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포스터
조선시대 문인들이 즐겨 그리던 사군자의 현대적 의미를 짚어보는 전시이다.
자기만의 서체를 개발하고 연마하여 그 기반으로 글을 쓰고자 하는 문인들의 다양한 운필법을 익히기 위한 수단으로써 응용될 수 있는 요소가 바로 이 사군자 그림에 담겨있다. 그러므로 옛적의 고리타분한 형식의 답습이 아닌 나의 정체성을 서체로 찾아내고 싶어하던 진정한 예인들의 영원한 관문일 것이다. 아무리 첨단의 매체가 발달한다 하여도 자아 정체성과 복제되지 않는 자아의 멋을 아는 사람이라면 이 사군자의 필요성에 공감할 것이다 사계절 또한 그렇다 매년 반복되듯이 찾아오는 것 같지만 모두에게 각각 새로운 사계절이 아닐 수 없다.
점차 현대사회 속에 매몰되어 가는 인간의 자아 정체성에 대한 잔잔한 외침을 각각의 작가들에게서 들어본다.
매화를 봄의 전령이라 했던가? 매서운 겨울 바람을 뚫고 피어나는 매화의 매력을 고귀한 첫발을 내딛는 군자에 비유함은 어쩌면 당연한 비유일 것이다. 남들이 꽃피울 때 쉽게 피어지는 꽃이 아닌 홀로 억겁의 시간을 이겨낸 마냥 찰나의 순간을 봄으로 맞이하는 오윤화 작가의 독특한 매화도.
선미 작가는 강렬하면서도 처절한 추사(秋史) 김정희의 불이선란(不二禪蘭)화를 오마주하여 난초화를 재현하고 있다. 일명 부작란도(不作蘭圖)라 하여 ‘난초를 그리지 않은 난초그림’이라 함은 난초화가 서체와 일체화되어 난초화인지 서체인지 알 수 없게 된 추사체의 극찬이라 할 수 있겠다. 그리지 않는 절제된 칼날로 한여름의 쨍한 햇살처럼 허공을 뚫고 지나가는 것을 붓끝을 버리고 오로지 종이로써 빛에 의해 그 존재를 드러나게 한 선미 작가의 난초는 그야말로 추사의 부작란도를 꿰뚫어 추사의 의도를 현대화한 작업의 또 하나의 극치라 할 수 있겠다.
국화를 ‘sublime’ 즉 숭고함으로 이름 짓고 작업하는 윤정원 작가는 국화가 또 하나의 군자로써 나타냄이 무엇인지 현대적으로 극명하게 작업화해서 보여주고 있다. 독일의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의 ‘판단력 비판’의 [숭고의 장]에서 그 숭고함의 표현을 빌려 ‘부정적인 경험, 충격, 봉쇄, 죽음과 협박의 순간들을 통해 심리적인 만족을 느끼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어두운 미(美)’로써 숭고함을 얘기하고 있다. 화면 가득 채워진 윤정원의 국화 또는 욕망으로 태워지다 만 흔적의 국화 꽃잎의 잔재들은 윤정원 작가가 인간의 유한한 절망의 인생을 위로하기 위해 고결하고 숭고한 국화를 인간에게 바치는 인간의 심리를 들춰내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인지 가을을 대표하는 국화의 숭고함이 더 강하게 다가온다.
가장 절개 있고 한겨울에도 푸르름을 잃지 않고 꼿꼿이 서있는 대나무의 기상은 사군자 중 겨울을 대변하는 군자 대나무화이다. 대나무를 은박지 위에 어느 누구의 대나무 그림보다도 실감나게 그려내고 있는 유미란 작가의 대나무도. 은빛 설원을 농락하기라도 하듯 펼쳐지는 수많은 대나무의 기둥과 나뭇잎들은 현란한 빛의 반사를 뚫고 나와 허공을 간지르고 있다. 자하(紫霞) 신위의 묵죽도가 흰 종이 위를 검은 묵이 현란하게 가로지르는 것과 비견하여도 부족함이 없다.
유미란 작가의 대나무는 묘사된 것이 아니라 자연 그대로의 대나무 기상을 닮은 흩뿌림과 흡사하다.
그림은 오래도록 그림으로 머물지 않고 언어의 수단이자 각기 다른 서체처럼 독창적인 모습을 갖춘다는 의미에서 사군자의 위치가 그리 간단치 않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답습이 아닌 독창적인 개개인의 현현이 사군자를 통해 드러나기를, 새해를 맞이한 모든 이들의 염원이 매한가지가 아님을, 꽃보다 아름다운 꽃들이 되어지기를 바램이 ‘사계군자’를 통해 소망하는 전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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