널 위한 자리
2011.05.13 ▶ 2011.06.05
2011.05.13 ▶ 2011.06.05
모준석
1층 설치사진 2011
모준석
5월의 신부 동선, 스테인드글라스, 69x62x61cm, 2011
모준석
나무그늘 아래 동선, 스테인드글라스, 111x60x59cm, 2011
모준석
내 마음이 머물렀던 자리 동선, 스테인드글라스, 78x60x60cm, 2011
모준석
내가 네 안에 살듯이 동선,스테인드글라스, 53x124x75㎝, 2010
모준석
내가 사는 빛 동선,스테인드글라스 , 100x100x60㎝, 2008
모준석
널 기다리던 날 동선, 스테인드글라스, 18x52x125cm, 2011, 전북은행 소장
모준석
서로에게 속한 사람들 동선,스테인드글라스, 56x102x50㎝, 2010, 개인소장
모준석
에클레시아(ecclesia), 동선, 스테인드글라스, 21x115x115㎝, 2010, 개인소장
모준석
작은 속삭임 동선, 스테인드글라스, 165x105x76㎝, 2011
모준석
잠 못이루는 밤 동선, 스테인드글라스, 101x73x55cm, 2011
모준석
동행 동선,스테인드글라스, 73x101x49㎝, 2010
세상을 향한 이상향적 시각을 독창적으로 풀어내는 작가 모준석의 개인전 ‘널 위한 자리’가 5월 13일부터 6월 5일까지 갤러리 선 컨템포러리에서 열린다. 사회적 동물로서 인간은 타인의 존재를 필요로 하며 오늘날 신기술의 급격한 발달은 타인의 대상과 영역을 가상세계로까지 확장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레비나스 (Emmanuel Levinas, 1906-1995)가 무너뜨린 근대의 절대적 주체개념은 더 넓은 층위의 타인과 공존해야 하는 현대사회에서 타자의 철학으로 여전히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으며 ‘주체-타인’의 관계성 또한 더 이상 개인의 자아 확립을 위한 부차적 관점으로의 접근이 아닌, 정체성 형성에 있어 필수불가결한 요소로 인식되고 있다. 소외된 개인 또는 타인의 부재 등 현실적 현상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현 미술계의 풍토 속에서 모준석 작가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공존, 소통, 하나됨이라는 이상적 방향을 그의 조형 작품을 통해 시각적으로 제시한다.
어울림에 대한 갈망과 끊임없는 인내를 필요로 하는 공동체 생활. 모준석 작가는 유난히 잦았던 이사와 오랜 기숙사 생활을 통해 이 두 갈등을 직접 경험하고 이를 작업의 근원지로 삼았다. 집으로 은유되는 개인이 모여 마을이나 또 다른 인물의 형상을 빚어낸다. 동선과 스테인드글라스만으로 이루어진 그의 입체적 집과 인물의 내부는 하나로 비워져 경계의 영역을 허물어뜨리고 공간의 소통을 가능하게 하였다. 이는 주거지의 형태에 따라 생활자가 맞춰나가야 하거나 또는 일정 장소가 그 사용주에 따라 용도가 변화하듯 개인 역시 타자와 조우하였을 때 서로 조율해야 하는 소통과 비움을 상징한다. 그러나 작가는 다양한 형태의 외곽과 형형색색의 스테인드글라스와 같은 시각적 장치를 통해 무조건적인 비움, 희생이 아닌 자신의 본래성을 가진 개인의 세계 속에서 이것들이 이루어 질 것을 강조한다.
