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위해 준비했습니다
2017.12.07 ▶ 2018.01.07
2017.12.07 ▶ 2018.01.07
이우성
그날 어디에 계셨나요 2017, 캔버스에 아크릴릭 과슈, 젯소, 31.5x41cm
이우성
기다리고 있습니다 2017, 캔버스에 아크릴릭 과슈, 40.9x31.8cm
이우성
네 머리 위의 숯불 2017, 캔버스에 아크릴릭 과슈, 젯소, 31.5x41cm
이우성
노식 씨와 유성이 그리고 정수, 합정지구 오프닝에서 2017, 천 위에 아크릴릭 과슈, 젯소, 210x210cm
이우성
노을 2017, 캔버스에 아크릴릭 과슈, 31.8x40.9cm
이우성
늘 생각하고 있습니다 2017, 캔버스에 아크릴릭 과슈, 젯소, 65x50cm
이우성
당신을 만나기 위해 먼 길을 돌아서 왔습니다_ 여기서 같이 나눠 먹읍시다 2017, 캔버스에 아크릴릭 과슈, 젯소, 50x65cmx3
이우성
당신을 위해 준비했습니다 2017, 천 위에 아크릴릭 과슈, 젯소, 210x210cm
이우성
당신을 위해 준비했습니다 2017, 캔버스에 아크릴릭 과슈, 24.2x33.4cm
이우성
당신을 위해 준비했습니다, 2017, 캔버스에 아크릴릭 과슈, 40.9x31.8cm
이우성
두 번 반복해서 그린 세진이 2017, 천 위에 아크릴릭 과슈, 젯소, 210x210cm
이우성
붉은 벽돌 위에 앉아있는 사람들 2014, 천 위에 아크릴릭 과슈, 수성 페인트, 345x300cm(x4)
이우성
빛나는, 거리 위의 사람들 2016, 천 위에 수성 페인트, 젯소,300x543cmx2
이우성
선생님의 손과 옷 주름 그리고 빈 컵 2017, 천 위에 아크릴릭 과슈, 젯소, 210x105cm
이우성
신촌에서 버스 기다리는 재훈이 2017, 천 위에 아크릴릭 과슈, 젯소, 210x210cm
이우성
여진 작가님 핸드폰 빛으로 불을 밝혀주세요 2017, 천 위에 아크릴릭 과슈, 젯소, 210x210cm
이우성
우연히 이렇게 넷이 모였고 술도 마셨다 2017, 천 위에 아크릴릭 과슈, 젯소, 210x210cm
이우성
이 나무를 쓰러뜨리면-빠지지지직 직 쾅쾅 2017, 천 위에 아크릴릭 과슈, 수성 페인트, 젯소, 210x210cm
이우성
첨벙 첨벙 2017, 천 위에 아크릴릭 과슈, 210x210cm
이우성
흔들바위 2017, 캔버스에 아크릴릭 과슈, 젯소, 50x65cm
위트와 페이소스로 가득한 한국의 청년 미술가 이우성
지난 11월 26일 홍콩 전시컨벤션센터에서 열린 크리스티의 ‘20세기 아시아 미술 및 동시대미술’ 경매에서 한국 청년 작가들의 작품이 큰 주목을 받았다. 특별전 형태로 한국 청년 작가 13명의 작품을 선보여 모든 작품을 판매하는 쾌거를 거둔 것이다. 참여 작가들은 대부분 1980년대 생이며 구매자들은 대부분 중국인과 싱가포르인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렇게 특별전을 마련하고 성공적 판매를 이뤄낸 것의 배경에는 한국 큐레이터의 큐레이팅 능력과 함께 한국 청년 작가 특유의 섬세한 작업 기술과 실험적 시도가 있었다. ‘입시 미술’이라는 시스템을 거친 한국의 미술 전공자들은 다른 나라보다 뛰어난 작업 기술을 갖춘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에는 인터넷을 통해 세계 곳곳의 다양한 정보를 접하며 창의성도 발달하여 신선한 시도를 끊임없이 펼치고 있다.
이우성은 1983년, 서울 태생이다. 상대적으로 안정된 경제적 토대 위에서 성장했지만 정작 사회에 나와서는 88만 원 세대에 속하게 된 연배의 사람이다. 금수저, 은수저 등의 단어가 등장할 만큼 혼자 힘으로 무언가를 이루기 힘든 시기에 20대를 보낸 사람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그의 작업은 좌절, 불안 등을 표현하지만 기존 작가에게서 볼 수 없던 특유의 유머와 위트로 색다른 완성을 보인다. 이우성의 작품은 모두 위트 있지만 페이소스를 동반하는 제목을 가지고 있으며 만화처럼 그려져 무게를 덜지만 정확히 그리고 색을 잘 사용하여 눈을 뗄 수 없게 한다. 천에 그림을 그리고 빨래집게로 걸어 전통적 캔버스 회화 개념에 도전하기도 하며 OCI 미술관 개인전에서는 벽에 ‘내가 내가 내가 갑이다’라고 크게 써서 갑일 수 없는 상황을 역설적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학고재는 우리 시대 젊은 미술계의 관점과 동향을 파악하기 위해 청년 작가 전시를 꾸준히 마련하고 있다. 청년 작가가 미술계 불황 또는 조명 부족이라는 그늘에 갇혀 빛도 보지 못한 채 궁지로 내몰리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이우성은 그동안 다수의 개인전을 열었지만 갤러리 개인전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번 전시를 통해 한국 청년 작가의 작품을 살펴보고 동시대 미술을 다루는 시장이 발전하는 데 도움이 되고자 한다. 또한, 이우성이라는 작가에게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이유인 그의 의미 있는 작품 세계를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이우성이 ‘당신’에게 보내는 우리 시대의 자화상
당신에게 보내는 편지 My Dear
김승옥 소설 <서울 1964년 겨울>을 다시 읽었습니다. 이상하게 제가 사는 지금의 시간이 보이더군요. 문득 이 시간을 어떠한 방식으로 기록할 수 있을까 생각해 봤습니다. 한참을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가 그동안 그린 그림들을 봤습니다. 거기에 있는 여러 형태의 얼굴들은 누구를 향해 있을까.. 저에게 사람은 모든 것이 표정이고 메시지입니다. 그것을 그림으로 옮겨 그리는 것이 저의 작업이지요. 중요한 것은 우리가 같은 시간을 살고 있다는 것. 그것이 당신과 연결된 끈입니다.
행복하시고 건강하세요.
얇은 천에 옮겨 그린 그림들이 당신의 마음에 닿을 수 있기를. 제가 본 것을 담기에는 그림의 크기가 여전히 작습니다. 이우성 드림
이번 전시는 김승옥의 소설 <서울 1964년 겨울>(1965)에서 시작한다. <서울 1964년 겨울>은1965년 6월 『사상계』에 실리며 큰 반향을 일으켰던 단편이다. 세 명의 등장인물을 통해 격변기 도시인이 가진 삶의 가치를 따져 보고 우울한 진단을 내리며 끝난다. 이우성은 지인과의 대화 중에 우연히 이 소설을 언급하고 읽으며 전시 준비를 시작했다. 1964년의 겨울 풍경에서 이상하게 우리가 사는 지금이 보였고 이는 어떤 감흥을 끌어내 작업으로 발전했다. 소설을 그대로 재현하는 방식보다는 도시와 도시에 사는 사람이라는 주제로 전개하여 그림을 그렸다.
