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가정보
보티첼리가 처음에는 필리포 리피에게 그림을 배운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어 베로키오와 폴라이월로로부터 사실주의를 배웠다. 초기에는 《포르테차》 《유딧과 홀로페르네스》(1470, 우피치미술관 소장)와 《성(聖)세바스찬》(1474, 베를린국립미술관 소장) 등에서 자연연구에 대한 소박한 정열을 보이는데, 그 미묘한 곡선과 감상적인 시정(詩情)에 일찍부터 독자적인 성격이 나타나 있다. 그 후 메디치가(家)를 중심으로 한 인문주의 학자·시인들의 고전(古典) 부흥의 분위기와 신(新)플라톤주의의 정신에 접하고, 특히 안젤로 폴리치아노의 시에 고취되어 그린 《프리마베라(봄)》(1477∼1478, 우피치미술관 소장)는 시적(詩的) 정신과 자연연구의 아름다운 결정체라고 할 수 있다.
1478년 메디치가에 대한 파치 음모사건의 범죄자가 처형되는 벽화제작을 위촉받아 그린 것은 카스타뇨의 알비치 음모자 처형도의 영향을 받은 듯 하지만, 그 때의 벽화는 훼손되어 그 진부는 알 수 없다. 1480년 온니산티성당에 그린 《성(聖)아우구스티누스》의 벽화를 보면, 카스타뇨의 엄격한 리얼리즘의 영향도 살펴볼 수 있다.. 그러나 카스타뇨의 영향도 일시적인 것으로 1481년에는 산마르티노성당에 감미로운 《수태고지(受胎告知)》를 그리고, 감상적인 《마니피카토의 성모》(우피치미술관 소장)와 《책의 성모》(밀라노의 포르디 페초리미술관 소장)도 이 무렵의 작품이다.
또 1481년부터 1482년까지는 기를란다요, 페루지노 등과 함께 교황 시크스투스 4세의 부름으로, 보티첼리가 총감독이 되어 바티칸궁전 시스티나예배당의 측벽(側壁) 장식을 맡았다. 1482년 피렌체로 돌아온 그는 로마에서의 일로 자신을 얻어, 그 후 약 10년 동안은 점차 사실(寫實)을 무시하고, 독자적인 화경(畵境)을 열었기 때문에 이 시기를 보티첼리의 원숙기로 볼 수 있다. 이 무렵의 작품으로는 《성모자(聖母子)와 두 성(聖)요한》(1485, 베를린 국립미술관 소장) 《비너스와 마르스》(런던 내셔널갤러리 소장) 《토르나브오니 렌미가(家)의 별장에서 나온 벽화》(루브르미술관 소장)를 비롯하여 《비너스의 탄생》 《메라그라나의 성모》(1487) 《산바르나바의 성모》(우피치미술관 소장)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