“자신을 비워 하나를 이루는 것이 자신을 버리는 행위가 아니며, 자신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처럼 자기비움은 나의 작업에서 자신을 비운 타자의 결합으로 이루어지며 그러한 결합을 통해 타자와 나는 하나가 된다. 즉, 각자의 객체가 비워져서 전체의 비워짐을 돕는 역할을 하고, 전체는 하나됨을 이룰 수 있게 된다.” -작가노트 中
공존과 소통, 하나됨을 다루는 모준석의 작업은 주제의식 면에 있어 이전과 그 맥락을 같이 하지만 이 세 영역을 동일선상에 제시하였던 과거와 달리 이들의 차이점에 의문을 가지고 깊이 있게 고뇌한 작가의 흔적이 이번 전시작에서 고스란히 느껴진다. 테이블, 의자 등과 같은 작품 속 소소한 세부장치는 관계의 연결고리 역할을 하며 소통의 개념을 보다 구체적으로 형상화하며, 동선 두께의 차이를 키워 다양성의 하나됨을 강조함과 동시에 시각적 안정감을 구현하였다. 또한 은유를 넘어 주체로 본격 등장하게 된 인물상은 인체비례를 기본으로 하여 실제적 느낌은 극대화시키되 여전히 내부는 비워두어 마치 인간적으로 실천하기 어려운 자기비움 (Kenosis)을 온전히 수행한 절대자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더 나아가 이상적 사고를 구현하는 작품 앞에 창작자로서 부끄러움에 고개를 숙이게 된다는 작가의 인간적 고민은 그의 작품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국민대학교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입체미술을 전공 중인 모준석 작가는 이미 2009년 대한민국 기독교미술대전에서 특선을 수상했으며, 2010년 충무갤러리 기획공모전에서 대상을 수상하는 등 그 실력을 인정 받았다. 올 해 2월 에는 AHAF HK 2011조각부분 영아티스트로 선정되어 홍콩 만다린 오리엔탈에서 개최된 호텔아트페어에 참여한 바 있다. 삼차원의 공간성과 빛의 투과를 통한 회화성이 돋보이는 신진 작가 모준석의 작업은 깊이 있는 내용과 독창적 형식으로 벌써부터 미술계는 물론 많은 컬렉터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작가노트
삶, 작업 그리고 전시
모준석
삶은 향기를 머금고 있다. 그렇게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향기를 품고 살아간다. 하지만 세상의 강요와 세상이 만들어 놓은 틀은 우리가 향기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잊게 만든다. 그리고 세상이 원하는 모습으로 요구받는다. 이러한 세상에 맞서 자신이 가진 향기를 발견하기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아마도 그렇기 때문에 자신을 찾아가기 위해 시련과 고통을 통과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장미가 더 세찬 바람을 맞아야 가장 붉은 꽃을 피우는 것과 같이, 우리의 삶 또한 많은 시련과 고통의 시간이 지나면 향기가 짙어지게 된다. 그래서인지 흔들림의 시간은 때로는 혹독하게 몰아쳐 온다.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듯, 시린 겨울은 꽃을 피우기 위한 과정인지 모른다.
작업은 삶을 담아낸다. 그래서 어떨 땐 삶이 작업보다 더욱 치열하다는 생각을 한다. 윤동주 시인은 <쉽게 쓰여진 시>에서 나라의 어려움을 뒤로하고 자신의 시가 쉽게 써짐이 부끄럽다고 표현한다. 나 역시 쉽게 만들어진 작업이 되지 않기 위해 다시 치열한 삶을 돌아보게 된다. 작업은 시간이 흐르면 완성되지만 삶의 한 부분은 일 년이 걸리기도 하고, 십년이 지나도 완성되지 않을 수 있다. 왜냐하면 삶이라는 것은 일정한 양을 붙여나가며 형태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형태가 만들어져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나는 시간이 흐를수록 삶이 작품이 되기를 소망한다. 그렇게 때로는 부족한 모습으로 때로는 작업을 할 수 있음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오늘도 작업실로 향한다.
[널 위한 자리] 전시에는 아침마다 나를 깨워주던 새소리, 뜨거운 여름 나무그늘 아래 잠을 청하던 어느 날, 조촐한 식사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어 만찬이 되었던 시간, 누구를 기억하고 기쁨으로 기다리던 날의 떨림과 같이 행복했던 순간들이 담겨 있다. 세상은 더욱 급격하게 발전하고 우리에게 편리함과 유용함을 선사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사람을 직접 대면하기보다 기계를 대면하며 사람과 사람사이의 담을 만들어내고 있다. <널 위한 자리>는 전시 제목과 같이 나와 너의 사이의 담을 허물고 내 안에 널 위한 자리를 만들어내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더 많은 사람들과 함께 나와 너를 넘어 우리가 되고, 한 마을과 같이 살아가기를 하는 바람이 담겨 있다.