이러한 작업 시작의 배경은 2017년 겨울, 서울에서 1964년 겨울, 서울의 풍경이 여전히 보이는 이유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우리의 근현대사는 식민지 시대, 해방, 한국전쟁, 그리고 다수의 민주화 운동 등 역사적 사건을 경험했다. 성숙한 시대로 한 걸음 더 나아가기 위해서는 지나간 시대의 삶을 따져 보고 배움을 얻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의 경험은 너무 격동적이었기에 미처 돌이켜 보고, 생각하고, 성숙할 시간적인 여유를 가지지 못한 것이다. 이우성의 작업은 우리 시대의 자화상을 그려 미래를 위한 기록을 남기는 것이다. 청년 작가가 남기는 일상의 기록으로 단순히 받아들이기보다 역사적 문맥 속에서 그의 작품을 검토의 대상으로서 조명해야 하는 이유다.
이우성이 우리 시대의 자화상을 그리기 때문에, 혹은 걸개그림을 그리기 때문에 그는 종종 민중작가 2세대로 불린다. 그는 이에 대한 질문에 명확히 자신을 규정하기보다 ‘부정할 수도 긍정할 수도 없는… 내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라는 말로 대신한다. 또한, 같은 맥락에서 그는 자신의 그림에서 오해가 없기를 강조한다. 우리 시대의 자화상 앞에 자주 붙는 일그러진, 슬픈, 고뇌하는 등의 형용사 없이 그림 속의 인물을 있는 그대로 바라봐주었으면 하고 바란다. 그림 속 인물을 보며 주변에 함께 살아가는 사람의 모습을 발견하고 동시대인들에 대한 순수한 이해를 갖기를 지망한다.
나(김), 안, 30대의 사내와 세 개의 층
김승옥의 소설 <서울 1964년 겨울>(1965)에는 주인공인 나(김), 안, 그리고 30대의 사내 세 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각기 다른 배경을 가지고 있는 이들은 군사 정권 아래 산업화와 도시화가 급속히 진행하며 생겨난 자본주의, 이기주의, 그리고 거기서 발생한 고독과 소외의 전형적 인물로 드러난다. 이번 전시는 이 세 명의 인물을 구성에 차용하지는 않지만, 그것에서 비롯하여 세 개의 레이어로 나누어 세 개의 층에서 작품을 선보인다.
학고재 신관 1층에서는 전시 제목과 전시 작업이 함께 있을 때 주는 아이러니함을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전시 제목 ‘당신을 위해 준비했습니다’는 마음이 담긴 애정 어린 표현이지만 전시 작품은 몽둥이를 들고서 관객을 맞이한다. 관객은 순간 당혹스러움과 불안을 느끼고 ‘무슨 상황이지?’라는 질문을 던지며 상황을 파악하고자 전시에 돌입한다. 지하 1층에서는 작가를 포함해 작가 주변에 있는 청년들의 모습을 그린 작업이 보인다. 버스를 기다리거나 담배를 피우며 수다를 떨거나 함께 서 있는 모습은 요즘에 대한 이야기 그 자체다. 지하 2층에서는 10m에 이르는 대형 작품이 관객을 맞이한다. 지하 1층에서 주변 인물들의 모습을 가까이에서 바라보았다면 이번에는 멀리서 관망하게 만들고자 한다. ‘당신을 위해 준비했습니다’는 이 세 개의 층이 합쳐졌을 때 완성을 이룬다. 대상과 관객의 거리를 좁혔다, 넓혔다 하는 과정을 반복하여 더 내밀한 관계를 볼 수 있게 구성했다.
전시서문
1.환각의 실재, 환각의 미로
양효실(미술비평가)
대체로 개인전의 작품들은 연작이고, 그렇기에 반복과 변주로서 갤러리라는 동일 장에 귀속된다. 즉 거기엔 주제가 있고, 그 주제를 축으로 한 이미지들의 연속성과 차이, 혹은 다양성과 동질성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우리는 하나의 심리적, 상황적 프레임 안(벽에 걸린 회화나 걸개그림을 ‘내부’로 모아들이는 동질적인 공간, 즉 갤러리에 함축된)에서 전시 작가가 지난 시간 겪었던, 혹은 겪어냈을 상태나 심리의 투사를 이미지로써 경험한다. 조건은 작가가 제시한 것이고 자신의 작품을 통제, 관리하는 작가의 힘이 거대하건 최소한의 단서로서 물러나 있던 관객은 작품들의 연쇄를 차이와 반복으로 동시에 경험하기 마련인 것이다. 그래서 보통 전시는 관객의 동선을 미리 계산해두고 그것에 맞추어 전과 후로 작품을 배열한다. 이우성은 이런 회화, 혹은 작품을 ‘감상’하기 위한 최소한의 ‘안전’ 혹은 편안함도 제거하려 한다는 점에서, 즉 자신이 먼저 경험한 것을 뒤늦게 하나의 전체로서, 부분과 전체의 상호작용으로서 경험해야 할 관객의 지반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결국 이 산만하고 비균질적이고 비전체적인 그러면서 하나의 전시인, <당신을 위해 준비했습니다>란 이름의 전시를 주도하고 관리하는 ‘작가’의 자리로부터 이탈한 듯 보인다. 그는 자신의 이미지들이 자신의 통제를 벗어나 비정합적으로나 비의식적으로 튀어나가고, 비현실의 욕망과 현실의 질서 사이에서 놀고 있도록 묵인하고 방조한다. 초기 전시부터 그는 자신의 작품들이 상호보충, 상호수렴으로 공존하기보다는 오직 반복으로, 말하자면 차이를 읽을 수 있도록 매개할 장치가 제거된 무수한 이미지로 병렬되도록 구성했다. 그의 의도라면 명민한 것이고 그의 자유라면 무책임한 것이고 그의 욕망이라면 그가 원인이 아니다. 만족스러운 이미지를 빠른 속도로 마감하는 작가의 솜씨는 지지대에 부착된 캔버스보다는 어느 벽에든 걸 수 있는, 안이건 밖이건 상관이 없는, 말아서 갖고 다닐 수 있는 가볍고 펄럭이는 천과 조응했고, 빨리 그리는 작가와 빨리 마르는 천의 상호관계로부터 출현한 그의 등장인물들 역시 가볍고 부유하는 모호한 상태로, 즉 ‘이미지’로 잔존하도록 조율되었다.
