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산금
민법(802-817page) 4m인공진주, 접착제, 아크릴물감, 나무패널, 153x97cm, 2012
고산금
형사법(1702-1721page) 4m인공진주, 접착제, 아크릴물감, 나무패널, 153x97cm, 2012
고산금
레이스 뜨는 여자(파스칼 레네작, 69-107page) 4m인공진주, 접착제, 아크릴물감, 나무패널, 전체 135x60cm, 2012
고산금
달에울다(마루야마 겐지작, 40-65page) 4m인공진주, 접착제, 아크릴물감, 나무패널, 전체 135x60cm, 2012
고산금
존재의 세가지 거짓말下(아고타 크리스토프작, 50년간의 고독 113-138page)4mm 인공진주, 접착제, 아크릴물감, 나무패널, 전체 80x55cm (각 40x55cm), 2012
고산금
인생사용법 1부(조르주 페렉작, 1부 15-146page) 4mm 인공진주, 접착제, 아크릴물감, 나무패널, 전체 156x204cm (각 26x34cm), 2012
고산금
인생사용법 2부(조르주 페렉작, 2부중 146-279page) 4mm 인공진주, 접착제, 아크릴물감, 나무패널, 전체 156x204cm (각 26x34cm), 2012
고산금
운명애(프르드히 니체작,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창조하는 자의 길에 대하여, 자유로운 죽움에 대하여, 무덤의 노래 107-111page, 124-128, 192-197) 4mm 인공진주, 접착제, 아크릴물감, 나무패널, 120x80cm, 2012
고산금
너는 아이스크림을 좋아해(프르드히 니체작,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112-120, 192-206page) 4mm 인공진주, 접착제, 아크릴물감, 나무패널, 168x80cm, 2012
고산금
Dispossessed(미셀 우엘백작, 지도와 영토, 499-509page) 4mm 인공진주, 접착제, 아크릴물감, 나무패널, 120x80cm, 2012
상실을 보는 눈은 기다리는 자의 몫이다
양효실 미학박사
작가가 꿈이었던 소녀는 어쩌다보니 문학이 아닌 예술로 밀려 났지만, 읽을 수 있는 것은 모두 눈으로 집어/찍어 삼키는 탐욕적인 독자가 되어 세우지 못한 꿈 가까이 거처를 정했다. 그녀는 읽는 자들의 애독서인 소설, 시, 철학서 말고도 신문, 대중가요의 가사, 법전도 읽는다. 그녀에게 법전은 시취(尸臭)를 풍기는, 삶이 불가능한 글자들의 연옥이다. 마치 그녀는 삶의 비극, 희극의 비옥함 이면에 도사린 불모의 ‘질서’를 잊지 않으려는 듯 법전을 읽는다. 감정이입된 글자들, 숭배되는 글자들, 공포의 글자들에 대해 그녀는 동등한 태도를 취한다. 그녀는 취향이나 감수성을 위해 읽는 게 아니다. 그녀는 싫은 것과 좋은 것을 가르는 이의 쾌락이나 욕망을 좇지 않는다. 그녀는 거의 읽을 수 없는 것들까지, 인간이 독자일 수 없는 것까지도 읽는다. 그녀의 일상적 ‘애티튜드’는 문자에의 집요함(insistence to the letter)이다. 그녀는 '다른' 곳을 주억거리는 이들의 ‘여행’, 다른 삶을 운운하는 이들의 ‘만남’에는 별 관심이 없다. 그녀의 여행, 그녀의 만남은 종이에 빼곡히 정렬한 글자들이 연출하는 떠남―그/그녀는 그녀/그를 떠난다―이나 중얼거림―너 나에게 왜 그래?―혹은 침묵에 멈춘다. 그녀의 일상은 읽는 자의 주이상스에 오롯이 바쳐진다.