평론글
모준석의 조각
타자에게로 열린 집, 관계를 복원하는 집
고충환 (Kho, Chung-Hwan 미술평론)
현대인의 인간관계를 엿볼 수 있는 말 중에 관리한다, 혹은 관리 들어간다는 말이 있다. 무심결에 보고 듣는 이 말은 삭막한데, 이 말이 인간을 사물화하기 때문이다. 마음에 들면 친구로 등재했다가도 별 이득이 없으면 용도 폐기된 사물을 버리듯 삭제하면 그 뿐이다. 그리고 내 소셜 네트워크는 유명 인사들과 영향력 있는 사람들로 세팅된다. 그리고 그 사람들도 머잖아 무명해지거나 영향력을 잃는 순간 다른 유력 후보들로 교체될 것이다. 개개인이 인력풀을 관리하는 시대정신에 걸맞게 나의 인간관리 파일은 항상 깔깔이 새 부속들로 채워진다. 그리고 헌 부품은 즉각적으로 처리된다. 그것도 단 한 차례 삭제 커서를 누르는 것만으로 이 모든 일들이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이 놀라운 신세계는 얼마나 멋진 것인가.
인터넷은 소셜 네트워크를 열었다. 그래서 나는 골방에 틀어박힌 채 세상 끝에 있는 친구를 만들 수 있고 만날 수 있다. 그러나 그 친구는 익명적이고 추상적인 기호일 뿐, 실감이 없다. 구닥다리 아날로그 시대의 유산인 교제가 없고 교감이 없다. 그래서 나는 알짜배기 정보에 버금가는 친구들이 있지만, 사실은 친구가 없다. 너무 많은 정보는 오히려 정보에 둔감해지게 하고, 너무 많은 이미지는 이미지에 무뎌지게 만든다. 정보 불감증이고 이미지 불감증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론 그 정보와 이미지에 탑재된 리얼리티에 대한 감각을 떨어지게 만든다(아직도 여전히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보와 이미지가 리얼리티를 담보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인터넷 불감증이다. 쇼셜 네트워크는 타자를 향해 열린 길 같지만, 사실은 막힌 길이다. 소통은 단순히 정보가 교환되는 차원이 아니다. 교감이 없는 소통은 소통이 아니다. 그렇다면 교감도 없고 소통도 없는 이 시대에 소통은 어떻게 가능해지는가.
집을 소재로 한 모준석의 조각은 사실은 이 문제를 건드린다. 네트워크 곧 관계와 소통이, 그리고 그 단자인 주체와 타자와의 관계가 핵심이다. 불통의 시대에 소통의 계기를 트는 일이며, 그 계기를 매개로 한갓 사물관계로 전락한 주체와 타자와의 관계를 회복하는 일이 관건이다.
작가는 유년시절에 유난히 이사가 잦은 편이었다. 그리고 성인이 된 이후에는 수년간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툭하면 이 방에서 저 방으로 옮겨 다녀야 했다. 아마도 매 학기가 바뀔 때마다 그랬을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집에는 가족이 살고, 방에는 동료들이 산다. 같이 더불어 살아야 하는 만큼 매번 자기변신이 필요했고(자기변신은 주체가 타자로 변신하는 경험 곧 타자가 돼보는 경험이란 점에서 일종의 역할극과도 통한다), 그 변신이 집에 주목하게 했다. 그러므로 그에게 집은 처음부터 가변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주지하다시피 집은 정체성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집이 가변적이라는 것은 곧 정체성 또한 가변적이라는 말과도 같다. 그러나 상식적으론 집도 정체성도 결정적이다. 그러므로 집도 정체성도 비결정적인 것이라고 보는 것은 사실은 작가의 입장이며, 그 결정적인 논리에 내재된 억압의 계기를 트고 열어 놓으려는 작가의 의지의 소산으로 보인다.