눈에는 보이지만 의식적으로 읽히지 않는, 뭔가를 하고 있는 등장인물들과 그들을 다채로운 색으로 번역해내는 작가의 결과물인바 시각적 이미지들은 작가가 관객에게 펴 놓은 게임, 유혹, 내기 같다. 그의 친구들은 이번 전시의 부분에 불과하고, 그가 부르는 ‘당신’은 비어 있고, 얼굴이 사라진 인물들, 아이들의 인형 놀이에서 쓰일 법한 잘린 손들, 어떤 맥락에 들러붙을지 가늠도 되지 않는 잘린 장면들이 하나의 전시에 함께 하고 있다. 즉 관객인 당신들은 나를 읽고 이해하고 동일시하고 작가로 정리하려 할 것이지만, 이렇게 그려져 있는 것들과 이것이 전시된 장소로 보아 당신은 나를 작가라고 부를 것이지만, 아무것도 가리키지 않는 이미지들, 그저 기호로서만 읽히는, 중심도 논리도 없이 산발적으로 나열, 병치된 이 이미지들을 당신은 또 회화나 ‘걸개’그림으로 부름으로써 내가 건 게임이나 내기를 무력화할 것인가, 라고 빙글거리는 그러나 오만하거나 냉소적이지는 않은 사람의 질문이 환청으로 들리기도 하는 것이다. 읽히길 거부하는 이미지들, 전체의 부분으로서의 역할에 어울리지 않는 이 산만하고 이질적이고 심지어 모순적인 이미지들의 병렬을 하나의 전시로 제출하는 작가를 놓고 나는 이 사회에 대한 믿음이나 이 사회에의 안착을 기대하지 않는 자가 자신이 보고 느끼는 어떤 세계에 대한 이곳으로의 유출이나 반입을 놓고 아직도 계산하고 있다고 추측해보기도 한다. 그는 이해받고 사랑받으려는 자가 아니라 제시하고 내기하면서 관객의 시선 바깥을 겨냥하는 자 같다. 그러나 분명 그는 이 게임의 ‘룰’ 혹은 이 장면의 ‘규칙’ 혹은 이 상황의 전제를 ‘알고’ 있다고 보인다. 그는 정확히 그리고 색을 잘 사용하고 제목을 붙이는 데에서 자신의 명민함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적이거나 잘 훈련된 작가의 게임인 것이고, 이 게임의 규칙이 낯선 것일수록 관객은 자신이 갖고 있던 것을 잃거나 종국에는 말려들어서 환각에 빠지게 된다. 그는 우리를 위해 우리를 진정시키기 위해 전시를 하는 게 아니라 이 이상한 세계를 알려고 하는 자들과 계속 있기 위해, 전시장의 ‘내부’와 조응하지 않는 바깥으로서의 이미지, 이곳으로 소환되지 않는 이미지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 관습적인 이미지와 낯선 이미지를 함께 전시하고 관습적인 이미지에 트릭을 가하면서 그러나 계속 ‘당신’이라는 호명으로 우리를 꼬드기면서 내기를 건다. 즉 그는 아주 크고 선명하고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리얼리즘 형식의 그림을 그리면서도 ‘왜’라는 질문이 그림 바깥이나 뒤를 캐묻도록 만듦으로써, 마치 자신이 제시한 부분-상황이 누군가에게는 아주 익숙한 상황이었을 것 같은 장치를 사용함으로써, 유혹과 내기의 기술을 구사하는 자신의 탁월한 능력도 과시한다. 이우성은 자신을 기억하게 하는 데, 즉 자신을 작가가 아니라 단서를 남기고 떠난 ‘범인’으로 설정하는 데 자신의 시각적 이미지를 활용한다. 그는 다 보여주지만 자신의 정체는 숨기는, 자신에 대한 호기심을 계속 유지하게 만드는 그런 미지의 ‘당신’ 같다.
그의 잘 그리기는 속임수이고 그의 속임수는 우리가 계속 보도록 그러나 무엇을 보고 있는지 헷갈려하도록, 그럼으로써 우리가 뒤통수에 우리가 모르는 이미지, 감각, 세계를 달고 전시장을 떠나도록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런 유혹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동일시나 해석이나 교감이나 공감이나 소통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이 많은 이미지들이 이쪽으로 넘어오지 못하고 계속 거기에 텅 빈 채로 있기 때문일 것이고, 이 명백한 시각성의 기호학적 폐허는 결국 모든 관객이 아니라 특정한 너, ‘당신’에 의해서만 충만한 읽기로, 충만한 삶으로 변화될 수 있을 것이라는 작가의 ‘희망’―따라서 포스트모던 냉소나 비관이 아닌 것이다―과 연계되어 있기에, 따라서 아주 특수하고 아주 예외적인 ‘부족민들’의 어휘로 다시 채워질 것이라는 기대를 유도한다. 왜냐하면, 이 폐허 같은 화려함은 포스트¬역사적 피로나 우울을 담지한 것이라기보다는 읽기의 집단성이나 동일성에의 거부이기 때문이고, 그렇기에 집단적 동일시로 아직 건너오지 않은 작고 미력한 어떤 부족의 주변부성, 생존을 알리는 혹은 그 생존을 지지하는 노출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우성의 인물들은 대체로 그와 나이가 비슷한, 20대 후반에서 30대 중반까지의 청년들이다. 아마도 그림을 그리는 동료들이나 친구들일 것 같은 데, 직장을 다니고 커리어를 쌓는 데 분주한 그 나이의 일반인들과 달리 작가나 예술가로 불리는 것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을 이 젊은 작가들은 이우성의 정면¬얼굴¬사회적 가면의 반복이고 이우성이 동일시하는 좋은 사람들이고 이우성의 무사한 관계들을 대체한 것일 것이다. 작업을 하거나 그 언저리에 있는 사람들을 이우성은 그가 ‘아는’ 사람으로서, 따라서 확인 가능한 사람으로서, 따라서 빼고 잘라내고 첨가하는 단계나 과정 없이 정면으로 그렸다. 그러나 얼굴이 없거나 부분으로만 등장하는 사람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상황에서 아주 조금씩 비켜나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들의 행위가 전체의 일부분으로만 제시되고 있다는 점에서, 그것이 별스럽지 않은 행위이거나 익숙하게 보았던 행위라는 점에서, 즉 뭔가 알 것 같기도 하다는 재미나 긴장을 유도하도록 되어 있다는 점에서 우리를 끌어당긴다. 우리는 사로잡힌다. 가령 거대한 벽 위에 앉아 있는 등신대 크기의 청춘들은 저렇게 나란히 모여있음의 이유를 추측해낼 수 없다는 점에서, 지나치게 높게 그려진 붉은 벽돌 벽 위에 지나치게 평온하게 주르륵 앉아 있다는 점에서, 어떤 단일하거나 동질적인 감정도 없이 심지어 아무런 감정도 드러나지 않은 채로 가난이나 불안과 같은 청춘의 상투적 표식도 없이 ‘힙하다’를 암시하는 식으로 나열되어 있다는 점에서, 결국 어떤 읽기도 불가능하게 만든다. 이우성은 이 작품을 작업실 앞 붉은 벽돌을 보면서 상상했던 것을 그렸다고 말한다. 상상은 소망의 성취를 함축할 텐데 이우성의 상상인 이 가짜 그림은 불안, 불온, 평화, 소통, 집단과 같은 어떤 관념도 소환하지 않는 채로 청춘을 재현하고 있고 그렇기에 이 무의미한 다수, 역사나 공동체나 우정이나 집단이나 사회와도 접합되지 않을 것 같은 이 모여있음 앞에서 ‘왜’란 질문은 계속 보도록, 못 보고 지나친 것은 없나, 탐정처럼 뒤지게 만든다. 얼굴이라는 정체성은 옷과 신발과 같은 스타일로 대체되어도 충분하다는 것인가, 없는 얼굴은 되려 더 보고 싶게 하는 것 아닌가, 그리고 이러한 감춤과 이런 이상한 모여 있음에서 우리가 찾아내야 하는 ‘비밀’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변장한 장면에서 욕망이나 금기나 죄의 단서를 찾아내야 한다면 이 장면은 욕망이나 금기나 죄가 빠져있기에 단서 자체가 고립된다. 그런데 왜 이런 수고, 게임, 놀이를 작가는 계속 진행하는가? 탐정이 되어야 할 것 같은데 심지어 왜 탐정이 되어야 하는지도 가늠되지 않은 채 게임이 이미 시작되어버린 것이다. 도망간 범인을 찾는 게임이 아니라 왜 내가 탐정 행세를 하게 되었는지를 묻는 그런 게임 같기도 하다......
