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_either
2010.06.10 ▶ 2010.07.03
2010.06.10 ▶ 2010.07.03
김진
N_either1013 oil on linen , 91.7x72.7cm , 2010
김진
N_either1012 oil on linen , 91.7x72.7cm , 2010
김진
N_either1011 2010 oil on linen , 130.3x97cm , 2010
김진
N_either1010 oil on linen , 160x130cm, 2010
김진
N_either1009 oil on linen , 227.3x363.6cm , 2010
김진
N_either1008 oil on linen , 193.9x130.3cm , 2010
김진
N_either1004 oil on linen , 116.7x91cm , 2010
김진
N_either1014 oil on linen , 91.7x72.7cm , 2010
김진의 회화-창문을 통해 본 경계인 의식, 이방인 의식
고충환(미술평론)
김진의 그림을 처음 봤을 때 불현듯 반 고흐의 그림을 떠올렸다. 인상파 화가들이 그렇지만, 특히 반 고흐는 빛의 화가다. 사물의 표면에 던져진 빛의 편린들을 짧게 끊어진 중첩된 붓질로 표현한 것이다. 어둠이 사물의 형태를 삼킨다면, 빛은 사물의 형태를 휘발시킨다. 반 고흐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사물의 형태가 빛의 세례 속에서 해체되다가 마침내 다 지워져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이렇듯 사물의 형태를 해체시키는 원인이 인상파에서는 빛(물리적인 빛)이지만, 고흐에게는 여기에 심리적인 정황이 더해진다. 고흐가 사물의 형태를 해체시키는 것은 빛에 투사된 심리(심리적인 빛)가 그 원인이었던 것이다. 반 고흐의 그림에 나타난 특징들, 이를테면 짧게 끊어진 중첩된 붓질과 해체되는 형태들, 그리고 어느 정도는 사물의 형태를 해체시키는 원인으로서의 자기 투사가 김진의 그림에서 또 다른 형식을 얻고 있는 것이다.
근작도 그렇지만, 김진은 진작부터 공간에 관심이 많았다. 영국에 유학하기 전에 그린 그림들을 보면, 캔버스에 주로 실내 정경을 목탄으로 스케치를 하고, 그 위에 마치 벽돌을 한 장 한 장 쌓아 벽을 축조하듯 낱낱의 한지 조각들을 덧붙이는 것으로 면을 표현했다. 이렇게 그려진 그림에서는 비록 사람이 등장하지는 않지만, 특유의 분위기로 인해 사람의 흔적을 강하게 환기시킨다. 공간 중에서도 특히 생활공간은 이렇듯 정체성을 환기시키는 속성이 있다. 실제로 그림 속에 사람이 등장하는 경우는 말할 것도 없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도 결코 덜하지가 않은데, 오히려 암시적인 공간으로 인해 정체성이 더 강화되기도 한다. 때로는 존재를 통해 존재를 증명하는 것보다 부재를 통해 존재를 암시하는 것이 더 강력하게 와 닿는 법이다. 이처럼 외형상으로 전작과 근작은 다르지만, 그러면서도 공간 중에서도 생활공간을 소재로 한 것이나, 그 공간을 정체성 문제와 결부시킨 점, 그리고 형식적으로 볼 때 중첩된 한지조각이 중첩된 붓질로 대체된 점 등으로 인해 전작과 근작은 서로 통한다. 그리고 작가는 영국에 유학을 하고, 대개의 유학생들이 그렇듯 잠정적으로 현지에 적응을 하지 못하는 일종의 소외의식 내지는 경계인의 의식을 내재화한다. 그리고 경계인의 의식은 이후 작가의 작업을 결정짓는 열쇠 말이 된다. 그 계기를 작가는 영국의 평범한 중산층 계급의 가정에서 찾는다. 작가는 길을 걷다가 처음엔 우연히, 그리고 나중에는 의식적으로 영국의 중산층 계급의 가정을 엿보게 된다. 창문을 통해 그 가정의 거실이며 서재를, 때로 운이 좋을 때면 거실 안쪽으로 열린 문 뒤편으로 연이어진 정원이며 테라스를 엿볼 수도 있다.
