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순택: 검은 깃털
2022.06.22 ▶ 2022.07.17
2022.06.22 ▶ 2022.07.17
노순택
검은 깃털 #CGK1001 Shades of Furs #CGK1001 2016, 장기보존용 잉크젯 안료프린트 Archival inkjet pigment print, 108x162cm, 108x72cm, Ed. 1 of 9, 키갈리 Kigali
노순택
검은 깃털 #DAJ2201 Shades of Furs #DAJ2201 2020, 장기보존용 잉크젯 안료프린트 Archival inkjet pigment print, 81x54cm x2, Ed. 1 of 9, 남풍리 Nampung-ri
노순택
검은 깃털 #CIF1601 Shades of Furs #CIF1601 2018, 장기보존용 잉크젯 안료프린트 Archival inkjet pigment print, 162x108cm, Ed. 1 of 9, 바르샤바 Warsaw
노순택
감 #CHM1201 Black Persimmon #CHM1201 2017, 장기보존용 잉크젯 안료프린트 Archival inkjet pigment print, 54x81cm x2, Ed. 1 of 9, 삼송리 Samsong-ri
노순택
좋은 살인 #CGJ2401 reallyGood murder #CGJ2401 2016, 장기보존용 잉크젯 안료프린트 Archival inkjet pigment print, 162x108cm, Ed. 1 of 9, 오산 미공군기지. 전략폭격기 B1-B랜서...
노순택
좋은 살인 #BJK2209 reallyGood murder #BJK2209 2009, 장기보존용 잉크젯 안료프린트 Archival inkjet pigment print, 162x108cm x3, Ed. 4 of 5, 서울. F15 이글 Seoul. F15 Eagle
전시 주제
노순택의 ‘사진 매체 바라보기’ 그리고 그것에 기반을 둔 ‘스타일 탐구’
노순택은 동시대 한국 사회의 정치사회적 현장을 사진과 글로 진술해 왔다. 매스미디어가 구름처럼 몰려든(혹은 훑고 간) 현장에서 매스미디어가 보지 못하거나 보지 않는, 하지만 사태의 ‘느리지만 중요한 파악’을 위해 필요한 장면들을 독특한 미학적 형식의 사진으로 채집해 온 것이다. 그에 따르면 “사태의 정면만이 아니라, 뒷면과 옆면, 혹은 아랫면과 윗면을 더듬는 작업”이다. 노순택은 분단이라는 ‘과거사’에 집착하는 듯하지만, 실로 주목하는 건 과거사가 움직이고 있는 뻔뻔한 ‘현재’다. 그는 자주 말했다. “분단체제는 오작동으로 작동한다.” 노순택은 세 가지 고민을 따로, 사실은 뒤섞어가며 작업해 왔다. 첫째, 세계에 대한 고민. 이 사회는 왜 이 모양이며, 어떻게 작동하는가. 둘째, 매체를 향한 탐구. 사진은 무엇이며, 사진으로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은 무엇인가. 셋째, 자신을 향한 질문. 나는 왜 이 짓을 멈추지 못하고 헛발질 해대며 밀고 나가는가.
사진은 짧은 역사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류에 빠르게 흡수되었다. 작가는 오늘날 가장 유능한 시각매체로 꼽히는 사진에 대해 의심을 품어왔다. 특히 사회적 문제를 다루는 사진의 이면을 고민해 왔다. 아울러 사람들이 사진을 배우는 과정, 사진을 대하는 태도와 습관에도 각별한 관심을 품었다. 이번 학고재 전시를 통해 내보이는 〈검은 깃털〉연작은 노순택의 ‘매체 탐구’ 연장선상에 있다. 흔히 역광사진이라 부르기도 하고, 실루엣 사진이라고도 부르는 특정 스타일에 관한 가벼운 매달림을 보여준다. 더불어 말하려는 건 ‘잘 보이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없던 것은 아닌, 윤곽(검은)에 갇힌 세부(깃털)’다.