이우성이 그린 광화문은 초시간적 전체로서, 관념으로서 존재하지 않는다. 거기에는 다른 시간과 다른 상황들이 나란히 평면으로 뒤얽힌 채로 비동시성으로 공존한다. 이러한 분열증적인, 파편적인 구성은, 그가 직접 걸으면서 보고 찍은 사진에 근거한 것이기에, 즉 그곳에 참여했던 ‘시민’이 아니라 그곳을 ‘방문’한 구경꾼의 관점에서 그려진 것이라는 점에서, 몰입이나 동일시가 아니라 관조와 거리두기에 근거한다. 이것은 무심한 기술이고 건조한 기록이고 중립적인 관찰이다. 그럼에도 왼편 하단의 후드티를 입은 젊은 사내의 극도로 클로즈업된 뒤통수나 오른편 하단의 오른손으로 얼굴을 가린 이에게서 ‘어떤’ 감정이, 집단적인 구호나 행위에서 삐져나온 채 혼자인 이의 외로움이나 고독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운 어떤 ‘감정’이 감지된다는 것, 이 청년(들)이 이곳에 이입하지 않은 채로 어떤 ‘사적인’ 감정을 내재하고 있다는 것에서 이 ‘전체’로서의 광화문에 대한 작가의 위반적인 ‘발언’이 느껴진다. 그러나 그것이 ‘정확히’ 어떤 감정, 내면인지는 확인 불가능하다. 광화문 기록은 동일한 제목―Floating lights on the street―으로 종로3가 드로잉에서 반복되면서 대조를 이루게 된다. 광화문이 그날그날의 일지의 병치와 구성이라면 종로3가는 추상적인 ‘그림’이다. 이것은 사람의 눈으로 본 장소가 아니며 그렇기에 실재 종로3가가 아니다. 광화문이라는 사건의 현장을 구경꾼의 시점으로 재구성하면서 그곳의 뜨거움에서 비켜나듯이 종로3가의 투시도도 그렇게 그 장소의 구체성이나 ‘따듯함’에서 비켜 나 있다. ‘낙원오피스텔’이라는 이름은 특정 부족에게 친숙한 기호일 것이지만 친숙함의 따듯함이나 서정성은 그곳을 더 이상 사람이 살지 않는 폐허처럼 재구성한 작가의 구성과 개입으로 인해 장소나 건물에서 밀려난다. 물론 거리의 ‘떠다니는 빛’은 광화문 촛불을 반복하면서, 그러나 시시하고 사소한 사람들의 오고감으로 전치되면서, 그러나 두 장소 모두에 대해 정서적 판단을 유보한 작가로 인해 동질화되면서, 심지어 만화에서 볼 수 있는 보석¬별의 반짝임으로 하늘에서 반복되면서 뭔가 장난스러운 아이의 묘사처럼 작동한다. 휘영청 떠오른 달(‘수퍼문’!)은 광화문에 있고 그래서 아마도 종로3가의 인간들은 조명도 각광도 상징도 인정도 얻지 못한, 역사에서 밀려난 혹은 역사가 잊은 인간들인 듯도 하다.
자기 작업에 대해 친절하게 설명하지 않으려는 이는 일부러 하지 않는가, 아니면 할 수 없는 것인가? 작가는 자신의 작업에 자주 등장하는 수박을 ‘나눠 먹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달콤하고 붉고 쉽사리 부서지는 과일의 속살은 명명백백하게 자신을 드러내지만, 거기에 대한 설명은 ‘함께 먹는 것’이라는 사랑의 언어로, 나뉘면서 둘이고 원래 하나인 과일이라는 ‘이상한’, 너무나 사적이고 주관적인 해석으로 안착된다. 무엇에 대한 것인가, 라고 내가 이곳 사람으로 물어보면 대충 저곳에서 온 사람의 설명은 그런 식이었다. 내가 작가에게 역사란 무엇인가, 라고 짐짓 ‘민중작가’로 호명되기도 하는 그에게 물었을 때 그는 ‘부정할 수도 긍정할 수도 없는..... 내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라는 아주 많은 침묵과 늪과 틈이 포함된 ‘답’을 말갛게 웃으며 들려주었다. 아버지들의 역사와 아들들의 포스트 역사란 대비는 일시적으로 2016년의 광화문에서 지워지지만, 그곳을 계속 방문했던 사람인 이우성은 그것을 ‘장악(오큐파이?)’했던 이들의 차이를 다채로운 이야기‘처럼’ 조합해서 역사적 현장인 광화문을 대단한 것도 시시한 것도 아닌 그냥 그날그날 다른 이야기들이 들어서는 변화무쌍한 무대로 해석해냈다. 역사 앞에서 어정쩡한, 당위와 자조가 뒤섞인 청년 이우성에게 진지함, 역사를 짊어진 자의 고통 같은 것은 당연히 부재한다. 대신에 그는 아버지들이 물려준 이야기들이나 서사들에서 밀려난 자들, 리얼리즘의 관습에서는 재현될 수 없는 이야기들, 단단한 배경을 갖춘 이야기들에서 사라지고 잘려나간 이야기들을 전면에 끌어들이는 전복은 성취했다. 이미 이우성은 광화문에 대한 지극히 사적이고 주관적인 해석을 갖고 그곳의 보편적 위상에 저항하는 것이다. 이우성의 작업에서 얼굴보다 더 중요시되는 손은 노동자들의 것이어도 될 만큼 크고 단단하고 힘이 세 보이지만 그 손은 관습적 역할이나 의미를 잃은 채 초현실적이거나 비현실적인 상황에 동원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필자인 나의 역시나 주관적인 해석이거나 추측인 것이고, 이것이 만약 이우성의 예술가 친구들의 전신 그림처럼 어떤 정서를 갖고 있다면, 즉 이 모든 것이 하나의 전시로 묶인 심적 유사성을 갖고 있다면, 나는 기다리는 수밖에, 이번에 못 푼 게임, 이번에는 실패한 게임의 목적지 혹은 탈출구를 알기 위해 또 기다리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마치 매혹당한 자의 붙들려 있음은 단지 무익하고 무해한 삶의 지속에 바쳐진 하나의 이미지, 상징이라는 것을 모른 체 하면서.
끝으로 그가 부르는 ‘당신’이 누구인지, 그가 늘 그림을 그릴 때마다 떠올리지만 비워둔다고 하는 자리, 그의 그림을 보러오는 모두이기에 누구도 아닌 당신, 아직 오지 않은 당신을 ‘사랑하는 나의My dear’라고 말할 때, 그것이 얼굴도 이름도 없이 오직 당신이기에, 당신이 풍경의 깊이를 수평의 단면으로 횡단하면서 편평한 불꽃¬글자로 ‘재현’되어 있을 때 그러므로 곧 스러지고 재가 될 당신이란 도대체 환각 속에 있는 이미지가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인지, 따라서 실재보다 더 실재 같은 환상이 결국 우리의 삶을 계속 살아 움직이게 하는 욕망의 대상인 이 낯선 곳에서 온 사내의 사랑 타령이 왜 아주 많이 쓸쓸하지 않은 채 약간 희극적이면서도 절절한지 가늠할 수도 있는 것이다.
2.피막의 세계를 재구축하기 이우성 <당신을 위해 준비했습니다>
남웅(미술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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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성 작가의 2012년 첫 개인전 《불불불》은 톤다운된 과슈의 음험한 형상들이 전시장을 압도했다. 어둠 속에 머물던 군상들은 화면을 향한 플래시에 노출된 듯 나타났다. 이들은 마치 하나의 호명처럼 빛을 비춤과 동시에 현현한다. 어디에 있었고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빛을 비추기 이전의 시공은 가늠할 수 없다. 다만 화면 바깥의 시선이 그들 영역에 인기척을 냈고, 저들은 이미 준비하고 있었다는 듯 횃불이든 촛불이든 손에 들어 화면을 노려본다. 상기된 몸들의 긴장은 불구덩이에 몸을 던져서라도 무언가를 불지를 것이라는 메시지처럼 수신되었다. 탄생 자체가 폭력을 바탕으로 하고, 피조물 자체도 파괴를 수행하는 순환 고리는 창조(호명)와 파괴가 연결되는 사육제적 순간을 묵시록처럼 드러내는듯 했다. 태어날 때부터 지옥이라는 청년세대의 메시지를 상기시키는 그림 속 인물들은 괴기스럽고 결기 넘쳤으며 더러 우스꽝스럽기도 했다.