특히 거실에는 집주인의 취미며 취향을 반영하는 각종 기물들로 치장돼 있다. 그 중에는 도자기며 불두(佛頭)와 같은 골동품들이 중요한 역할을 도맡고 있었는데, 식민시대에 식민국으로부터 약탈해온 것이거나, 원본 그대로 본 떠 만든 이미테이션들이다. 그 골동품이나 모조품들은 말하자면 영국의 식민역사를 말해주는 것이고, 소위 중국풍, 인도풍, 일본풍(자포니즘)과 같은 이국취미를 대변해주는 것이고, 특히 이들 이국을 욕망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배타적인 대상으로 본 오리엔탈리즘적인 시각을 증언해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작가는 불현듯 이 골동품들과 자신의 처지가 비슷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무슨 이유에선지는 모르나 우호적이면서 동시에 배타적인, 호기심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적대적인. 이후 작가는 이렇듯 이중적이고, 이율배반적이고, 자기모순적인 문명사적 시각을 자기화하기에 이른다. 작가의 그림에 나타난 정경이며 기물들이 왠지 그 형태가 애매하거나 모호해 보이고, 비결정적으로 보이고, 해체돼 보이는 것은 바로 이런 이중성 내지는 이중적 시각을 반영한 것이고, 그 시각에 반영된 자기분열 양상을 표상한 것이다.
작가의 그림에는 어김없이 창이 등장한다. 실제로 작가가 그 내부 정경을 엿볼 때 매개가 되어졌던 것이 창이기도 하지만, 정작 그렇게 엿본 정경 속에 창이 없을 때면 가상의 창을 그려 넣기조차 한다. 때로 창은 세로로 긴 몇 개의 다른 그림들이 하나로 조합돼 창문틀이나 창살(풍경을 분절시키는 창)을 강조하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작가는 말하자면 창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며, 이로써 창은 작가의 그림을 읽게 해주는 열쇠 말 중 하나인 셈이다. 창은 이중적이다. 열어 놓으면서 닫는, 통하게 하면서 차단하는, 보여주면서 숨기는, 권력을 전시하기 위한 장치이면서 동시에 정치적 장치이기도 한, 그리고 무엇보다도 심리적 장치다. 창은 공간을 이쪽과 저쪽으로, 이편과 저편으로, 안쪽과 바깥쪽으로, 중심과 변방으로 나눈다. 작가는 창 바깥에서 거실 안쪽 정경을 본다. 그 정경은 그대로 전시적 풍경이며, 권력적 풍경이며, 적어도 외부인에게 허락되지 않은 사적 공간이란 점에서 배타적인 풍경이다. 그 배타적인 풍경 속에 작가는 자신의 자화상을 슬쩍 그려 넣는다. 남의 집에 들어와 있는 것이며, 자신에게 허락되지 않은 공간에 들어와 있는 것이다. 바로 이방인 의식이다. 권력이 전시되는 공간에 들어와 있으니, 그것도 허락도 받지 않고 침범한 것이니 마음이 편할 리가 없고 좌불안석이다. 애매하고 모호한 정경과 더불어 작가의 자화상마저 비결정적이고 해체돼 보이는 것은 바로 이런 이방인 의식을 반영한 것이다. 그리고 그 이방인 의식은 창 밖에서 창 안쪽을 쳐다보는 작가로부터 그림 밖에서 그림 안쪽을 쳐다보는 관객의 시선에로 그대로 이식되면서 확대 재생산된다. 그 경우는 다르지만, 세상에는 작가의 그림에서와 같은 전시적 풍경, 권력적 풍경, 배타적 풍경들이 있고, 그 풍경과 대면했을 때의 경계인 의식이나 이방인 의식은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일이다. 그 자체 정체성 문제와도 통하는 이 의식은 창이 매개가 되어져서 가능해진 일이다. 창은 세계를 보는 관점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때론 이처럼 세계를 가름하는(분절하는) 계기로 작용하기도 한다.