그녀는 거의 먹지 않으며 거의 사지 않으며 거의 살지 않는다. 궁핍과 결핍뿐인 시절이 그녀에게는 길었고 혹독했다. 그녀는 차마 '말'도 견딜 수 없는 어려움 속에서 세상의 밑바닥에 오래 체류했었고, 그 와중에 최소한으로 사는 법을 체득했다. 멀리 떠나는 자, 누구를 만나는 자들도 물론 세상을 읽는다. 그러나 그녀는 세상을 읽는데 별로 많은 도구나 장치, 변화를 요하지 않는 방법에 익숙해져야 했고, 그렇게 몸의 확장보다는 몸을 둥글게 안으로 말려 부피를 최소화하는 방법에 '대가'가 되었다. 읽는 자를 위한 (물리적)세계는 딱딱한 나무 의자나 작은 테이블, 등을 기댈 수 있는 벽 한 귀퉁이로 족하다. 책상에 앉기만 해도 세상이 펜 아래로 몰려와 정렬하는 작가들처럼, 책만 펼치면 세상이 그 깊은 신음과 감탄과 고막을 찢을 듯 절규할 수 있다는 것을 간파한 이의 고요가 그녀의 일상이다. 그녀는 걷기에 부적합한 다리와 보기에 부적합한 눈과 말하는데 부적합한 머리와 느끼는데 충분한 신체적 결함과 고통에 바쳐진 삶의 기록을 갖고 있다. 그녀는 세계를 최소로 접을 때 가능한 여행에 굴종함으로써 자신의 결핍과 무능을 환대했다. 나는 아주 어린 소녀가 해질 무렵 신작로를 바라보다가 또는 낮잠을 자고 일어나 둘러본 세상의 불운한 느낌에, 아무튼 아이의 눈물이 헤아릴 수 없는 장면에서 울었다는 이야기나 극심한 불면증에 벽장에 들어가 몸을 접고서 잔 날이 깃털 같다는 이야기를 도대체 왜 듣고 있었는지......
이 글은 결국 소녀가 동그랗게 몸을 말아 벽장에 들어가 먼 곳을 바라보며 수 십 년 째 울고 있는, 그녀의 겨우 살아가는 몸에 대한 것이다.
세계에 대한 비문자적 체험을 열망하는 자가 예술가라면, 문자에 오염되고 문자에 포획된 세계를 그림으로 재배열하는 중에 미분된(differentiated)된 세계를 전체(holism)로 체험하는 이가 예술가라면, 세계가 시각중심의 체제로 조직화된 스펙타클의 사회에서, 회화적 이미지에 할당된 위반의 힘이 거의 소멸된 상황에서, 같은 생각과 같은 감성이 밖을 향한 문을 거의 닫고 있는 시대에, 그녀는 세계를 읽고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작가들의 문자적 상상력을 경험하는 데 예술가로서의 자신의 소명, 결기를 '우선' 할애한다. 닥치는 대로 읽으려는 욕망을 지속하는 중에 그녀는 앉은 자리에서 완독한 텍스트의 일부분을 자신의 '이미지'로 선택한다. 읽은 부분을 본 부분으로 번역하는 중에, 그녀의 예술가적 상상력, 에너지는 종이와 여백, 글자들이 만들어내는 조형적 가능성을 모색한다. 세계를 살되 경험의 '잔여'를 이미지로 보존하는 게 예술가의 운명이라면, 그녀는 '자기'를 관통한 삶과 다른 이들이 '글자'에 박은 삶을 섞는 중에 자신의 예술가로서의 개성을 유지한다.
