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홍구: 무인도와 유인도 – 신안바다Ⅱ
2023.03.07 ▶ 2023.04.23
2023.03.07 ▶ 2023.04.23
전시 포스터
강홍구
만재도 1 피그먼트 프린트, 100x240cm, 2018
강홍구
구름과 바다 õ 위에 아크릴과 오브제, 148x438cm, 2023
강홍구
모래의 기억 캔버스에 디지털 프린트와 드로잉 꼴라주, 140x280cm, 2022
강홍구
무인도 035 디지털 사진 위에 아크릴, 39x55cm, 2022
강홍구
만재도 3 036 피그먼트 프린트, 140x200cm, 2020
강홍구
무인도 082 디지털 사진 위에 아크릴, 90x140cm, 2022
강홍구
무인도 084 디지털 사진 위에 아크릴, 68x100cm, 2022
강홍구
무인도 085 디지털 사진 위에 아크릴, 68x100cm, 2022
강홍구
어의도 1 016 피그먼트 프린트, 100x240cm, 2021
강홍구
신안 - 기록과 기억 05_22 õ, 사진 위에 혼합재료, 300x1329cm, 2022
기획의도
“무인도는 유인도의 과거이자 미래이다. 무인도들은 한때 유인도였다가 다시 무인도가 되기 때문이다. (중략) 유인도의 삶은 농업과 어업이 주축을 이룬다. 섬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논, 밭농사와 수산업, 양식업이 섞여 있다. (중략)
내 작업들은 이에 대한 조사 보고서는 아니다. 사진을 찍으러 다니면서 마주친 삶의 양상들을 담았을 뿐이다. 땅과 바다와 일체가 된 삶의 모습들이 자연스럽게 드러나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여겼다. (중략)
분명한 것은 그러는 동안 나는 신안을 체험하고 표현했으며 과정 자체가 의미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아마도 카메라와 붓을 들고 돌았던 17년의 시간과 신안 바다 모든 곳이 옛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는 여정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강홍구-
▪ 디지털 사진 1세대 대표작가 강홍구 개인전 개최
사비나미술관(관장 이명옥)은 2023년 첫 번째 기획전으로 강홍구 작가의 <무인도와 유인도-신안바다 2>를 개최한다. 강홍구는 한국 디지털 사진 1세대 작가로 디지털 사진 합성, 사진 위에 채색하거나 형상을 겹쳐 그리기, 회화적 구성으로 사진 이미지 변질시키기 등 사진매체의 활용과 변주를 통한 실험미학의 확장 가능성을 모색해왔다. 이번 전시는 전남 신안군 어의도에서 태어나고 자란 작가가 중년에 접어든 2005년부터 17년간 고향 신안을 오가며 탐색한 결과물이 총망라됐다. 신안에는 1025개의 섬이 있는데 그 중 유인도는 72곳, 953곳은 무인도다. 작가가 신안의 무인도와 유인도에서 발견한 삶과 죽음의 풍경 사진, 사라져가는 것들의 기억과 환상이 혼재된 합성사진, 파도에 밀려온 것들을 채집한 오브제를 매달아 완성한 회화, 26점의 작품을 이어 붙이고 실로 꿰매 완성한 약 14미터 길이의 꼴라주, 만재도의 풍경과 파도 소리를 기록한 영상 등 총 78점의 작품을 선보인다.
▪ 익숙한 낯설음에서 시작한 17년간 신안의 기록
이번 전시에 소개되는 <신안> 연작은 변화와 연속성을 동반한 장소에 대한 기록임과 동시에 작가의 어린 시절 경험으로 각인된 고향의 색, 냄새, 소리, 촉감과 같은 개인적인 기억과 추억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인식하는 여정의 의미를 갖는다. 작가가 <신안> 연작에 착수한 계기는 그가 경험한 '익숙한 낯설음'에서 비롯됐다. 2005년 신안을 오랜만에 방문한 작가는 신안에 대한 유년기의 기억과 눈앞에 마주친 현실풍경 사이에 엄청난 틈이 있음을 실감하고 익숙한 낯설음에 대한 탐구를 시작하게 된다. 작가는 그 틈을 “기시감을 지난 미시감”으로 정의한다. 이후 작가는 신안군 출신으로 갖게 되는 내부자의 시선과 동시에 오랜 시간 신안을 떠나있어 갖게 된 외부자의 시선으로 섬을 관찰한다. 가거도, 만재도, 흑산도, 홍도, 안좌도와 같은 사람이 살고 있는 섬의 변화하는 풍경과 세월의 흐름에도 변하지 않은 바다, 하늘, 논밭, 항구, 학교, 시장 등 섬사람들의 삶의 터전에서 마주친 다양한 모습들을 유인도 연작에 담아낸다.