작가의 그림은 이처럼, 그리고 때로는 무슨 숨은그림찾기라도 하듯 애매하고 모호해 보이고, 비결정적이고 해체돼 보인다. 그림이 이렇게 보이는 것은 그림에 반영된 내용(이를테면 경계인 의식이나 이방인 의식 같은) 때문이기도 하고, 독특한 형식에 연유한 것이기도 하다. 작가는 밑그림을 따로 그리지 않고 바로 그림을 그린다. 어두운 색에서 시작해 점차 밝은 색 순으로 진행하는데, 매번 전면적으로 그린다. 이를테면 무슨 스케치하듯 청색 하나만 가지고 전체 화면을 그리고, 그 화면이 마르면 재차 노란색만으로 전체 화면을 덧그리는 식이다. 이런 연유로 작가의 그림에서는 색과 색이 서로 섞이는 소위 간색(間色)을 찾아볼 수가 없고, 색 위에 색이 쌓이는 일종의 중첩된 레이어가 형성되는 것이다. 분방한 필선들이 난무하는 가운데서도 유독 색감이 선명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며, 그 원리는 색 점과 색 점이 중첩된 터치로써 사물에 던져진 빛의 산란효과를 표현한 인상파와도 일정정도 통하는 부분이 있다. 여하튼, 이렇게 중첩된 화면 위에 최종적으로 흰 색의 하이라이트를 그려 넣는 것으로 화면을 마무리한다. 이렇게 하이라이트가 강조된 그림에서는 덜 그런 그림들에 비해 마치 빛의 편린들이 공간에 부유하는 것 같은, 빛의 순수한 유희가 감지되기도 한다. 그런가하면 작가의 그림에선 유독 창이 강조된다고 했다. 그림에서 창은 창 자체로 나타나고, 중첩된 색 층의 레이어(막과 막이, 겹과 겹이 중첩된 레이어)로 반복된다. 이와 함께 일부 그림에서는 다 그린 그림 위에 검정색 선으로 전체 화면을 재차 드로잉 하기도 하는데, 그 비정형적인 선들이 어우러져 마치 그림 위에 주렴이나 커튼이 드리워져 있는 것 같은 인상을 주며, 그 주렴이나 커튼을 통해 그림 안쪽 정경을 엿보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열면서 닫는, 통하게 하면서 차단하는, 드러내면서 숨기는 창의 의미기능이, 그 이중성이 거듭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이상에서 본 작가의 그림은 그 의미내용이 매번 전시에서의 주제에서도 그대로 확인된다. 즉 2003년 전시주제인 『A bit of space』에는 공간이란 말이 들어있고, 형식적으로나 의미론적으로 공간에 대한 인식이 향후 작가의 작업을 견인하는 핵심적인 역할을 할 것임을 예시해준다. 그리고 2008년 전시 『Margins』은 가장자리, 변두리, 난외의, 등의 뜻으로 인해 일종의 경계인 의식을 보다 적극적으로 의식하고 표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근작에도 연이어지는 전시주제 『N_either』(2009-2010)에서 작가는 일종의 말장난을 시도하고 있다. 즉 Neither는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이라는 부정적 의미를 함축한다. 그리고 N이 빠진 either는 이쪽이거나 저쪽, 이편 아니면 저편, 이라는 모호한 의미를 함축한다. 이처럼 부정적이고 모호한, 이중적이고 다중적인 의미를 통해 작가는 이쪽에도, 그렇다고 저쪽에도 확고하게 뿌리를 내리지 못한 일종의 이방인 의식을 내재화한다. 이러한 이방인 의식 자체는 전작에서의 주제인 경계인 의식이 또 다른 형태로 변주되고 강조된 경우로 볼 수 있다. 이렇듯 작가는 그 주제의식에 있어서 일관성을 유지하면서 이를 변주하고 심화시켜나가는 것으로 볼 수 있겠다. 더불어 그 주제의식이 반영된 작가의 그림은, 특히 그림 속에 등장하는 자화상은 작가 자신의 경계를 넘어 현대인의 일반적인 초상으로 확대되면서 보편성을 획득한다.
1974년 인천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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