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세열: 은유의 섬 Island of Metaphors
2021.04.08 ▶ 2021.05.05
2021.04.08 ▶ 2021.05.05
오세열
무제 2021 캔버스에 혼합매체 112 x 145.5 cm
오세열
무제 2020 캔버스에 혼합매체 33.5 x 44 cm
오세열
무제 2020 캔버스에 혼합매체 130 x 97 cm
오세열
무제 2017 캔버스에 혼합매체 117 x 91 cm
오세열 – 회화이자 사물인 표면
화면
화면의 피부는 매우 납작하지만, 그 위로 물감과 사물이 생명체처럼 서식한다. 다양한 작가만의 표식들이 풀이나 돌처럼 흩어져있다. 그것들이 희한하게 어우러져 매혹적인 작품을 일군다. 그림과 콜라주, 오브제와 조각적 행위가 섞인 상태로, 낙서와 장난 같은 것들이 마음 가는 대로 표면에서 뒹군다. 우연성과 자발성에 기댄 이 조형적 행위는 연쇄적인 고리 안에서 순환한다. 숫자들은 연속적으로, 반복해서 적혀있고 그것 자체로 자족적인 독해될 수 없는 선, 기호들이 곳곳에 출몰한다. 그 사이로 꽃과 새 등의 형상을 거느린 콜라주가 얹혀있다. 그 주변에는 작은 일상의 사물들이 은밀하게, 조심스레 안착되었다. 그림과 콜라주, 오브제들은 표면 위에서 차이를 무화시키면서 공존한다. 이미 배경이 되는 바탕 화면 자체가 견고하고 풍부한 물성의 흔적, 아득한 시간과 풍화의 과정을 농밀하게 저장하면서 거의 조각에 가까운 오브제화된 피부를 회임하고 있기에 그 위에 올라간 모든 것들은 밑바닥에서 자연스레 베어 올라오는, 불가피하게 밀려나온 것으로 보인다. 표면과 분리되지 않는 그림이자 바탕을 지지대 삼아 그것과 내용적, 형식적 연관성의 공모관계를 부단히 조성하는, 일구어가는 그림이다.
오세열은 캔버스 혹은 캔버스 천을 뒤집어 틀에 고정하고 나무 합판을 덧대 단단한 지지대로서의 바탕 면을 마련한다. 표면은 균질하고 두툼한 물감의 층으로 덮여 있는데 무수한 붓질, 수많은 공정이 축적되어 있기에 아득한 시간의 이력을 간직한 벽면처럼 치밀하다. 사각형의 틀 안에서 이루어지는 작업으로서 회화의 평면성을 강조하는 한편 바닥면이 드러나도록 표면을 부분적으로 벗겨 내거나 사각형 안에 사각형을 그려 넣거나 화면을 양분하는 꼴을 갖춘다. 그로 인해 화면은 부단히 실제 납작한 칠판이나 노트와 동일시되거나 단단한 벽면 그 자체가 되기도 한다.
주어진 사각의 틀은 대부분 단색으로 마감되어 있거나 두 면으로 분할되어 있다. 또는 가로선이 그어진 노트의 행간을 연상시키거나 칠판 자체인 것처럼 위장되어 있다. 따라서 화면은 캔버스이자 공책, 흑판 등으로 몸을 바꾸면서 시선을 교란시킨다. 동시에 그 화면은 무엇인가가 그려지거나 쓰여 지고 실제로 오브제가 부착되거나 선반이 설치되어 실제 사물이 자리하기도 한다. 따라서 이 화면은 단지 회화적인 표면으로 국한되지 않는다. 모든 것이 가능한 공간이고 이질적인 것들을 죄다 허용해 주는 영역이 된다. 화면은 그 모든 것들이 무성하게 피어나는 대지와도 같다.