▪ 무인도의 환상과 기억을 담은 사진 드로잉 연작 46점 최초로 선보여
무인도 연작은 작가의 개인적인 환상과 욕망, 몽상과 꿈이 투영된 결과물들로 구렁이섬, 옥섬, 심피, 샛섬, 할미섬 등 무인도와 바위에 대한 기억에서 시작된다. 어린 시절 작가에게 무인도는 눈앞의 현실이면서 환상과 신비의 대상이기도 했다. 작가는 신안을 다니며 찍은 무인도와 바위섬 사진 위에 어린 시절 무인도를 바라보며 가졌던 꿈과 상상, 전설의 기억을 떠올리며 횃불, 구명보트, 피아노, 거대한 야생화 등 무인도에 실제 하지 않는 존재들을 회화로 그려낸다. 이런 이질적이고 낯선 존재들은 닿을 수 없는 꿈의 장소이자 완벽과 고립, 환상의 공간으로서 현실의 섬과는 구별되는 무인도를 만들어낸다.
▪ 드로잉꼴라주와 오브제 설치, 영상 등 다양한 실험 시도
전시에는 작가의 개인적인 기억과 환상을 드로잉, 오브제 설치 등으로 담아낸 드로잉 꼴라주도 선보인다. 작품에 설치된 오브제들은 작가가 신안 촬영 중 신안 바닷가에서 가져온 것들로 어린 시절 태풍 후 바닷가로 밀려온 물건들을 확인하던 작가의 기억에서 시작되었다. 오브제들은 바닷가로 밀려오며 바다를 오염시키는 존재인 동시에 바람과 파도에 닳고 씻겨 낯선 형태로 바뀌며 아름다움까지 느껴지게 하는 아이러니함을 가진다. 이 아이러니함은 고향에 대한 개인적인 기억과 다르게 변화하고 있는 신안의 풍경에서 느낀 작가의 ‘익숙한 낯설음’이라 할 수 있으며 작품 위에 오브제 설치로 보여준다. 또한 전시에는 신안의 파도치는 바닷가의 풍경과 소리를 기록한 영상 작품을 새롭게 선보인다.
▪ 고향상실의 시대 작업의 의미
작가는 자신의 이러한 작업이 하이데거가 말한 <고향상실>의 시대에 다시는 도달할 수 없는 사라진 고향에 대한 향수의 일종이라고 말한다. 하이데거는 과학기술은 ‘광기의 시대’이고 풍요한 이 시대는 ‘존재자에게서 존재가 빠져 달아나버린’ ‘궁핍한 시대’라고 했다.
때문에 작가는 우리 시대의 고향에 대한 향수는 단순한 그리움이 아니라 세계의 경이에서 비롯되는 <존재의 빛>에 한 번이라도 이르러보기 위해 애씀일 수 있다고 말한다. 그 애씀은 사유와 예술작품을 통해 나타날 수 있을 것이고 자신의 경우에는 신안을 돌아보고 작품화하는 것으로 그것을 시도해 본 것이나 아닐까 싶다고 한다.
