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승
Untitled #04 the series The Reading Archival Pigment Print, 180x135cm, 2010
정희승
Untitled #05 from the series The Reading Archival Pigment Print, 180x135cm, 2010
정희승
Untitled #06 the series The Reading Archival Pigment Print, 180x135cm, 2010
정희승
Untitled Reflector Archival Pigment Print, 156x208cm, 2010
사진은 '순간(刹那, moment)'을 포착한다. 그런 의미에서 사진은 어빙 펜의 첫 번째 사진집 이름처럼 '보존된 순간 Moments Preserved'이다. 그런데 '보존된 순간'이라 할 때 '순간'은 대체 무엇인가? 발터 벤야민의 서술대로라면 초창기 사진에서는 모든 것이 지속성을 갖고 있었다. 당시 사진판은 감광작용이 약했던 탓에 옥외에서 오랫동안 햇빛에 노출시켜야 했고 그 때문에 초창기 사진에는 광선의 집산, 명암연속성이 유지됐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초창기 사진에서 포착된 순간은 '지속성을 간직한' 순간이다. 초기 사진에는 벤야민식으로 말하면 순간성과 반복성, 일회성과 지속성이 서로 긴밀하게 얽혀 있었다. 하지만 이후 기술적 진보와 더불어 노출시간은 점차 짧아졌고 머지않아 반복성, 지속성을 배제한 순간, 즉 말 그대로의 즉물적 순간을 포착한/보존한 사진이 대세가 됐다.
스틸 사진(still picture)은 이렇게 즉물적 순간을 포착한 사진에 적합한 이름이다. 즉물적 순간을 담은 사진에서 '순간'은 '짧은 순간'이라기보다는 '정지된(still) 순간'일 것이기 때문이다. 정지된 순간을 포착한 사진에서 사진가가 포착한 텅 빈 풍경은 여백의 美를 운운할 수 있는 정취를 간직한 풍경이 아니라 공허한 풍경이다. 으젠느 앗제의 텅빈 풍경에 관한 벤야민의 언급을 인용하면 그것은 '쓸쓸한' 것이 아니라 '아무런 정취도 없는 것'이다.
이렇게 '아무런 정취도 없는 것'에 몰두하는 사진작가들은 마치 외과의사처럼 냉담하게 거리를 두고 자신의 대상을 마주 대할 것이다. 그에게 가령 누군가의 얼굴은 어떤 표정과 기분을 간직한 얼굴이라기보다는 그저 얼굴-즉물적 얼굴이다. 가령 토마스 루프의 「초상」 작업에 등장하는 얼굴이 그렇다. 또 그에게 도시 풍경은 도시인들의 삶의 애환과 욕망을 아우르는 풍경이 아니라 그저 풍경이다. 그 즉물적 풍경은 토마스 스트루트의 도시 풍경이다. 이렇게 우리 시대 사진가들은 냉담하고 건조하게, 인간적 개입을 배제하고 그저 순간, 단지 풍경, 얼굴 그 자체를 포착한다. 이것이 우리 시대 사진(예술)의 대세다. 누구 말처럼 이것을 중성 미학, 무표정 미학(deadpan esthetics)이라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정희승의 사진 작업도 우리 시대 사진(예술)의 전체 흐름 속에 있다. 이 작가의 사진 작업 역시 루프와 스트루트처럼 냉담하고 건조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냉담하고 건조하지만 정희승의 사진 작업은 루프, 스트루트와 다소간 다르다. 여기에는 루프와 스투르트와는 다르게 어떤 표정이 있기 때문이다.
중성 미학, 또는 무표정 미학 계열에 있는 작가에게 중요한 것은 그가 사진에서 다루는 대상이다. 루프에게 그 대상은 '얼굴'이었고 스트루트에게 그것은 '거리(street)'였다. 즉물적으로 포착한 루프의 얼굴 사진은 그 자체로 얼굴의 유형학이 되고 냉담하게 포착한 스투루트의 거리 사진들은 그 자체로 도시의 유형학이 될 것이다. 그러면 정희승 사진 작업의 대상은 무엇인가? 그것은 '정취'다. 정취란 무엇인가? 그것을 우리는 일단 어떤 감정/표정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정희승은 비극적 정취, 슬픈 감정/표정을 -즉물적으로-사진에 담는다. 냉담하고 건조하게, 그리고 작가의 개입을 최대한 배제하고 말이다. 그것은 그 감정을 촉발한 어떤 사연, 그 정취를 만들어낸 어떤 특별한 상황을 배제하고 그저 그 감정, 단지 그 정취를 잡아내는 일이다. 예컨대 우리는 「Persona」 연작에서 (등장인물의) 슬픈 표정과 만나게 된다. 그런데 우리는 그가 왜 슬퍼하는지 알 길이 없다. 작가 역시 그 슬픔을 촉발한 계기나 원인을 제시하는데 관심이 없다. 그렇게 우리가 마주하게 되는 것은 군더더기(?)가 배제된 '슬픔' 자체 혹은 '비극적 정취' 그 자체다. 그런 의미에서 「Persona」 연작은 '비극적 정취'의 유형학이라 부를 수 있다.