화면 위로 인물들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가늠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정작 이들이 어디서 온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었다. 이들이 왜 대부분 남성의 청년들이었는가를 설명하는 단서 역시 없다. 몇몇 관객은 현현과 동시에 봉기를 일으킬 것만 같은 균일한 성별의 인물 군상을 동성 사회 내지 동성 성애의 하위문화적 풍경으로 읽어내기도 했다. 회화는 닫힌 공간에 빛을 드리운 행위였고, 빛이 포착한 인물은 청년군으로 묶였다. 그에게는 ‘청년 작가’라는 호칭이 붙여졌고, 이후 작업들은 실마리 없이 얼굴로 현현한 인물들이 배경과 서사를 채워가는 모양새였다. 물론 화면 속 인물들의 서사는 작가의 응시 속에서, 작가와 함께 이뤄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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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작업은 캔버스에서 걸개로 자리를 옮기고 과슈에서 수성페인트와 젯소로 질료를 대체한다. 붓질은 두껍고, 명암은 단조로워졌다. 세부묘사를 생략함에 따라 형상 또한 무게를 덜었다. 시간과 무게를 덜은 만큼 작업은 양적으로 증가했고, 열화에 가까울 정도로 변형 생산되었다. 디테일한 음영과 공간의 깊이는 납작한 색면으로 대체되었고, 평면의 물감층 위에 도드라지는 패턴이 리드미컬한 풍경을 만든다.
매체 특성상 걸개는 일회적 성격이 짙다. 휴대와 이동 뿐 아니라 장소를 불문한 전시가 가능하며 보관도 용이하다. 걸개는 지역과 매체를 교차하며 옮겨 다니는 작가의 시선에 속도를 맞춘다. 일찍이 걸개는 거리 위의 대중선동을 위한 도구로, 임시방편의 프로파간다 매체로 쓰였지만, 작가는 이를 사적 기록의 매체로 전유한다. 대개의 소재는 인터넷과 여타 미디어의 가십이나 사방을 돌아다니고 사람을 만나는 동안 관찰하며 채집한 순간의 표상들을 포함한다. 작가는 일련의 소재들을 연출하고 편집하여 화면에 담는다. 평면에 집적되는 그림은 다시금 여러 장의 천으로 겹겹이 포개어진다. 걸개는 복수(複數)로 카운팅된다. 천들은 벽에 걸리거나 허공에 매달리며 하나의 빅 맵으로 총괄할 수 없는 상황의 파편들을 수집하고 배열한다. 그간 작가가 습작처럼 일러스트를 그려왔다면, 이제는 부수적인 작업들을 전면에 드러낸 셈이다.
사적 기록의 화면으로 전유된 걸개는 배치에 따라 다른 성격의 효과를 유발한다. 사적 심상들이 공적인 공간에 ‘노출’됨으로써 장소의 전형적 의미체계에 이질적으로 개입한다. 허공에 매달리고 나부끼는 걸개의 속성은 공간의 물리적 환경과 대비함으로써 상이한 감상과 의미를 증폭한다. 가벼운 형상들은 때로 보행로 위에 정권을 풍자하는 시위현장의 구호를 수행하는가 하면, 포토월의 배경막으로, 굿즈로 형질전환한다. 그림은 물질적 가벼움으로 현장에 개입하거나 풍자하고, 의미 없는 이미지들을 던져 파동을 일으킨다.
한편 작가는 수직적 매체로서 걸개에 구조를 부여하기도 한다. 2015년 ‘아트스페이스 풀’에서 열린 전시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며》는 걸개의 조형적 속성을 강조한다. 걸개마다 얼기설기 각을 만들고 평행을 이루어 전시됨에 따라 매달린 천들은 공간을 구획하는 파티션으로 기능한다. 걸개들은 통로를 만들거나 틈을 벌려 동선을 유도한다. 천들이 임시로 낸 유사-보행로를 따라 관객은 화면과 화면을 연결하고 분절하기를 반복한다.
최근 진행된 ‘아마도 예술공간’의 전시는 매체의 골격을 보다 강화한 모습이다. 《Quizás, Quizás, Quizás》에서 작가는 스크린톤과 펜을 활용한 다수의 일러스트 작업들을 전시한다. 걸개는 11cm 타일사이즈로 압축되고, 색을 배제한 화면은 선의 밀도가 강조된다. 앞서 집적된 걸개가 패턴을 달리하며 배치됨으로써 동선을 유도한다면, 이번에는 직접적으로 비계를 가설하고 전시대를 만들어 화면을 나열한다. 화면들은 일관된 눈높이에 맞춰 나란히 배열됨으로써 일관된 흐름을 암시한다.
주지할 점은 화면 사이를 구성하고 배치하는 전시 기술법이다. 이전 전시들이 걸개를 ‘집적’해놓았다면, 이번에는 설치물의 ‘뼈대’를 구축함으로써 횡렬(橫列)의 화면을 중심으로 전시장을 하나의 구조물로 변신시킨다. 화면들의 뼈대를 확대하고 교차시킴으로써 3차원 풍경 속에 나부끼던 평면의 화면은 대기를 감싸고 몸의 참여를 끌어안는 임시방편의 장소로 구축된다.
동일한 사이즈로 도열한 화면은 온라인상에서 가로 스크롤을 통해 이미지를 볼 수 있는 툴을 연상시킨다. 여기에 작가는 이미지들을 나란히 배열함으로써 개개의 컷뿐 아니라 컷과 컷 사이 단절의 공간에 임의의 연결 가능성을 유도한다. 전시장 둘레를 따라 배열된 균일한 사이즈의 이미지들은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듯 관객의 시선을 이끈다. 개개의 컷들은 바깥의 풍경과 동료들의 얼굴을 담고, 일상 속 장소와 뉴스 등 소소한 소재들을 미끄러지는가 싶더니 어느 순간 성적 판타지의 내밀한 장소로 이동한다. 한 컷 만화를 이어 붙인 듯 화면은 불연속적이지만 균일한 사이즈로 단절로부터 가상의 연결고리를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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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면은 작가의 일상을 따라간다. 작가의 발걸음과 그보다 더 빠른 생각들이 담기지만, 화면의 총합은 장면들의 집적일 뿐, 세계를 총괄하지 않는다. 손작업을 고수하는 작가의 붓은 가볍고 성기다. 이는 작가가 체험하는 일상의 속도가 세계에 온전히 침잠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듯하다. 그것이 거리를 두는 것인지, 거리를 두는 것에 실패한 결과인지, 거리 두기의 실패를 의식적으로 재현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우리는 현실을 총괄할 수 없는 상황에 취할 수 있는 태도의 하나가 고립을 자처하여 거울상에 매몰되거나 현실의 등고선을 납작하게 가공함으로써 편의적으로 취사선택하는 것임을 모르지 않는다. 초기 남성 청년 군중을 전면에 내세운 작업이 함의한 하위문화적 뉘앙스나 걸개와 한 컷 만화들을 나란히 도열한 풍경은 일련의 추측을 감각적으로 시사한다.
삼차원 공간을 납작하게 압축하고 서사적 맥락을 거둬낸 화면은 세계의 불일치와 부적응에 대한 응답이자 개입이며, 더러는 적응을 위한 기술이다. 다만 세계의 속도에 제 호흡을 맞추는 데에는 작가의 호흡으로 풍경을 가공하고 압축하는 작업이 따른다. 정보의 양이 의식을 초과하는 상황 속에 작가는 상이한 기억과 시간을 가공하고 연출함으로써 감각적 리듬을 부여한다. 그림은 상상과 욕망이 손끝에 투영된 평면의 흔적들이다. 세계와 감응하고 동시에 불일치를 확인하는 작가의 심상이 균질한 무게로 저며진 화면은 객관적이거나 일반화될 수 없다. 이를 공적인 장소로부터 사적인 공간으로, 몸과 영혼의 내밀한 공간으로 침잠하는 것으로 읽어낼 수 있다. 상징체계로부터 환상을 연출하고 화면에 닫아둔다는 접근도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작가의 시선은 지속적으로 세계를 향해 열어두고 개입함으로써 고착을 피한다. 이는 세계와 자아 사이의 구분 사이에 잔가지를 뻗어가는 기술이기도 하다.