글자들로 된 문장들로 된 페이지들로 된 책을 덮은 뒤 그녀는 작업실 테이블에 앉는다. 작고 딱딱한 나무 의자와 마트에서 구입한 플라스틱 테이블이 그녀의 작업실 메인 풍경이다. 그녀의 작업 도구는 아크릴 물감을 100번 가량 덧칠한 나무 패널, 그 위에 부착된 모눈종이, 직각자, 4밀리 인공진주가 담긴 플라스틱 그릇, 글루건, 핀센트이다. 작업은 아주 단순하다. 읽은 책의 일부분, 자신에게 결정적인 인상을 남긴 부분을 그녀는 필사(筆寫)하기 시작한다. 패널의 크기와 진주가 대체할 글자의 수를 조정하는 데 있어서 그녀는 전문가 급의 감각을 갖췄다. 모눈종이와 직각자의 정확성을 통해 여백을 이룰 패널의 외곽을 조정하고, 몇 줄로 문장을 필사할지를 결정하는 일은 과학자적인 엄격함을 따른다. 물론 기계적이고 수학적인 배치의 토대를 이루는 것은 시각적 조형성이나 심미성이다. 그녀는 '모던한' 예술가이기 때문이다. 글루건으로 패널에 글루를 찍고 왼손이 집은 진주를 핀센트를 쥔 오른손이 넘겨받아 글루 위에 붙이는 규칙적 움직임이 서서히 가동되기 시작한다. 그녀의 필사, 그녀의 진주붙이기는 글자의 수와 글자들 사이의 간격을 기준으로 진행된다. 문장의 의미론적 맥락이 사라지고 대신에 형태론적, 시각적 조형성이 나타난다.
그녀의 작업은 앉은 자리에서 몇 시간이고 인형에 눈을 붙이는 여자들, 볼트를 조이는 컨베이어 벨트 옆 노동자들의 움직임이 그렇듯이 극히 협소한 동선 안에서 진행된다. '노동'의 경제성에 맞춘 듯 일상적인 안락함에서는 벗어난, 극히 불편한, 따라서 '노동'에 적합한 의자에 앉은 그녀는 잡생각, 딴생각, 기발한 생각이 개입하면 망칠 극히 단순하고 반복적인 노동에 몰입한다. 글루건에서 패널 사이를 오가는 움직임이 패턴을 이루며 자동화되는 중에 그녀는 서서히 사라진다. 그녀는 자신을 잃어가고, 두 개의 도구와 두 손의 반복적 리듬만이 공간을 가르며 시간을 채운다-어쩌면 제스쳐로만 채워진 춤이 인간은 동작이라는 전언을 줄곧 증언하는 것일지도. 그녀는 교열사, 조판사, 감정사, 타이프라이터, 캐시어처럼 손만 있는 사람으로 환원된다. 과감한 브러시스트로크도, 창작의 고통과 희열도, 도취와 흥분을 동반하는 영감도, 과거와 현재의 싸움도 그녀를 엄습하지 못한다. 그녀는 자신을 비우고 운동, 흐름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 그녀의 눈은 캐시어의 계산기처럼 글자의 숫자와 간격을 계산하는 도구일 뿐이다. 그녀는 없다.
그녀의 ‘반복’, 그녀의 두 번째 행위는 텍스트를 지우고 동시에 텍스트를 읽으며 심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반응했던 자아도 지우는 행위이다. 내용, 서사, 의미, 주체가 사라진다. 대신에 읽을 수 없기에 반응할 수 없는 덩어리, 우글거리지만 고요한 삶(밀집된 진주는 심리적 동요를 일으킨다)의 리듬, 편평하면서도 오들토들한 화면, 읽고 싶은 욕망에 맹인처럼 화면을 더듬거려야 할 것 같은 감각의 교란 혹은 충돌, 나열된 침묵과 침묵에 갇힌 말들의 소란스러움이나 절규의 환영이 나타난다. 조금의 손재주만 있으면, 단순·반복적 노동의 희열을 아는 자라면, 그녀의 작업방식을 놓고 '아이디어' '흥미로운 개념', '잔재주'의 소산이라고 평가할지 모른다. 그녀의 작업은 '아무나' 필사할 수 있는 작업이다. 혹은 수십 년을 같은 일에 종사한 장인들의 근면성실함을 떠올릴 수도 있다. 축적, 확장, 도약, 증폭, 직관, 희열과 같은 예술가의 작업이 관통하는 열정의 언어가 그녀의 작업에는 부재한다. '아무나'할 수 있을 것 같은 노동, '아무나' 증명할 것 같은 근면함과 끈기, 그것이 그녀의 작업을 수공예, 산업노동의 대열에 위치시켜야 할 것 같은 인상을 자극한다.