희극적 정취를 다룬 작업도 있다. 영상 작업 「Folly」가 그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웃음'을 연기하는 한 배우를 만난다. 무표정의 상태에 있던 배우는 카메라 플래시에 반응하다가 점차 웃기 시작한다. 물론 우리는 그가 왜 웃는지 알 길이 없다. 왜 웃는지 알 길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당혹감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당혹감은 그 웃음이 최고조에 이르러 눈물, 콧물이 뒤범벅되고 그것이 연기인지, 진짜인지 가늠할 수 없는 지경에서 최고조가 된다. 그것은 낯선 웃음, 달리 말해 '순수 웃음(pure laughter)'이라 부를 만한 어떤 것이다. 그것은 즉물적 웃음, 또는 웃음 그 자체다. 또 하나 이 작업이 흥미로운 것은 웃음 내지는 희극적 정취와 더불어 하나의 정취로서 '무표정'이 다뤄지고 있다는 점이다. 「Folly」가 시작할 때 우리는 무표정과 만난다. 그리고 「Folly」가 끝날 때도 우리는 무표정과 만난다. 전자에 비해 후자는 어떤 정취가 덧붙은 무표정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최초의 무표정과 최후의 무표정은 같지만 다르다. 이것을 무표정의 유형화라 부를 수 있을까.
그런데 이렇게 비극적 정취, 희극적 감정, 무표정의 정취를 다룬 작업이 처음부터 안고 있는 난제가 있다. 그것은 작가 자신을 포함해 정희승의 사진 작업 앞에 선 이들이 그것을 슬픔 그 자체, 웃음 그 자체로 마주 대하기 이전에 벌써 이미 사진 속 얼굴과 마주 대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얼굴은 루프의 초상 작업에 등장하는 얼굴과 다르게 표정을 간직한 얼굴이다. 즉 그들이 마주 대한 것은 사실 '순수 웃음' 그 자체라기보다는 '웃고 있는 누군가의 얼굴'이다. 그것을 '웃고 있는 누군가의 얼굴'로 보는 사람은 그 웃음의 유래를 찾아 어떻게든 그것을 '이유가 있는' 웃음으로 설명하고자 할 것이다. 이것은 '순수 웃음'이 초래한 당혹감에 대처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가장 좋은 방법은 연기하는 배우의 얼굴과 연기되는 배역의 얼굴이 교차되는 양상에 주목하는 것이다. 예컨대 누군가는 그것을 "서로 다른 페르소나가 공존하는"(신보슬) 순간으로 설명할 것이고 또 누군가는 "중간자적 존재, 또는 비결정적 주체"(강수미)를 마주 대하는 순간으로 설명할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누군가의 얼굴을 운운하는 것은 (적어도 내가 보기에) 정희승이 추구하는 바와 거리가 있다. 무엇보다 이런 종류의 설명에서 그 자체로서의 정취, 감정, 표정은 부차적인 것으로 밀려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 작가는 어떻게 반응할까? 정희승의 또 다른 연작 「Reading」을 예시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작업은 배우들이 대본을 반복해서 읽어나가면서 배역을 이해하고 창조해가는 과정을 다뤘다. 배우는 반복적인 대본 읽기 과정에서 자신이 맡은 배역을 점차 이해하고 자기화할 것이다. 그 과정은 배우의 얼굴뿐만 아니라 몸의 동작, 자세 일반에서도 관찰될 수 있다. 정희승은 그 가운데 어느 한 장면을 택해 우리 앞에 제시한다. 따라서 이 작업은 기본적으로 「Persona」, 「Folly」와 궤를 함께 한다. 하지만 「Reading」이 다른 작업과 다른 것은 배우로부터 좀 더 물러나 연기하는 배우의 몸짓을 좀 더 부각시키고 얼굴(표정)의 의의를 좀 더 약화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얼굴보다 정취를 부각시키는 하나의 대안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아직까지 언급하지 않은 중요한 이슈가 하나 있다. 나는 지금까지 정희승의 작업을 스틸 사진으로, 즉 정지 사진의 차원에서 접근했다. 이것은 정희승을 토마스 루프 내지는 토마스 스트루트와 같은 계열의 작가로 접근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이런 소위 중성 미학 작가들에게 정취, 감정, 표정은 처음부터 거부되는 어떤 것이다. 하지만 정희승에게 정취, 감정, 표정은 중대한 관심사가 아니었던 적이 없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다시 벤야민으로 돌아가는 것이 보탬이 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벤야민에게서 '쓸쓸한' 것이 아니라 '아무런 정취도 없는 것'으로의 전환(으젠느 앗제)은 기본적으로 사진의 기술적 진보가 가져온 결과다. 