 제비 넘기까지 하는 게 아닌가. 첨엔 어이가 없어 피식 웃 음이 났지만, 점점 오싹한 느낌이 들었다. 이젠 테트리스의 음악소리까지 들리는 듯 했다.
다음날 낮에 그 공터 앞에 가보니, 그 자리엔 지난 여름 벼락을 맞아 베어버린 아름드리나무의 밑동 만이 덩그러니 서있었다.
벽과 마주한다.
나름 그들과 어울리려 애써도 보고 파티도 쫓아다녀봤지만, 슬슬 지쳐간다. 독일어가 능숙해질수록 점점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많아지고, 부딪히는 일도 잦아진다. 넓게 보면 문화적 갭이고, 좁게 보면 성격차이다. 또한 무한정 학생신분으로 느긋하게 누릴 수 만은 없는 나이, 세대차이도 한 몫 했을 게다.
이제는 돌아앉아 벽과 마주한다.
자라기가 무섭게 잘려나가는 나무울타리. 인간이 원하는 틀에 맞춰져 본성이 억제된 채 살아있는 벽이 되어버린 이 인공자연 앞에서, 나는 인간의 욕망보다 더 섬뜩한 자연의 생명력을 본다. 평평하게 잘려져 나간, ‘깊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이 자연의 외피는 한편 간질간질하여 벗겨내 버리고 싶은 세계의 껍질 같기도 하며, 다른 한편으론 부질없이 무한한 층위를 가진 세계의 절단면 같기도 하다. 나는 그 이면에 감춰진 감지할 수 없는 세계의 깊이를 떠올리지만, 막상 내 앞에 펼쳐진 그 표면의 조밀하고 불가해한 기호들만을 뚫어져라 들여다볼 뿐이다. 어릴 적 내가 닮고 싶었던 친구는 카프카의 시선으로 현실을 넘나들었지만, 나는 여전히 카뮈처럼 세상 안에서 덧없이 반항한다.
여전히 세계는 낯설고 설명할 수 없는 것들로 가득 차있다. 확성기처럼 생긴 커다란 은색 외눈박이는 이제 더 이상 현실의 표면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내가 감지할 수 없는 것, 의미를 알 수 없는 것들은 모두 나에게는 하나로 연결된 거대한 비일상의 세계이다. 그것은 일상의 영역을 감싸며 때론 불쑥 일상 속으로 침입하기도 한다. 이 원인 모를 침입은 마치 밤이 스며들어 나무밑동의 주술이 풀리듯, 그저 평범한 현실에 발생한 일종의 ‘알 수 없는 오류’이다.
나는 벽을 바라보며 모종의 안도감을 느낀다.
100년도 더 된 견고하고 밋밋한 건물 외벽에 쌓이고 쌓였을 페인트칠과 묵은 때, 그 위를 휘감으며 뻗어가는 담쟁이의 선묘, 그리고 벽 앞의 나무들. 여기에는 이곳의 기후와 그들의 완고함과 그들만의 삶의 방식이 배어있다.
더 긴 호흡으로 벽과 마주하며, 나는 좀더 그들과 호흡을 맞춰가려 노력한다. 쌓고 또 쌓아 올리면서 나는 그 벽을 허물려 한다. 이 견고한 벽이 언젠가는 숨을 쉬며 그 이면의 세계를 열어 보이기라도 한다는 듯이. 이 넘어설 수 없는 벽 앞에서 나는 비로서 그들과 화해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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