복제, 필사, 반복, 대체, 원본과의 비교 대조처럼 그녀의 작업을 관통하는 단어들은 흔히 포스트모던한 차용(appropriation)을 설명할 때 등장하는 단어들이다. 원본을 있는 그대로 반복하는 차용의 실천가들은 주지하다시피 원본/원작의 권위를 의심하고 비판하는 '개념' 미술가들이다. 차용에 근거한 작가들은 창조, 표현, 영감, 작가성과 같은 근대적인 작가주의 이데올로기에 저항한다. 그들은 예술의 권위와 예술의 환상을 제거하는 중에 예술이 복제가능한 상품이 된 사회에서 예술이 어떻게 자신의 신화적 위상을 통해 상품으로서의 지위를 은폐하는지를 묻는다. 고산금의 작업이 일견 차용의 맥락에 근거한 것처럼 보이는 것도 그녀의 작업이 인쇄술의 발명 이후 등장한 '작가'(문자적 상상력)의 신화적 지위에 대한 비판적 전유로 읽힐 수 있는 여지/과잉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녀의 작업은 예술에 대한 생각, 성찰을 요구하는 포스트모던 미적 전략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오랜 세월 예술가들의 작업을 설명해온 심리주의나 표현주의가 부재하는 그녀의 화면은 머리가 아니라 '마음'을, 비판이 아니라 명상을 요구한다. 건강한 이들은 지각하지 못하는 내장의 위치를 통증이 드러내듯이, 그때 나의 일관성이 무너지고 의식이 불안을 겪듯이, 마음이라고 불리는 어떤 것이 슬쩍 제 자리에서 벗어나 산란하기 시작한다. 있음과 없음, 부재와 현존, 침묵과 소란 사이에서.
전시장에 걸린 작품은 예술가의 전 과정 중 말하자면 결론, 마침표 같은 것이다. '완성'에 이르기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기에 우리는 안다고 기만하거나 모르기에 '예술가'를 숭배한다. 고산금의 작업은 작업의 방식, 작업에 사용된 오브제나 기법에 대한 궁금증을 유발하지 않는다. 그녀의 작업은 작가의 과정에 대한 '신비'를 유발하지 않는다. 신묘한 기법도, 기발한 배치도, 놀라운 도약도, 공정의 비의도 없다. 대신에 그녀의 작업은 왜 '노동자'처럼 지루하고 기계적이고 반복적인 작업을 지속하는가, 를 묻게 한다. 그녀는 게으른가? 단지 자신이 읽는 사람이라는 일상적 사실을 기록하려는 것인가? 그녀는 미학적, 조형적 새로움을 통해 자신을 배반해야 하는 작가의 운명을 외면하고 대신에 진주작가라는 아이콘, 닉네임에 만족한 것인가? 책을 읽고, 최소한의 인간적 삶을 영위하고, 일상의 대부분을 작업실에서 진주붙이기에 천착하는 작가의 집요함은 어떤 미학적 논리를 따르는 것인가?