세계와 주관 사이의 불화 속에서 작가는 의식적으로 제 분열과 모순을 관찰한다. 단적으로 근래 촛불집회의 풍경을 소재로 삼는 작업들은 그의 작업 초기 주요 모티프로 등장한 빛의 맥락과 교차함으로써 감응과 불화의 주파수를 포갠다. 설명하면 이렇다. 작가는 지난 겨울 동안 연이은 대중 집회에 참여하면서 다양한 갈래의 감상을 남겼다. 한편으로 그가 느끼는 이질감은 집회현장의 소음과 함께 흐르는 얼룩처럼 집회의 기호들을 그려냈다. ‘소쇼룸’(soshoroom)에서 열린 《기록으로서 그림》에 전시한 영상은 집회현장에서 담아낸 거대한 소음의 흐름들을 점멸하는 점과 선으로 재구성한다. 작가에게 집회의 체험은 정신분산적인 스펙터클이다. 서툰 획들은 도시의 불빛을 거리 위에 휘몰아치는 눈발에 교차시키고, 사람들의 얼굴을 발자국과 깃발로, 고함과 타액으로 연결시킨다. 주객의 구분이 흐릿해지는 외부의 끊임없는 두드림 속에 세계에 들어와 있는 작가는 그럼에도 세계에 온전히 들어있지 않다. 아니, 세계에 참여하는 작가는 온전한 주체의 모습이 아닌 채 분열된 모습을 의식적으로 드러낸다.
작가는 제 경계가 흩어지는 지점의 경험을 ‘이질감’으로 기록한다. 부러 침잠하지 않지만, 이질적인 상황과 풍경을 충실히 따르며 불일치의 감각을 화면에 새긴다. 매주 촛불집회에 참여하는 인권활동가 동료의 자리를 펜으로 샅샅이 따라가며 일상의 정치적 기표들을 무심히 좇는가 하면, 또 다른 걸개 〈빛나는, 거리 위의 사람들〉(2016) 위에는 종로 골목 곳곳에 촛불의 행렬을 담아낸다. 초기 그의 작업을 복기한다면, 금방이라도 대상을 부숴버릴 듯했던 인물들이 군중의 실재적 파상력으로 확장되었다고 읽어낼 수 있다. 빛에 노출되어 실존을 묻던 화면은 속세의 알록달록한 빛을 송출한다. 다만 이 순간에도 작가는 경험으로부터 거리 두기를 적용한다. 이질감을 극대화한 영상과 달리, 서울 상공에서 조망한 듯 보이는 골목 곳곳에 가득한 빛의 행렬은 현장으로부터 거리를 확보했기에 포착 가능한 풍경이다. 빛에 의해 강제 호명된 초기 작업의 팽팽한 긴장과 불화는, 낙원동 골목으로부터 서울 시내 전경으로 확장되는 풍경은 밤이면 게이들이 삼삼오오 모여드는 공간에서 시내로 확장하는 군중의 불빛으로 재현의 온도를 전환하는 셈이다.
작가는 불일치와 부적응의 감각, 때론 불화의 경험을 연료로 삼아 풍경을 피막(film)으로 가공함으로써 이질감을 견디고 전유한다. 원거리에 조망한 거시사적 풍경 옆에 동료와 조우한 풍경을, 더러는 오래 지나지 않은 기억 속 얼굴과 장소를 무심코 그려 넣기도 한다. 풍경은 사적으로 가공된다. 관계는 기억을 바탕으로 하지만, 기억은 무게 없는 하나의 스킨처럼 나부낀다. 행진과 집회 등 공적 이벤트나 풍경들이 작가의 시선에 여과되면서 의미와 서사의 무게가 소거된다. 가벼워진 매체 위에 그려진 가벼운 풍경은 휘발되기보다 언제든 가공될 수 있고, 연결될 수 있는 가능성을 시사한다. 다른 얼굴들과 시선을 맞추고, 몸과 몸을 부대끼거나 손발을 교차하여 만들어낸 상황은 치밀하지 않다. 하지만 예의 엉성함은 어떤 상황도 연결될 수 있는 가능성을 시사한다. 화면에 줄곧 나오는 광선 같은 질감의 끈들은 화면 안과 밖을, 화면과 화면을, 인물과 세계를 잇는 연결의 알레고리적 소재이다. 개개의 화면 간에도 의미연결이 이뤄진다. 전시장에 걸린 걸개의 군락은 화면에서 화면으로 이동하며 이야기를 연상시키고 관계를 잇는다. 허공 위의 화면들이 케미를 맞추고 썸을 타며 관계의 통로를 열고 닫는 가상의 신경망이 이미지들을 연결한다. 저마다의 화면들이 상이한 구도로 재배열됨에 따라 가설된 공간은 전시되는 상황마다 다른 의미의 연쇄와 구조를 만들어낸다.
특정 상황에 놓여있지만, 그 속에 몰입하지 못하는 간격 사이에 작가의 기록이 있다. 작가는 화면에 명암이 다른 장면을 포개어 평면의 질감을 다층적으로 만들고, 특정 소재를 부각하고 자르고 편집함으로써 유머와 골계의 수를 둔다. 세속적인 인물 군상은 양식상 선전벽화와 걸개로 휘날리던 민중미술의 계보를 떠올리는가 싶지만, 프로파간다를 결여한 그림 속 인물들은 낄낄거리고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흐물거리는가 하면, 그 속에서 결기 어린 단단함을 암시한다. 걸개는 집단의 관념보다 개인의 경험과 심상에 집중한다.
어수룩한 인물들은 피터 브뢰겔Pieter Bruegel the Elder의 장르화를 연상케 하는가 하면, 거리를 누비며 순간을 포착하는 모습은 콩스탕탱 기Constantin Guys로부터 연원한 풍속화에도 연결된다. 다만 그의 산보는 목적 없이 세계를 서성이는 산보객을 지향하기보다 ‘목적을 비켜난 연안의 감각’을 새긴다. 오늘의 미술가에게 주어진 유동적 조건은 그를 이동하게 만드는 배경으로 자리한다. 이는 연안을 누비며 세계의 편린들을 그러모으는 행위가 작가의 주관적 삶의 궤도를 벗어나지 않도록 한다. 세계는 작가의 호흡에 의해 번역된다. 인물들은 자신을 호명한 세계에 저항의 눈빛을 흘기지만, 세계를 파괴하기보다 경계의 테두리를 돈다. 피막의 인물들은 특정한 가치와 방향을 내걸지 않고, 차라리 실패와 불완전성을 바탕으로 거리 두기와 자조의 모습을 갖는다. 다만 거리 두기와 자조의 얼굴들은 성기고 엉성한 모습으로 차폐되지 않은 채 세계에 노출되고 공중에 투과된다. 세계로부터 침잠과 불화가 동시에 일어나는 얼굴들이 밀도와 무게를 달리하며 드러난다. 목적 없이 배회하는 세계의 구멍으로부터 살갗의 두께로 그려낸 풍경과 인물들은 덩굴처럼 엮이며 세계를 재-직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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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두산갤러리’ 전시 《본업-생활하는 예술가》에서 그는 “현실 상황을 극복해보고 싶다는 생각에 일부러 큰 작품에 도전해 봤다”고 포부를 밝힌다. 불안정한 생계와 작업실을 옮겨 다니는 영세한 상황에 대한 대응으로서 걸개그림을 택했다는 설명은, 매체를 전환한 결정이 작업적 전략일 뿐 아니라 당시 88세대, 청년세대로 호명된 작가의 생존기술에 결부된 일종의 자기 양식임을 성토한다. 이후 얼굴이 잘린 몸들, 눈을 흘기고 작은 불을 들고 불구덩이 속으로 뛰어들던 익명의 얼굴들은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관계 속에서 이름을 가진 구체적인 얼굴들- 동년배의 동료들로 나타난다. 관계로부터도 거리를 뒀던 작가 역시 사회구성원으로서 그들과 다르지 않음을 인정하고 연대를 보이는 것일까.