보통 집은 막혀있다. 그렇게 막혀있는 집은 타자에 대해서 배타적이다. 그 배타적인 논리가 정체성의 논리와 통하고 자기동일성의 논리와 통한다. 거칠게 말해 정체를 밝히라고 요구해오는 것이 정체성의 논리며, 그렇게 밝혀진 정체를 결정적인 것으로 보는 태도가 자기동일성의 논리다. 거기에 타자가 들어설 여지는 없다. 이것(혹은 주체)이면서 동시에 저것(혹은 타자)이기도 한 양가성의 논리를 위한 자리는 없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주체는 이미 처음부터 잠재적인 타자였다. 아기가 생전 처음 거울에서 본 것도 타자였고, 나르시스가 물거울에서 발견한 것도 타자였다. 그래서 랭보는 자신이 곧 신이며 악마며 타자라고 했다. 내 속엔 잠재적인 네가 살고 있고, 네 속엔 잠재적인 내가 살고 있다. 나는 너로 인해 비로소 정의되는 만큼 네가 없으면 나도 없다. 내가 보고 들은 것이 나를 만들고, 그렇게 나를 만들어준 것이 모두 타자가 아닌가. 그러므로 어쩌면 주체보다 타자가 더 또렷할지도 모른다. 타자로부터 나에게 건너온 비동일성의 영역과 범주가 더 실감날지도 모른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주체는 타자라는 하부구조 위에 축조된 상부일지도 모른다. 이처럼 주체는 타자에 긴밀하게 연동된 탓에 타자가 흔들리면 같이 흔들리고, 타자가 부대끼면 같이 부대낀다.
이런 차원을 작가는 기독교적 윤리를 빌려 케노시스 곧 자기 비움이라고 했다(예수는 신을 비울 수 있었기에 인간을 품을 수가 있었다). 무슨 도 닦는 소리 같기도 한 이 자기 비움의 경지는 사실은 이처럼 주체와 타자의 연동성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연동성을 레비나스는 윤리적 공감으로 해석한다. 이를테면 걸인을 보면 그냥 모른 척 지나칠 수가 없다. 걸인의 얼굴에 신의 얼굴이 포개져 있고, 그 신의 얼굴이 윤리적 공감을 호소해오기 때문이다. 이때의 신의 얼굴이 타자며 트라우마다. 신의 얼굴은 말하자면 트라우마를 통해서 온다. 타자 곧 세상의 모든 트라우마 속에 신의 얼굴이 편재해 있다(숨은 신과 편재하는 신). 신은 세상의 모든 고통 위로 내려앉는다. 고통으로 각인된 타자의 얼굴이 곧 환원 불가능한 비동일자의 얼굴이며, 절대자의 얼굴이며, 신의 얼굴이다. 그리고 윤리적 공감은 요샛말로 윤리적 연대가 되며, 연동과 연대는 곧 존재론적(혹은 형이상학적?) 거울을 위한 매개에 해당한다. 이렇게 주체와 타자는, 그리고 나와 너는 서로에게 거울이 된다. 윤리적 공감과 윤리적 연대, 이 삭막한 시대에 도무지 씨알이 먹힐 것 같지가 않은 이 말에 작가는 다시 빛을 쪼이고 싶어 한다. 그리고 타자를 향해 열린 집을 그 상징적 좌표로 삼는다.
여러 경우로 집을 소재로 한 작가들은 많다. 그 집들은 대개 막혀있거나 닫혀있어서 이미 결정적인 의미 밖에 담아낼 수가 없다. 그런데 작가의 집은 한눈에도 다르다. 그리고 그 다른 집들은 결정적인 의미와 함께 비결정적인 의미들에 대해서도 열려있다. 가녀린 동선을 일일이 망치로 두드려 질감을 만든 연후에, 그 선들을 용접으로 연이어 붙여나가는 방법으로 집을 짓는다. 그리고 집에 다른 집을 중첩시켜 집 속에 집을 짓고, 집 위에 집을 짓는다. 이렇게 집에 집들이 어우러져 하나로 연속된 속이 빈 덩어리를 만드는데(작가의 조각에는 매스가 없다), 그 덩어리가 때로는 마을 같고, 더러는 사람 같고, 이따금씩은 달 같다. 사람 사는 동네며 사회며 세상을 형상화한 것이고, 타자들이 어우러져 주체를 만들어준 사람의 형상을 유비적으로 표현한 것이며, 달동네의 꿈꾸는 풍경을 시적으로 옮겨놓은 것이다.