그녀는 계속 뭔가를 숨기려 한다. 언어가 가리키는 세계, 문장의 지시체를 진주라는 동일한 오브제로 대체하고, 자신이 읽으면서 본 것을 읽힌 것의 자리로 대체하면서 결국 자신이 '본' 것을 감추려 한다. 우리는 그녀가 본 것이 무엇인지를 그녀가 읽은 것의 형식적 수열성, 순차성을 놓고 추측해야 한다. 캡션으로 명기된 원전의 그 부분을 읽은 들, 우리는 그녀가 본 것, 예술가로서의 그녀의 망막에 작가의 글자가 어떤 이미지를 걸었는지 알 수 없다. 숨긴 것이 있다는 알리바이, 보았지만 감추겠다는 의지, 현장의 지표(index)로서의 진주. 그녀는 진실, 증거, 사실, 봄, 확인과 같은 눈의 작용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법(전)의 존재론, 사람들의 관계가 강화되거나 훼손되는 인식의 구조에 대해 자신의 읽기의 경험을 갖고 성찰한다. 마음은 만질 수도 볼 수도 없는 것이기에 증거를 통해 지속되는 삶의 형식 중 가장 취약하다. 마음은 법전에 기록될 수 없는 타자, 말하자면 법전의 '구성적 외부(constitutive outside)'이고, 마음은 관계를 지속시키면서 훼손시키는 사이이다. 그녀는 본 것의 정확성, 본 것의 우선성이 어떻게 관계를 망치게 되는지를, 본 것 전부를 망치고 본 것 전부의 눈을 지우는 행위로 재연한다.
우리의 시각(적 읽기)은 논리적 순서, 시각적 도식을 따라 진행된다. 보기는 거의 대체로 '두번째'의 행위이다. 보기는 이미 항상 도식에 갇혀 있다. 최초의 보기는 시각의 틀로 인해 불가능하다. 우리는 본 것을 본다. 보기는 대상, 세계, 너에 대한 것이 아니라 보기의 틀에 대한 보기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눈 뜬 장님, 못 보는 자이다. 눈은 동물적인 기능, 감각적 기능을 상실하고 차이를 읽는데 실패한 채 제대로 정확히 보는 노동으로 환원된다. 우리의 눈은 세계라는 놀람, 경이, 공포와 두려움에는 반응하지 못한다. 고산금은 읽고 보고 확인하려는 '눈'의 욕망에 저항한다. 그녀는 자신이 보고 읽은 것의 정확성, 가독성(literacy), 가시성(visibility)을 지운다. 그녀는 자신의 시각이 닿았다가 돌아온 것의 자리는 보존하지만 거기에 '무엇'이 있었는지는 지워버린다. 우리의 보기와 읽기는 늘 눈의 집요함, 시각적 도식의 재확인에서 멈춘다. 선사는 늘 제자에게 물었다. 네가 본 것이 정녕 네가 본 것인가? 뭘 못보고 보았다고 너는 확신하고 집착하는가? 그러므로 본 것은 못 본 것이고 보기는 상실이고 보는 중에 우리는 거의 대부분을 잃는다. '그것'을 보는 자, 그것이 무엇인지를 본 자의 자리를 대체한 '은유'는 그러므로 장님이다. 태어날 때부터 실명한 맹인은 눈 뜬 장님들의 보기에의 집착이나 실수, 상실을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정치적으로 올바른 태도는 아니지만 장님의 은유이다.
고산금은 15년 전 갑자기 원인을 알 수 없는 채로 실명했었다. 몇 개월을 눈 없이 깜깜한 어둠 속에서 살았고 그 뒤로는 실루엣만 보이는 몇 개월, 뿌옇게 보이는 몇 달을 지나 지금 그녀는 '정상인'처럼 살아가고 있다. 과거는 지나간 것이 아니라 현재를 보충하고 잠식하고 교란하는 당신처럼 언제나 현재와 더불어 살아가는 타자이다. 그녀의 시신경은 시각적 도식에 근거한 세계와의 만남이 '자연스러운' 방식이 아니라는 것을 늘 확인시키는 내부의 무능이다. 그녀는 손으로 보고, 코로 보고, 몸으로 보는 법을 배우는 중에 눈으로 보는 법, 조건반사적인 보기의 유능을 잃었다. 온 몸으로 기어가거나, 절룩거리면서 가거나 더듬어서 찾아내는 불구의 제스쳐는 눈으로 보고 다리로 걷는 자들의 유려함 사이에서, 풍경을 어지럽게 흐트러뜨리면서 다른 존재와 다른 삶만이 증언하는 인간적 진실, 겸손, 유약함을 가시화한다. 그녀는 그렇게 이편의 사람들에서 밀려나 저편의 풍경으로 들어갔다. 은유로서의 장님의 삶을 온 몸으로 직접 살아내야 했던, 이편과 저편을 살아서 왕래했던/하는 이의 세계를 나는 '알' 수 없다. 고산금은 본 것과 읽은 것, 남은 것과 사라진 것 모두에 대해 증언하려고 한다.