작가는 아직 고향이 남아있고, 오래된 고향 집도 있지만 되돌아갈 수는 없으며, 이는 물리적으로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존재와 세계의 변화가 불러온 결과물이라도 했다. 그리고 이를 라캉식으로 말하자면 고향은 부재하며 도달할 수 없는 실재계이자 작업이란 그에 대한 갈망이자 그리움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작가노트
무인도와 유인도
고향상실과 존재의 빛
1
신안에는 1025개의 섬이 있다. 그중 유인도는 72곳, 나머지 953곳은 무인도이다. 신안의 섬들 뿐 아니라 세계의 모든 섬들은 애초에 무인도였다. 신안의 무인도들에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것은 신석기 무렵이다. 어의도와 가거도에 있는 패총들이 그 유적이다. 내 고향인 어의도 패총의 흔적은 오래된 우리 밭에도 있었다. 유난히 조개껍질이 많았던 황토 밭이었다. 어린 시절에는 그저 조개껍질이 많구나 했지만 알고 보니 패총이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잘 만들어진 마제 돌 도끼를 주운 곳도 땔 나무를 하러 갔던 동네 뒷 산이었다.
무인도는 요즘 부동산의 일종으로 가끔 경매에 나와서 예상 밖의 가격으로 팔렸다고 뉴스에 나오기도 한다. 하지만 모든 무인도가 꿈꾸는 것처럼 작은 집을 짓고 자연을 즐기며 살 수 있는 곳은 아니다. 무인도는 법적으로 개발 가능, 이용 가능, 준보전, 절대보전의 네 단계로 구분된다. 개발 가능은 허가만 받으면 주인의 의사대로, 이용 가능은 섬의 형상과 생태계를 훼손하지 않는 범위에서 시설등 허용 가능, 준 보전은 잠시 레저 스포츠 용으로 임시 체류 가능, 절대보전은 출입도 맘대로 하지 못한다. 그러니까 무인도들을 사기만 하면 뭔가 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오산인 것인다.
무인도는 유인도의 과거이자 미래이다. 무인도들은 한 때 유인도였다가 다시 무인도가 되기 때문이다. 임자도 앞의 작도, 만지도가 그러했다. 새우가 잘 잡힐 때는 어장 하는 사람들이 살던 유인도였다가 다시 무인도가 되었다. 한시적 무인도도 있다. 어장철에 들어와 살다가 겨울 되면 사람들이 떠나면 일시적 무인도가 된다. 그리고 나라의 사정 때문에 간첩 사건에 연루되어 무인도가 되는 경우도 있다. 신안 최서북단 대,소 허사도가 그런 경우이다.
어린 시절 내게 무인도는 눈 앞의 현실이었지만 몽상의 대상이기도 했다. 구렁이 섬, 옥섬, 심피, 샛섬.. 할미섬, 앞여... 옥섬에는 누군가 토끼를 몇 쌍 풀어서 자연 번식하면 그걸로 돈을 벌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는 소문이 있었다. 실제로 무인도에 가본 것은 몇 번 되지 않는다. 오래전 어느 봄날 낚시를 하다가 배를 대 놓고 낮잠을 한 잠자고 왔던 것이 마지막이었던 것 같다.
내 작업 속의 무인도는 개인적인 환상이 투영된 결과물들이다. 신안을 돌면서 무인도들의 사진을 찍었지만 어디에 쓸 것인지는 몰랐다. 그 사진들을 들여다보는 동안 어린 시절 산등성이에서 소를 먹이거나 꼴을 베다 말고 무인도들을 바라보며 꾸었던 꿈들이 생각났다.
고향인 어의도 북쪽 산등성이에서 보이는 거의 바위로만 된 삿갓조개처럼 생긴 섬이 있었다. 이름은 구렁이 섬. 구렁이 섬에는 섬을 아홉 번 반을 감을 수 있는 귀가 달린 큰 구렁이가 산다는 전설이 있었다. 열 번을 감으면 용이 될 수 있는데 용이 못 된 이무기인 구렁이가 섬에 있는 보물을 지킨다고 했다. 구렁이 섬에는 금 절구, 금 절구공이, 금 맷돌 같은 것이 있는데 사람들이 그것을 가져가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배를 타고 와서 그걸 실어가려 하면 실을 때까지는 나타나지 않다가 다 싣고 떠나려하면 구렁이가 나타나 배를 칭칭 감고 다시 금 절구 따위를 내려놓을 때까지 배를 꼼짝 못하게 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이를 사실이라고 믿은 적은 없다. 하지만 구렁이 섬이 빌미가 되어 저 섬에는 당나라 해적들이 보물을 감췄을지도 모르고, 이 섬에는 놀라운 효능을 가진 약초가 있을 수도 있다는 상상들을 했다. 또 다른 섬에는 도술에 능한 도사가 살 수도 있고...