‘극단주의자의 화법’으로 표현된 한국 사회의 초상화
이번 전시는 2015년부터 2020년까지 작업한 〈검은 깃털〉연작을 중심으로 19점의 작품을 선보이는 자리다. 시각예술에서 ‘뻔한’ 스타일로 자리 잡은 ‘실루엣’을 탐구한다. 실루엣은 18세기 프랑스 재정 장관 ‘에띠앙 실루엣’의 이름에서 비롯됐다. 전쟁으로 궁핍해진 나라 곳간을 채우기 위해 강력한 긴축과 증세 정책을 폈던 그는 심지어 “그림의 재료는 검은 물감이면 모자람이 없고, 형상 또한 윤곽이면 충분하다”라는 궤변을 늘어놓았다. 그런 탓에 실루엣은 ‘안 좋은 것의 모든 것, 싸구려 비지떡’의 대명사로 통하기도 했다. 사진에서 실루엣은 흔히 ‘역광사진’으로 불리며, 역광은 사진촬영에 있어 가급적 피해야 할 조건으로 여겨진다. 세부를 뭉개는 탓에 사진을 망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급자 이상의 아마추어 사진가들에게 역광사진은 낭만적이고 매력적인 표현 방법으로 사랑받았다. 하지만 고급자들에게 역광사진의 표현기법은 뻔하고 진부한 것으로 여겨진다. 노순택은 역광사진을 바라보는 이런 시선의 태도와 변화에 흥미를 느껴왔다. 무언가를 보여주는 동시에 가릴 수밖에 없는 사진의 모순적 본성을 역광사진이라는 특정 스타일을 통해서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역광사진은 농담(濃淡)이 ‘거의’ 없다. 작가는 이를 ‘극단주의자의 화법’에 비유한다. 선과 악 사이의 모호함, 흑과 백 사이의 회색을 허용하지 않는 극단주의 화법이 환영받는 오늘의 한국 사회를 넌지시 은유한다. 이번 전시작들은 멀리서 보면 단지 흑과 백으로만 보인다. 윤곽으로만 보인다. 허나 다가가면 검다고도 희다고도 말하기 어려운 모호한 회색들이 보인다. 또렷한 삶조차도 다가서면 애매하고 모호하다. 명백해 보이는 갈등과 폭력의 세부에도 아찔한 회색이 있다. 윤곽에 갇혔다 해서, 어둠에 묻혔다 해서, 있던 게(세부) 없던 게 되는 것은 아니다.
■ 갤러리 학고재
검은 깃털
Shades of Furs
내 몸에 난 털들이 깃털이라면, 나는 더 가벼워질까. 깃털이라면 좋겠지만, 아니어도 슬퍼 말라 스스로를 타이른다.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끝내, 가벼워진 채로 흩어지고 말테니까.
시각매체 중 가벼움의 순위를 매긴다면 사진은 몇 위일까. 맨 앞이 아닐까. 빠르다. 게다가 경박하다. 더할 나위 없이 가볍다. 버튼 한 번 누르는 것으로 (아마도) 8할이 결정된다. 얇은 종이 위에, 두께라곤 찾아볼 수 없는 입자들이 표면에 달라붙어 명암과 형상을 이룬다. 회화의 발명가를 아는가. 조각은? 음악은? 문학은? 사진은 발명가와 발명 시점을 특정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매체다. 젊다. 발명되자마자 크게 환영받았다. 자신이나 가족의 초상을 소유하는 행위가 곧 계급의 반영이던 시대에 사진술은 회화와 비교할 수 없는 저렴함으로 빠르고 쉽게 이미지의 독점을 무너뜨렸다. 장삼이사도 귀족을 흉내 낼 수 있는 시대를 열었다.
하지만 사진술은 똑같은 이유로 비난 받았다. 화가의 손을 무력감에 떨게 했지만, 인간의 손으로 ‘창조’된 것이 아니라, 기계에 손을 빌려준 짓에 불과했다. 손은 인간정신의 반영일진대, 기계 따위에 얹혀가는 손이라니, 그 따위가 무엇이란 말인가.
시인이자 미술평론가였던 샤를 보들레르는 사진을 “산업적 광기”라 부르며 그것이 예술을 넘보려는 시도에 독설을 뱉었다. “사진이 자신의 동맹군이라 할 어리석은 대중의 힘을 빌려 예술의 자리를 차지하고, 결국 예술을 망칠 것”이라 경고했다. 그에게 사진은 “언감생심 예술을 넘볼 게 아니라, 예술과 과학의 겸손한 시녀”로 돌아가야만 하는, 주제파악이 필요한 도구였다. 그렇게만 된다면, 사진은 “기억의 아카이브에 들어가기를 희망하는 시간의 희생물들, 사멸해 갈 수밖에 없는 모든 소중한 것들, 망각 속으로 부서져 가는 모든 폐허들, 책들, 판각들, 원고들을 보존케 하는” 역사의 비서가 될 것이었다.