이번 전시 제목으로 고산금은 '오마주 투 유'를 선택했다. 당신에게 보내는 존경과 감사. 있다가 없어지는 것들, 읽히는 중에 사라지는 것들, 내 손을 잡고 저편으로 인도했던 당신, 거기에 있어서 내가 엉금엉금 기어가고 있는 당신, 거기서 여기로 늘 오고 있는 당신, 만났으니 헤어지는 우리, 헤어질 줄 알면서 만나는 우리, 그러므로 비극을 기다리는 우리, '말'로는 다할 수 없는 당신의 놀람과 기적과 그러므로 슬픔에 대한 존경과 감사. 몸을 동그랗게 안으로 오므리고 여기서 눈을 지운 채 기다리는 자의 긍정. 떠나는 역할은 맡지 못했으므로 여기에 앉아서 시간을 세어가며 패널을 메우는 결기와 고요. 당신은 오지 않을 것이고 왔다 한 들 온 것은 아닌 게다. '왔고 갔다'는 눈의 교란, 확신, 착란일 뿐이다. 너는 오지도 가지도 않는다. 너는 찾을 수 없는 자리, 너인 줄 모르는 나의 심연, 내 안에 동그랗게 오므리고 있는 덩어리이다. 그러므로 삶의 찬란한 은유는 기다림, 오고간 것의 증거와 무관한 약속과 신의, 기다림의 무위(無爲)까지 도달해 있다. 그녀는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사람의 노동, 그저 빈 곳을 메우는 중의 침묵을 재현한다.
이번 전시는 조르주 페렉의 <인생사용법>을 2부로 나누어 72개의 패널로 필사하는 '노동'을 기점으로 그녀의 작업에서 그녀도 모르게 일어난 변화가 세 점 포함되었다. 허물어져 가는 건물을 지나다 그 건물에 살았던 사람들을 상상해내 실화보다 더 실화 같은 삶을 입혀 준 페렉의 대작에 대한 그녀의 화답은 은둔한 이들이 찾아낸 고독, 고통, 희열, 슬픔에 대한 오마주로 보아도 손색이 없을 것 같다. 인생에 끌려가고 팔자에 사로잡힌 삶의 희극과 비극을 인생이란 매뉴얼의 사용방식의 차이로 번역한 페렉의 소설에서 그녀는 자신의 인생에 대한 태도를 확인했다. 주도면밀한 계획에 의거해 자신의 삶을 반복 - 그리고 나누고 꿰맞추기 - 에 제한하려 했던 '바틀부스'의 주체적 능동성이 종국에는 우연에 의해 실패하게 되듯이 고산금 역시 세계를 살아내기 보다는 세계를 자신의 방식으로 구성, 조직하는데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중이다.