오세열은 바탕 면을 단색조의 물감으로 치밀하고 견고하게 마감한다. 그것은 바탕을 색으로 채우는 일만은 아니라서 작가만의 신체적 리듬과 호흡, 신경, 감각, 붓질의 탄력 등으로 조율된 모종의 힘으로 메워나간다. 무엇보다도 쫀득하고 조밀하며 촉각적이자 형언하기 어려운 미묘한 감각을 동반하는 표면을 만드는 일이다. 이 피부가 그림의 핵심적인 근간을 이룬다. 그것은 유채의 번들거림을 지우고 무광의 것으로 만드는 한편 자신만의 독특한 질감을 이루는 일, 이를 성형하는 전략이다. 일종의 물감의 오브제화이기도 하다. 단색주의 회화 내지 색면추상 회화에서 엿볼 수 있는 균질하고 물성적인 표면의 맛을 만날 수도 있다. 로버트 라이먼이나 애그니스 마틴의 그림에서 접하는 물감 자체의 특성과 물질성과 느낌만을 순수하게 실험하는 것, 그리고 그것이 각기 다른 캔버스 표면에 반응하는 방식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는 것과의 유사성이 있다. 동시에 그림의 표면이 망막에 일으키는 반응이 진정한 주제인 그림들과의 연관성도 강하다. 비교적 균질하게 칠해나간 화면은 두드러진 물감의 물성으로 가득 채워져 있기에 그 피부를 유심히 보면 내부는 다채로운 붓질들이 두드러지게 얹혀있다. 외형적으로는 단색조의 화면이지만 그 안은 상당히 풍성한 표현적 변화를 동반하고 있는 붓질과 두터운 마티에르로 정교하게 구성되고 있다. 부분적으로는 가로, 세로 붓 자국들이 교차하거나 서로 뭉개지면서 두텁게 바른 물감이 화면을 채우고, 가운데로 갈수록 이런 붓 자국들이 조밀해지며 색채가 강해지는 필립 거스톤의 1950년대 페인팅을 연상시키는 회화들도 있다. 이른바 '움직이는 베일'과도 같은 표면과도 같은 효과를 지닌 화면이자 그로 인해 화면, 그림은 흡사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보는 이들을 자극한다. 이처럼 오세열의 바탕 화면 자체가 이미 많은 사연과 풍부한 표정, 깊은 시간을 지닌 피부를 저장하고 있다.
선
오세열 그림은 단색으로 두툼하게 도포된 화면 위에 무심하게 그은 다소 희한한 선들이 종횡으로 산포되는 특징을 지닌다. 특정 형상의 이미지가 출현하기도 하지만 화면 곳곳에는 마치 풀처럼 자라나고 정처 없이 떠도는 바람 같기도 하고 낙서와도 같은 선들이 묘하게 서식한다. 그것은 무목적인 것들, 이유를 알기 어려운 것들, 차마 가시화할 수 없는 것들을 애써 표현하려는 시도에 가깝다. 목적론적이고 합리적인 그림의 이유를 뭉개는 선이자 그것을 휘발시키는 가벼운 선의 비상이다. 선들은 그런 율동과 비약으로 춤춘다. 표현과 반표현의 경계에서 꼼지락거리는, 의도를 지우고 목적을 망실하고 그것 자체로 자족하는 선들의 향연과도 같다. 그래서 재현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무모한 항거의 표시와도 같은 이 선들은 가장 원초적이고 단순하고 장식적인 것으로 빈 공간, 여백을 채워나가려는 다소 무모한 본능에서 비롯된 선들이기도 해서 그저 짧고 간결하게 떠돌고 소용돌이친다. 온전한 형상과 문장을 짓거나 지시하지 못하고 무너지거나 가닿지 못해 절망한 것들의 당당한 약동이 여기저기 새싹처럼 움튼다. 그저 목적 없이, 별다른 의도 없이 그어진 어떤 매력적인 선이 결국 회화가 된다.
초서의 어느 한 부분 같기도 하고 도자기 표면에 시문 된 초화 문양 일부를 추출해 온 것이자 수결(手決)의 한 부위를 연상시키는 것들이기도 하다. 휘갈겨 쓴 서체의 흔적이기도 하다. 하여간 그런 것을 닮은 선이다. 이 모호한 선들은 마치 새의 발자국 같기도 하고 땅바닥에 찍힌 여러 흔적을 또한 암시한다. 일종의 기호나 부호와도 같고 또한 선 그 자체로 단순하게 자리한 것들이다. 이 선들은 우선 캔버스의 사각형 틀을 의식시키는 차원에서 밑변과 일치되게 가로선이 그어지면서 수평을 만들기도 해서 공책에 인쇄된 선 그 자체가 되기도 한다. 끊어질 듯 이어지고 미세한 차이를 동반하면서 그어진 선들과 함께 곳곳에 작고 앙증맞게 흩어져 부유하는 여러 선들이 실제와 환영의 구분을 넘나든다.
좀 더 적극적으로 출현하는 선들은 소용돌이치듯 원형을 이루고 그려진 선이다. 이는 마치 사이 톰블리가 크레용을 이용해 끼적이던 선 등을 연상시킨다. 타원형을 이루며 빠른 속도로 진행되는 선 혹은 수평으로 길게 자리하며 무심하게 죽죽 그어나간 선들로 이루어진 그림은 매우 개인적인 행위로서 그림 안에서 특정 분위기를 전달하고 있다. 또한 제각기 다른 선들은 특정한 형상, 이미지 못지않게 다양한 연상을 불러일으키고 여러 감정과 기억을 자극하는 매개인 동시에 가장 본능적이고 원초적인 그림의 욕망을 상기시켜주고 충족시킨다. 사실 이 작고 단순한, 소소한 선의 감각적인 운용만으로도 그림은 충분해 보인다.