그 덩어리에서 단연 두드러져 보이는 것은 선이다(작가의 조각은 일종의 드로잉 조각으로 범주화할 수가 있을 것). 선에 선이 연이어지면서 집을 만들고 마을을 만들고 사람을 만들고 달을 만든다. 그래서 그 선은 집과 마을, 사람과 달을 만들어주는 매개 같고, 관계의 은유적 표현 같다. 타자에게로 열려진 길 같고, 비동일자에게로 연이어진 관계의 망 같고, 네트워크 같다. 안과 밖이 따로 없는 이 통 구조 형태의 커뮤니티에서 주체와 타자의 경계는 허물어지고, 나아가 아예 그 의미를 상실하고 만다. 주체는 타자에 의해서 정의되고, 타자 또한 주체를 버팀목 삼아 설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정면에서 보면 선들이 두드러져 보이는 탓에 무슨 평면적인 그림 같다. 그리고 그 그림은 선들이 만들어내는 그림자와 어우러져 더 복잡해지고 심도가 깊어진다. 그런가하면 평면과 입체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이 모두를 아우르는 집들 사이사이로 이따금씩 스테인드글라스로 처리해 창을 내기도 한다. 꽤나 아날로그적이고 따뜻한 감성이 전해져오는 그 창은 아마도 마음의 창일 것이다. 그 창이 불현듯 세상 끝을 보게 해주는 월드와이드웹이며 윈도라는 생각을 해본다. 어쩌면 작가는 그 창을 통해서 주체와 타자와의 꽉 막힌(차라리 왜곡된?) 관계가 복원되기를, 그래서 윈도와 네트에 걸맞게 진정한 소통이 가능해지기를 꿈꾸는지도 모른다.
Mo Jun Seok’s Sculpture
House opening to you, House of restoring relationship
Koh Chung-Hwan (art critic)
Modern term of ‘management’ implies a cross section of relationship of contemporaries. This expression, we unconsciously seen and heard, often sounds heartless since the verb objectifies human beings. People of once liked are added to friends and without advantages, they are soon to be deleted like discarded objects. And one’s social network is filled with celebrities and influential people. Whenever they become nobody and powerless, other leading candidates will replace their position. In commensuration with the Zeitgeist when each individual manages this ‘relation pooling’, my relation management file is always filled with appurtenances and old components are promptly handled. How great is this new world where one simple ‘delete’ button does it all for you with great speed.
The internet opens up a new form of social network. Now I can make and meet friends on the other side of the world in my own room. Those friends, however, are an anonymous and abstract subject thus do not evoke a real sense of existence. Association and intercourse, the legacies of the outdated analogue era, are missing. I do so have friends worthy cream of the crop but, in fact, there is no real friend. Too much information has rendered people to become insensitive with information and likewise, we are blunt with the images in the flood of images, all of which are a symptom of both information and image insensitivity. Most decisively, we happen to be numb from reality loaded onto such information and images (Majority of people still have no doubt on information and images guaranteeing the actuality)- this is internet insensitivity. Social network seems open to others but it is rather a closed way. Communication is more than an exchange of information therefore communication without communion is not real communication. Then how communication could be possible in the time without communion and communication?
Mo Jun Seok’s sculpture, having house as its main subject, touches this issue. Network in terms of relationship and communication and relation of the subject and other people are the key. In the age of interruption, it is to open up a chance for communication and with this opportunity as an intermediate, restoration of relation between the subject and others that has been degenerated into object relationship is critical.