페렉의 <인생사용법>에 대한 필사까지는 지난 번 전시와 같은 기법이 반복되었다. <운명애>, <너는 아이스크림을 좋아해>,
그런데 작가는 상자를 재현하되 보는 시각에 따라 달라지는 상자의 모습을 같은 화면에 동시에 배치함으로써 '시각적' 이미지, 환영으로서의 이미지의 지위를 강조하고 있다. 같은 것이 움직임, 운동성으로 인해 달라질 때, 우리가 보는 것은 상자인가, 상자가 방편이 된 움직임, 흐름, 운동인가? 심지어 허공을 장소로 정한 상자는 주사위로도 보인다. 인간의 손을 떠난 주사위의 어느 쪽이 위쪽이 되어 떨어질지는 오직 저 우연한 운동만이 결정할 것이다. 그녀가 상자, 주사위, 우연, 착시, 운동성에 대한 집요한 명상을 시작할 때 선택한 텍스트가 니체였다는 것은 대단한 우연이고 기적이다.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일부를 필사하는 중에 저 유명한 '운명애'(amor fati)에 대한 부분에서 그녀는 주사위 형상을 발견한 것일까? 아니면 그녀가 오래전 소녀였을 때부터 외로울 때면 종이에 끄적거렸다는 상자가 결국 니체의 운명애를 만나면서 튀어나와 제 형상, 목소리, 자리를 발견한 것일까?
새로운 작업은 다음 전시에서 구체화될 것이고, 기다리는 중에 우리에게 이미 와 있는 '다음 번'은 제 자리를 찾아내고 몸을 동그랗게 오므릴 것이다. 결정적인 장면은 결정적인 문장으로 압축된다. 아이스크림을 좋아하는 당신은 아이스크림(의 삶)만큼 아슬아슬하다. 아이스크림을 먹는 당신은 대단한 사람이 아니다. 당신은 곧 녹아내릴 아이스크림의 운명만큼 아슬아슬하다. 아이스크림에 사로잡힌 당신은 혀이고 입이다. 아이스크림에 맞춰 당신은 축소된다. 사로잡힌 존재는 머리도 생각도 계산도 할 수 없다. 당신은 '디스퍼제스드', 무언가에 사로잡힌 딱 그만큼 실존한다. 그것이 운명을 받아들이고 운명을 갖고 놀이하는 인간의 형상이다.
궁핍과 고통, 무능에 있어서 '대가'인 그녀가 전하는 삶에의 긍정, 그것이 어떤 것이건 '다시 한 번'이라고 외칠 수 있는 자유에 대한 환대. 그녀는 우는 자, 슬픔을 보존하는 자, 너에 대한 존경과 감사를 단 한 번도 잊지 않은 겸손한 자의 자리에 계속 머무르려고 하는 것 같다. 동그랗게 몸을 말아 제자리를 떠나지 않는 운명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는 중에!
P.S
작업이 막바지에 이른 9월 말경 그녀는 <피에타>를 보았다. 그녀는 통화 중에 '미안하다'고 말했다. ‘누구에게요?’ 작업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불운과 불행 중에도 그녀가 작업을 지속할 수 있었다면 그것은 '의지'보다는 손이 닿는 거리에 진주라는 제품이 있었기 때문 아닐까? 그녀는 자신의 진주를 만들어 내는 이들, '노동자'라 불리는 이들에게 미안하다고 말했다. 나 역시 김기덕 감독이 10대 시절을 보낸 청계천 노동자들에게 <피에타>란 작품을 통해 어떻게 '존경과 감사'를 보내는지 확인했고, 동시에 그녀가 철강의 시대 제일 밑바닥에 배치된 이들의 여리고 고운 마음을 복원해내는 김기덕의 겸손과 그녀가 거기에 화답해 미안하다고 한 말이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무능을 깨달을 때, '당신'이 나로 인해 '불행'해졌다고 느낄 때 미안하다고 말한다. 미안해는 사랑해를 더 낮은 자리에서 필사한다. 미안해는 사랑하는 사람들의 재산인 절망, 수치, 서러움을 동글게 몸을 오므려 안에 품고 있다. 그 말은 자주 사랑한다의 지위로 올라가지 못한 채 미끄러져 고백하는 자의 눈물을 타고 흐른다.
1966년 출생
박현순: 말장난 같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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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09 ~ 2024.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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