이번 전시에서는 수성페인트와 젯소로부터 과슈로 질료를 다시금 전환하고 제 회화적 형상에 무게를 싣는다. 화면 속 얼굴들은 실재하는 이름과 삶의 등고선을 가진 개인이다. 묘사의 심도가 높아진 인물들로부터 시작되는 세계의 풍경들은 야외보다는 실내 공간에 어울린다. 여기에 작가는 명암이 가미된 일상의 풍경을 색이 강조된 평면의 화면에 대치시켜놓는다. 이는 상황의 몰입을 막으며, 서사를 갖는 삼차원 세계가 플랫한 세계 위에 얼마든지 노출되고 개입될 수 있음을 시사함으로써 동시대의 다양한 시공간적 결을 살피도록 한다.
피막 위에 그려진 타인의 구체적인 얼굴은 이어지는 작업들이 구체적인 삶들이 교차하는 세계의 단면임을, 피막들이 구축하는 하나의 세계임을 예고한다. 관객은 걸개에 닿지 않으려 느슨한 긴장을 놓지 않는 가운데 등신대보다 크게 그려진 인물들의 시선 아래 전시공간을 서성일 터, 일련의 행위는 거리를 확보하며 친밀함을 유지하는 특정 공동체로부터 거시적 세계를 연결함으로써 작업의 덩치를 키우려는 시도로 보인다.
개별적인 인물들로 시작하는 전시는 이내 인물들의 행동들로 손과 발을 엮고, 몸과 세계를 교차시키는가 하면, 집단과 대중운동으로 확장하며 도시의 풍경을 그린다. 다만 바깥을 향한 인물들의 응시가 관객을 공동체에 초대하는지, 관객의 참여를 가로막으며 시선의 긴장을 놓지 않는지 속단할 수 없다. 정면을 향한 인물들의 응시는 초대의 손짓이자 벽이 되기도 하기에. 후자의 경우, 타인에 대한 조건 없는 환대는 우정의 사적인 테두리로, 선택적 관계로 가르마 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질문을 피할 수 없다. 전시 제목 《당신을 위해 준비했습니다》를 상기한다면 ‘당신’은 자리 없는 외부의 이들, 시공간을 갖지 못한 이들을 향한 무조건적 환대인지, 당신에게 인정 관계를 재차 확인함으로써 자기 자리를 확보하려는 내부적 공동체의 동료들을 향하는 것인지, 그도 아니라면 자리를 내어주며 한계를 넓혀가는 관계의 제한적 윤리를 말하는 것인지 명징하게 판단할 수 없다. 특정 인물들의 구체적인 면면이 하나의 기호로 포박되는 우려 속에서도 저들을 둘러싼 세계의 명암이 어떻게 관계의 관성을 이탈할지는 전시 이후에도 비평들이 있을 것이다.
걸개는 시야를 압도하지만, 한 겹의 천은 허공에 매달려 있다. 논리를 따른다면 천 그림은 자신의 취약한 처지를 드러내지만, 과장된 사이즈는 이에 대한 치기 어린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이동하며 접었다 폈다를 반복하며 닳고 낡아버리는 감가상각의 작업은 필패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동시에 보여준다. 작가는 세계에 나부끼면서 의미의 질서에 포섭되지만, 그 속에서 꿈틀거리며 선을 그어내고 이를 헤집어놓고 재조합하기도 한다. 공적 세계와 사적 주관성 사이 코믹과 결기가 교차하는 사이-공간은 굿즈와 콜라보로 수행되거나 공적 공간에 불화를 일으키며 일시적으로 풍경을 재구성한다.
이우성 작가의 걸개그림은 세계의 무게를 속세의 차원으로 휘발시킨다. 거리를 두고 이질감과 불화를 기록하는 과정은 타동적으로 보이지만, 세계를 독해하기 위한 적극적인 태세전환이기도 하다. 불안정을 동력으로 삼아 대상을 부여잡고 세계를 좇는 그의 작업은, 이제 취약한 형상들을 집적하며 구조를 만들고, 세계를 되비춘다. 엉성한 모습을 숨기지 않으며 지형지물에 맞게 크기와 용도를 조절하는 걸개의 건축술은, 불안정하게 나부끼는 천 조각들이 일정한 방향 없이 서로 맞대고 엉겨 붙고 불화하고 분리하기를 반복하는 공동체의 다른 얼굴이다. 피막들이 구성하는 세계는 바깥에 취약하지만, 동시에 세계에 열려있다.
3.불과 얼굴
황윤중 (자유기고가)
1.
한동안 그는 불길이 등장하는 장면을 주로 그렸다. 활활 타오르는 걷잡을 수 없이 큰불, 창백하고 몽환적인 불길(<도망 가는 사람들>(2011)), 물가를 뒤덮은 불(<가능한>(2012)), 심지어 화면에 직접 불이 등장하지 않아도 붉은빛에 물든 인물들의 광기와 폭력성을 통해 그의 그림들에서는 불이 감지되곤 했다(<우리는 그저 행복해지기를 원한다>(2011)).
한편 이 시기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 가운데 그 누구도 불길을 진압하려 하지 않는다(<붉은 방>(2011)). 오히려 어떤 인물은 불을 지르고 도망치는 방화범으로 보인다(<도망>(2012)). 또 어떤 경우엔 인물은 사실 같은 화면에 등장하는 불길과 동화되어 있기도 하다(<우리는 그저 행복해지기를 원한다>(2011)). 불길과 인물들은 모두 자기 주변으로 무차별적으로 번지는 열기를 공유하기도 한다.
따라서 ‘타오르는 불길’과 그에 ‘무관심한 인물들’로 구성된 그의 화면 속 세계에서는 저 불길이 결코 잠들거나 사그라들지 않으리라고 예감하게 된다. 그림은 현재의 장면에 멈춰 있지만, 그 안에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는 불길들은 그려진 시점 이후의 장면까지 상상하도록 만든다. 이후의 어느 시점에 이르면 ‘방치된 불길’은 화면 속 공간 모두를 불태우게 될 것이다. 그의 그림은 이러한 불의 운동성과 불을 방치하는 인물들의 태도가 합쳐지며 장면이 함축하는 ‘시간의 폭’을 미래를 향해 넓히고 확장시킨다. 그의 그림은 그려진 현재와 그려지지 않은 미래의 두 가지 시간성이 잠재적으로 공존하면서 파괴적 운동에 휩싸인다. 그리고 방치된 불길의 운동을 통해 장면이 지닌 시간의 폭이 확장되면서 그 장면이 촉발하는 ‘불안감’ 역시 증폭된다.
특히 <붉은 방>에 이르면 불안의 감각은 극에 달한다. 극도의 불안의 감각 속에서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이 그림에서 한 방 안에 가득 찬 여러 인물들은 아무런 중심점 없이 서로에게 무신경한 채 통일되지 않은 각자만의 알 수 없는 제스처와 행동을 하며 현기증이 날 정도의 어지러움과 산만함을 유발한다. 동시에 그중 한 명의 손에 들린 화염병과 창문 밖으로 타오르고 있는 불꽃까지 등장해 화면 속 공간이 곧 불길에 휩싸여 폭발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긴장감을 자아내며 예의 시간 감각을 마비시키는 극도의 불안감을 촉발한다.
이처럼 불길이 등장하는 그의 그림들은 해소되지 않는 긴장감이 꿈틀거리는 ‘불안’의 장면들이었다.