오브제
화면에 등장하는 이미지는 어눌하고 해학적이며 작가에 의해 재구성된 인물, 그리고 꽃과 일상의 기물, 문자와 숫자 등이다. 이것들은 그려지거나, 실제 오브제들을 화면에 부착하는 방식으로 연출된다. 그려지고 쓰이고 접속되어 있다. 실제와 가상이 혼거한다. 그림과 실재가 동시에 한 공간에서 생을 영위한다. 그림 역시 캔버스, 물감 등의 오브제로 구성된다. 그것 자체가 특별한 물질의 연출이다. 이 물질성의 강조는 감각적으로 직접 지각되는 작품의 특성이 내용을 능가하고 이미지와 관객 사이의 거리를 좁히는 역할을 한다.
오세열은 물감과 붓질로 충분히 성형된 추상적이고 물성적, 촉각적인 화면 위에 인간의 형상을 올려놓는다. 정면이나 측면의 이 상은 외눈박이에 단출한 마감으로 성형되어 적막한 바탕 면을 배경으로 고립되듯 출현하고 있다. 의도적으로 아이들의 그림처럼 거칠고 간결하게, 아무렇게나 그리듯이 혹은 자연발생적인 형태를 따르려 했고 오염되지 않은 지각을 옹호하려 시도한 것으로 보인다. 장 뒤뷔페의 '아르 브뤼' 스타일과도 같은, 그렇지만 이를 훨씬 세련되게 조율하는 선에서 마감하고 있다. 물감의 성질로 충분히 채워진 화면 위에 인간의 형상뿐만 아니라 문자나 숫자 혹은 모호한 선들을 올려놓았다. 이 그리기, 쓰기는 주어진 캔버스 자체를 마치 벽면이나 칠판, 노트와 동일하게 다루는 동시에 그 장소, 공간에 이미 누군가 기입했던 낙서나 흔적을 자연스레 연상시킨다. 일상의 공간에 자리한 이미지 흔적을 절취하고 차용한 그림에 해당하니 이것 역시 레디메이드 전략에 기반한다. 그러나 보다 더 적극적으로 작가는 일상에서 사용되는 사물을 화면에 직접 끌어들인다. 인쇄물, 단추, 숟가락, 플라스틱 기물 등이 화면 안에 조심스레 안착되어 숨을 쉰다. 그것은 그려진 그림과 애매하게 뒤섞여 있다. 여러 가지 일상 용품이 흥미로운 방식으로 화폭에 붙어나간다. 별 볼일 없는 것, 하찮은 것들이 새로운 존엄성을 부여받으며 등장한다. 그에 따라 이것은 순수 회화도, 순수 조각도 아닌 두 범주가 합쳐진 것이 되었다. 이른바 콤바인 페인팅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일상적인 사물을 긁어모아 끌어들임으로써 이미 그림이 화가의 머릿속의 논리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환경의 의미를 지닌다는 점을 환기시켜주기도 한다. 동시에 이는 콜라주의 확장에 해당하는 편이다. 그러나 이 모든 방법론은 철저하게 회화 안에서 이를 보조하고 긴장감 있게 맞물리는 선에서 추려진다.
나가는 글
오세열은 이미지와 물감의 질료성과 붓질 자체의 추상성, 그리고 문자와 숫자의 기입, 오브제의 부착 등의 복합적인 작업을 통해 상당히 풍부한 화면에 볼거리와 여러 감각을 연출해낸다. 어눌하고 해학적이며 지극히 자연스러운 그림의 경지를 펼쳐 보이지만 그것들은 상당히 노련하게 가공된, 매우 세련된 조형미로 버무려진 것이다. 미니멀리즘에 기반한 색면추상과 물성의 강조, 레디메이드 전략과 콜라주와 콤바인 페인팅 차용, 그리고 한국 전통미술의 자연주의 성향과 무작위적이고 우연적인 미학이 두루 숨 쉬고 있다. 그러나 오세열 그림의 근간은 무엇보다도 자신의 기억과 향수 속에 자리한 모종의 흔적을 이미지화하는 일인 듯하다. 그것은 사라진 것들, 온전히 재현되고 가시화할 수 없어서 그저 모호하고 애매하게 더듬어보고 머뭇거리듯이 끼적이고 긋고 칠하고 문질러 보는 일이자 아득한 시간의 층을 복기하듯 질료화 시켜 보는 일이다. 지난 시간의 모든 것을 머금고 있는 몸의 감각에 의지해 절박하게 밀고 나가는 것이다. ■ 박영택
1945년 서울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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