노출 시간을 줄인 기술적 진보가 순간성, 일회성과 얽혀있던 반복성, 지속성을 사진으로부터 몰아냈고 그것이 '아무런 정취도 없는' 앗제의 텅빈 풍경 사진을 가능케 했다. 정희승에게서 벤야민이 초기 사진에서 관찰한 바가 역으로 진행되고 있다고 보면 어떨까? 즉 정희승이 '정취, 감정, 표정'을 탐구 주제로 승인하게 되면서 사진에서 배제됐던 반복성과 지속성이 불가피하게 승인되는 상황이 발생했다고 볼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또는 처음부터 관심사는 지속성, 반복성이라는 주제였고 그 때문에 정취, 감정, 표정의 문제를 다룬 것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정희승에게서 '순간'이 점차 확대되어 '정지된 순간'으로부터 '지속적 순간'으로 이어지는 양상은 흥미롭다. 이미 이런 특성은 배우의 두 가지 표정을 연이어 이어붙이거나 여러 표정을 이어 붙여 한 권의 책으로 만든 「Persona」 연작에 나타났고 시간의 흐름을 직접 개입시킨 영상작업 「Folly」에서 좀 더 분명해졌다. 정희승의 또 다른 연작 「Ghost」를 예시할 수도 있을 것이다. 카메라 앞에 선 모델은 촬영 시간이 길어지면 카메라를 덜 의식하게 되며 자신의 내면(의 상념)속으로 빠져들 것이다. 그 빠져듦의 순간에 모델의 얼굴 표정은 극히 복잡한 양태를 보일 것이다. 그는 물리적으로 여기 있지만 심리적으로 저기에 있다. 또는 여기에도 있고 저기에도 있다. 「Ghost」는 이 여기/저기의 미묘한 심리적 공존/연속의 상태를 포착한 작업이다. 어떤 방식으로든 시간적 연속성, 지속성의 개입은 정취, 감정, 표정과 불가분하게 얽히게 마련이다. 이렇게 보면 정희승의 사진 작업 일반은 벤야민이 말했던 초기 사진으로의 회귀를 추구한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정희승 자신은 이 초기 사진의 양태를 '미성숙'의 상태로 이미 '성숙'한 상태에서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어떤 것으로 본다. 천진난만한 미성숙의 유년기는 그립지만 돌아갈 수 없는, 돌아가서도 안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이 도록에 실린 정희승 인터뷰를 참조) 그것은 이 작가가 나다르를 좋아하면서 벤야민식으로 규정된 앗제와 잔더, 그리고 그 계승자로서의 베허 부부나 루프의 유산을 버릴 수 없는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반복해서 말하건대 이 작가의 작업은 루프, 스트루트의 그것과 같지만 다르다. 그녀는 그들처럼 냉담하고 차가운 거리를 유지하지만 그들처럼 시간적 연속과 불가분의 관계인 정취, 감정, 표정을 외면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이 작가가 근래 몰두하는 스틸-라이프(靜物, Still-Life) 연작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그 명칭 자체가 상호 배반적인 단어(Sill과 Life)로 구성된 전체를 나타낸다. 이 작업에서 정희승은 얼굴(표정)을 배제함으로써 그것이 야기하는 근본적인 오해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사람의 얼굴을 배제하고 시간의 흐름 속에 놓인 정물, 오브제를 관찰한다. 여기서 일광(day light)은 중요한 요소다. 시시각각 변하는 햇빛의 조명 조건에 맞춰 계속 반응하는 일, 완전히 몰두해서 관찰하는 일은 냉담함을 유지하면서 지속성(과 불가분인 정취)를 탐구하는 하나의 방식일 수 있다. 우리 앞에는 모든 것들이 팽팽한 긴장 관계 속에서 조율된 아름다운 정물 사진이 놓여있다. 공중에 걸려있는 반사판은 빛과 어울려, 둥글린 매트릭스는 차가운 벽과 조응하며 동적이면서도 정적인 차가우면서 따뜻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정희승의 최근 작업을 스틸 사진(still picture)으로부터 스틸 라이프(still life)로의 전환으로 규정하고 싶다. 그것은 「Persona」이후의 작업 전개가 낳은 의미심장한 성과다. 물론 그 이질적인 것의 공존이 여전히 팽팽한 긴장 관계를 유지한다는 조건 하에서. 이에 대해서는 아도르노의 다음과 같은 발언을 인용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긴장을 풀고 마음을 편하게 하라는 표어가 등장하지만 이것은 간호사의 입에서나 나올 말이지 '충일 상태'에서 나올 수 있는 말은 아니다. 행복의 이념인 암수가 하나되는 것은 풀어진 상태와는 반대되는 것, 즉 축복받은 긴장이기 때문이다."
(테오도르 아도르노, 미니마 모랄리아」에서)
- 홍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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