그랬던 보들레르도 사진기 앞에 다소곳이 앉아 렌즈를 응시했으니, 우리는 그를 “시간의 희생물”이라 불러야 할까, “사멸해 간 소중한 것”이라 불러야 할까. 보들레르의 얼굴은 보존되었다. 사진이라는 시녀에 의해 보존되었다. 덕분에 우리는, ‘나를 바라보는 보들레르’와 시공을 넘어 눈맞춤 할 수 있게 되었다. 그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사진술은 예술을 간보고, 깔보고, 심지어 예술 자신이 되었다. 회화를 변질시킴으로써, 새로운 회화사를 쓰게 했다. 과학과 산업과 예술의 경계를 무디게 했다. 이제 사진 없는 현대미술이 불가능할 정도가 되었으니, 이로써 예술을 망친 셈인가. 지금 당신은 밥숟가락 뜨는 횟수보다 사진기 단추 누르는 횟수가 더 많은 하루를 살고 있다. 대단한 낭비가 아닌가.
낭비를 걱정한 사람이 있었다.
사진이 발명되기 딱 80년 전, 루이 15세 통치시기 프랑스 재정장관에 임명된 그는 계속된 전쟁으로 궁핍해진 나라곳간을 채우기 위해 골몰했다. 두 가지 방법을 썼다. 하나는 증세였다. 단지 더 걷는 게 아니라, 별의 별 세금을 만들어냈다. 신선한 공기를 주신 국왕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내야 하는 ‘공기세’는 살아있다면 피할 수 없는 세금이었다. 오래 전 사라진 ‘창문세’의 부활도 모색했다. 또 하나는 긴축이었다. 극단적인 절약을 강조했다. 심지어 그림의 재료는 검은 물감 하나로, 형상은 윤곽이면 충분하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이름이 형식이 된 사람, 에띠앙 실루엣. 반년 만에 물러난 단명 장관이었으나 사람들은 그를, 그의 정신머리를 오래 기억했다. 실루엣이라는 이름은 ‘안 좋은 것의 모든 것, 싸구려 비지떡’의 대명사로 널리 쓰였다. 오늘날엔 ‘검은 윤곽’이나 ‘밝은 배경 앞 검은 그림자’의 조형스타일을 뜻하는 말로 통한다. 사진에서 실루엣은 ‘역광사진’으로도 불린다.
사진에서 ‘역광’은 가급적 피해야 할 조건처럼 여겨진다. 표준국어대사전에도 “역광은 물체의 상을 흐리게 하므로 가능한 피해 촬영하는 것이 좋다”고 안내되어 있다. 하지만 광원이 렌즈 축을 따라 직접 들어오지 않거나, 광원을 피사체 뒤로 가릴 수 있는 경우, 상의 윤곽은 뚜렷해진다. 이때 피사체의 세부는 그 안에 묻히고 갇힌다. 사람사진의 경우 중요한 세부는 얼굴과 표정인데, 역광사진은 그걸 가림으로써 누가 누군지 알 수 없게 한다. 누군지 알 수도 없는 사진을 대체 왜 찍는단 말인가. 고로 역광을 피하라는 ‘무난한 사진의 평범한 원칙’은 옳을 것이다.
전문가들은 세부를 섬세하게 표현하는 것이, 인화지가 담아낼 수 있는 어둠과 밝음의 스케일을 11단계로 나눈 ‘존 시스템’에 입각한 풍부한 계조의 사진을 만드는 것이, 당신이 추구해야 할 ‘파인아트 프린트의 정석’이라 말한다. ‘올바른 돌’은 이 얼마나 무거운가.
역광 사진엔 농담이 없다. 아니 농담만 있을 뿐, ‘농담 사이’가 없다. 흑백으로 몰아붙이다 회색을 버리는 우를 저지른다. 극단주의자의 화법일까. 극단주의를 경계해야 한다면서도 극단주의자들의 아무 말 대잔치에 환호하는 세상사의 풍경은 동서고금에 널려있다. 오늘 우리의 세계를 움직이는 질서가 아닌가. 어쩌다 우리는 극단주의에 매료되었을까. 뻔뻔하기 짝이 없는 극단주의의 매력과 마력은 연구대상이다. 그것에 빠져 괴물이 되지 않기 위해서도.
농담(濃淡) 없는 사진, 역광사진은 진부할까. 가끔은 질문이 대답이 된다.
광원을 향해 서고, 그 사이에 너를 두고, 너가 드리운 그늘에 나를 둔다.
셔터를 연다.
세부가 어둠에 묻혔다 해서, 세부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깃털이 윤곽에 갇혔다 해서, 무게가 달라진 것도 아니다.
■ 노순택
1971년 서울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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