The artist tended to have frequent moves in his childhood. Since he became an adult, he had to move room to room as spent years in a dormitory. It possibly happened when every new term starts. A family dwells in a house and colleagues share a room. Living together requires self-changing (self-changing has a thread of connection with the role play as one has to experience of being other people) and this change prompted him to focus on house. Naturally, the space of house was variable to him from the beginning. As house symbolizes one’s identity, a notion of house having variability would be the same referring that one’s identity is, too, changeable. But in the sensitive world, both house and identity are definite. Therefore viewing house and identity as nondeterministic is indeed the artist’s personal opinion and it seems to be a fruit of his will to lose inhibition implicated in such decisive logic.
Houses are commonly closed. These enclosed houses are clannish to others. Such exclusive theory lies on the same line of identity theory and self-identity theory. Speaking with asperity, requirement of identity verification is an identity theory and an attitude of regarding the verified identity as conclusive is a self-identity theory. There is no room for others hence no room for a theory of ambivalence: a thing can be this (or the subject) and that (or the others) at the same time. Yet the subject has been latent others from the start. An image a baby first sees in the mirror is the other and the reflection Narcissus found on the surface of water was also the other. Rimbaud once said that he, himself, is a god, evil and someone else. You are consciously living in me, and vice versa. As I am defined by you, your existence justifies mine. What I saw and heard has composed me and things that established me to be me were all come from others. In that sense, others perhaps stand clear than the self. Different area and category that the outsiders have affected me might feel more realistic. An individual probably places above a sub-classification of other people. The subject of oneself is closely interacted with outsiders thus I wobble together with their agitation and struggle.
The artist borrows Christian ethics and refers this state to Kenosis, self-emptying (Christ empties himself of deity thus becomes able to embrace humanity). This level of self-emptying, in fact, means interlocking of one and its surroundings. Levinas interpreted such linkage as moral sympathy. For instance, he cannot pass by a beggar. The face of god overlaps on the face of the beggar and this god’s image appeals to his moral sympathy. The face of god, in the other word, is both a portrait of other people and a trauma. God’s face, so to speak, comes with the trauma. Within every single traumatic experience lies the face of god (hidden god and omnipresent god). God descends on the all forms of pain. Today a term ‘ethical alliance’ is to be a modern equivalent of moral sympathy and interlocking and alliance are a correspondent of an intermediate for ontologistic (or metaphysical?) mirror. Likewise the subject and the outsider, and you and I become a mirror to each other. In the period of desolation, the artist wishes to re-illuminate these moral sympathy and ethical alliance and has a symbolic coordinate of house that is open to others.
Number of artists use house for their subject matter. Those are usually either blocked or closed and could contain conclusive meanings only. Yet Mo’s house is very different at a glance. His houses are open to both decisive and indecisive meanings. After hammering thin copper wires to highlight texture, he welds these lines to build a house. As he piles up one on another, each is built within and/or on the other. All these come together and form a connected large mass with empty inside which suggests an outline of a town, a human figure or a form of the moon. His work describes a neighborhood, a society and the world, represents a man of solid self awareness and poetically expresses dreaming landscape of the hillside village.
Lines are certainly distinguished in the work (Mo’s sculpture could be categorized under Drawing Sculpture). As wires connect to the other, it creates houses, towns, humans and the moon. These lines feel to be a medium to link house to town and men to the moon as well as a metaphorical expression of relationship. They also seem to be a way opening to others, a relation net connected to strangers and a network. A boundary between the subject and others disappears and further loses its meaning. The subject is defined by other people and others are also to be able to stand with the support of oneself.
Seen at front, Mo’s work appears to be like a two- dimensional picture owing to its distinctive lines. This drawing- like image together with its shadow become complicated and create depth. Among these houses that cross over the genre boundary between painting and installation, stained glass windows are placed here and there. This window arousing analogue sensibility is probably the window of the mind. It suddenly struck me that this window is a worldwide web and window station in which the other side of the world become accessible. Perhaps the artist dreams of restoring closed relationship (or distorted?) between the subject and others with the window so that true communication become possible with the aptly titled window station and net.
1984년 울산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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