2.
한동안 그는 불이 나오는 장면은 거의 그리지 않았다. 수년이 지나 불이 다시 등장했다. 이전과는 사뭇 달라진 불이.
최근 불길이 등장하는 그의 작업들에서는 이전에 없던 새로운 유형의 장면들이 나타난다. 특히 불길에 맞서려는 듯 네 명의 청년이 힘을 합쳐 나무를 밀어서 쓰러트리고자 하는 그림이 있다(<이 나무를 쓰러트리면 – 빠지지지직 직 쾅쾅>(2017)). 여기서 인물들은 아직 불이 옮겨붙지 않은 화면의 작은 한구석만이라도 지켜내려는 듯 그들의 힘으로는 쓰러트릴 수 없을 것 같은 커다란 나무를 힘껏 밀고 있다. 불이 등장하는 그의 그림 가운데 처음으로 인물들이 불길에 맞서는 행위를 한다. 이전에 그의 화면에 등장한 인물들이 서로에게 무신경하고 산만하며 비통일적으로 한 공간 속에 자리하고 있었다면 여기서는 그와 대조적으로 서로 합심하고 협동하며 통일된 행동을 보인다.
불을 대하는 인물의 태도상의 차이뿐 아니라 불을 묘사하는 방식도 변화했다. 마치 색종이를 오려 붙인 것처럼 평면적이고 뚜렷한 윤곽선을 지닌 불꽃은 이전만큼 파괴적이거나 위협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화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심지어 일부의 불꽃에는 장난스럽게 눈, 코, 입이 그려져 있어 귀여움까지 자아낸다. 이제 그는 불꽃에 장난을 친다. 타오르는 ‘불과의 거리 두기’가 가능해진 것이다.
이 그림에서 보이는 일종의 ‘극복의 제스처’는 다른 그림에서도 이어진다. 무언가의 벌어지거나 찢어진 틈 사이로 쏟아져 나오는 물줄기를 막으려고 시도하는 두 손을 그린 <당신을 위해 준비했습니다>(2017), 그리고 한 사내가 가슴에 품은 달밤의 전원 풍경을 무언가로부터 지켜내고 보호하려는 것처럼 방망이를 붙잡고 있는 <오늘밤 많은 것이 결정된다>(2017). 과연 저 나무를 쓰러트릴 수 있을지, 저 물줄기를 막을 수 있을지, 저 달밤을 지켜낼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인물들은 어떤 위기 상황에 대한 극복의 제스처를 시도한다.
이전의 그의 그림 속 인물들은 불로부터 도망치거나 위협을 당하기도 하다가도 어느 순간 그들 자신이 불이 되어버리기도 한 것 같았다. 이전의 불은 인물들을 잠식하고 집어삼키고 전염시키는 ‘불안의 불’이었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화면 전반을 압도하고 지배하는 통제 불능의 불길은 보이지 않는다.
이제는 불에 눈, 코, 입을 그려 넣는 장난을 치기도 하고 불에 맞서는 인물들도 등장한다. 또 불꽃은 “당신”이란 문자와 결합하여 누군가를 부르는 시각적 호명의 수단(<늘 생각하고 있습니다>(2017))이 되고, 마술사의 마법처럼 손바닥 위에서도 피어난다(<당신을 위해 준비했습니다>(2017)). 이제 불은 자신이 원하는 다양한 효과를 발생시키기 위한 재료가 되었다.
불 앓이는 끝났다. 이제 그는 불을 다스린다. 불안 앓이도 끝났다. 그는 이제 불안을 다스린다. 이제 그의 그림들은 그의 초기 불안의 시기의 장면들 만큼 보는 이를 긴장시키고 동요시키지는 않는다. 초현실적인 광기와 불안과 폭력의 스릴러는 이제 그의 화면에서 사라졌다. 그는 불안과 동요를 완전히 지우고 해소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자신을 그리고 화면을 집어삼키지 않도록 다스리고 묶는 법을 익힌 듯하다.
3.
더 이상 그의 눈은 걷잡을 수 없이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불안의 불꽃을 바라보지 않는다. 이제 그는 조용하지만 은은하게 반짝이는 ‘온화한 빛’을 바라본다. 그것은 눈을 찌르는 강렬한 빛이 아니다. 보는 이를 압도하고 사로잡는 화려한 빛도 아니다. 충분히 지그시 바라볼 수 있는 온도의 은은한 반짝임. 그것이 지금의 그가 주목하는 종류의 빛이다. 우리의 눈을 멀게 하고 살갗을 태우거나 풍경을 압도하는 과시적인 빛이 아니라 그 빛을 매개로 상대와 주변을 볼 수 있도록 돕는 그런 빛 말이다.
그리고 이 온화한 빛으로 그는 평범하고 일상적인 장면들과 주변인들의 얼굴을 비추며 그 순간들에 은은한 반짝임의 실루엣을 입혀준다. 때로는 수박을 나눠 먹거나 손목에 실을 묶어주는 장면을 물결에 반짝이는 노을빛으로 감싸고(<당신을 만나기 위해 먼 길을 돌아서 왔습니다. 여기서 같이 나눠 먹읍시다.>(2017), <아름다운 노을입니다>(2017)), 투명한 소주잔의 반짝임으로 값싼 플라스틱 용기에 담긴 오이 안주와 일회용 나무젓가락으로 이뤄진 아주 단출한 술상마저 빛낸다(<그날 어디에 계셨나요?>(2017)). 한편 무채색의 탁한 회색빛 빌딩 숲을 배경으로 이뤄진 시위 현장을 기록한 그림에서는 거리 위의 사람들을 직접적으로 빛으로 묘사하며 화면 위로 반짝이는 밤하늘의 별빛과 동등한 지위를 그들에게 부여한다 (<빛나는, 거리 위의 사람들>(2017)).
또한, 이제 그는 누군가의 이름을 직접 사용한 제목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자신의 친구들과 지인들로 보이는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특정인의 얼굴’을 화면 위에 주요 소재로 등장시킨다. 그의 화면에서 반짝이는 것은 그의 지인들이다. 어떤 대단하고 위대한 업적을 이뤄낸 위인이 아니라 동시대를 함께 살아가고 있는 평범한 사람들에게서 그는 이 반짝임을 본다. 그의 시선은 자신의 귀한 화면을 주변 지인들에게 내어주며 그들의 존재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주인공으로 여긴다.
그의 그림은 일종의 '반짝 렌즈'다. 지극히 평범한 순간과 장면들에 반짝이는 실루엣을 입혀주고 바로 내 주변 사람들의 얼굴과 표정을 다시금 애정 어린 시선으로 흐뭇하게 바라보도록 만들어주는 그런 힘과 효과를 지닌 렌즈. 그의 그림은 또는 그의 렌즈는 압도적이고 강렬하고 화려한 장면들이나 세상을 시끌벅적하게 만드는 유명인들에게나 주로 향해 있던 우리의 시선의 방향을 잠시나마 주변의 얼굴들과 일상적인 것들에 돌려주고 그것들을 온화한 빛으로 감싸며 은은히 반짝이도록 만들어줄 것이다.
걸개그림으로 제작된 그의 그림들이 거리로 나가 더 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그들의 눈에 이 렌즈가 씌워지길 바란다. 그리하여 더 많은 당신들이 거리에 걸릴 그의 그림을 통해 각자의 당신들을 떠올리게 되고 결국은 무수히 많은 또 다른 당신들의 얼굴로 확장되는 힘을 발휘하길.
이 렌즈가 제대로 기능한다면, 즉 일상의 순간을 반짝이게 만들고 주변인들을 순간이나마 주인공으로 만들어내는 효과를 일으킨다면 그의 그림은 유효하며 유의미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1983년 서울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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