여러 십년이 지나 이 몽상들이 다른 방식으로 드러난 게 무인도 연작들이다. 무인도에 피는 꽃들부터 옛 그림을 차용한 작업들은 의미가 있어도 좋고 없어도 그만이다. 어차피 몽상이니까. 어쨌든 무인도들은 들어가서 살지 않더라도 꿈의 장소이고 그것이 중요하다. (4층 무인도?)
2
신안의 유인도들은 우이도 남쪽과 북쪽이 다르다. 우이도, 흑산도, 홍도, 만재도, 가거도, 다물도, 상하태도 등은 바위 섬이다. 주위 바다의 수심도 깊어 해산물은 풍부하지만 농사가 많지 않다. 마을들도 바닷가에 간신히 붙어있다 해도 좋을 만큼 작거나 입지가 나쁘다.
북쪽의 섬들은 뻘밭이 넓고 간척 사업에 따라 농지와 염전등이 많다. 뻘밭을 둑을 막아 농토로 만드는 간척 사업은 섬들을 연결 시켜서 키웠고 살만한 곳으로 만들었다. 때문에 지주도 생기고 외지인이 섬을 지배하는 경우도 있었고 이에 따른 다툼도 많았다. 하의도는 임란 직후 선조가 신의도와 함께 정명공주 불치병을 고쳤다는 홍계원이란 인물을 부마로 삼고 나라 대신 세금을 징수하는 권리를 준 이후 오랜 세월 돌려받기 위한 투쟁을 했고, 일제 강점기에 있었던 암태도 소작쟁의도 유명하다.
유인도의 마을들은 사라지기도 한다. 우이도 대초리는 아예 마을 전체가 사라진지 꽤 되었다. 바닷가에서 멀고 산길을 한 참 걸어야 닿는 마을의 입지 때문이다. 지금은 시누대가 창궐해 마을의 흔적을 덮고 있어 길을 지나기 어려울 지경이다. 이 동네 말고도 마을을 지키는 노인들이 세상을 떠나면 사라질 동네도 한두 곳이 아니다. 무인도에서 유인도가 되었다가 다시 무인도로 변하는 상황에 있다.
물론 이도 역사적으로 새로운 것은 아니다. 공도 정책이 그것이다. 고려 말부터 왜구의 위협이 심해지고 수많은 섬까지 행정적으로 관리하기가 힘들어지자 시행된 공도정책은 살던 주민들을 주민들은 육지로 강제로 옮겨 섬을 일부러 텅 비웠던 것이다. 그 이후 시간이 지나 다시 사람들이 들어가 살면서 유인도로 변했는 데 다시 사람들이 떠나고 있는 것이다. 이를 단적을 보여주는 것이 인구의 변동이다. 1970년에 166,555명이었던 신안군의 인구가 2022년 11월37,849명으로 줄어들었다. 나도 신안을 떠난 사람 중의 하나이고 전국의 농어촌이 모두 비슷한 처지에 있다.
유인도의 삶은 농업과 어업이 주축을 이룬다. 섬 다 조금씩 다르지만 논, 밭 농사와 수산업, 양식업이 섞여 있다. 만재도에는 동네 아주머니들의 상당수가 해녀이기도 하고 연륙된 섬이나 흑산면의 섬들은 관광업도 제법 활발하다. 내 작업들은 이에 대한 조사 보고서는 아니다. 사진을 찍으러 다니면서 마주친 삶의 양상들을 담았을 뿐이다. 땅과 바다와 일체가 된 삶의 모습들이 자연스럽게 드러나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여겼다. 그 이상에 도달할 수 있는 능력과 욕심은 없었다.
3
만재도를 찍어 만든 동영상은 일종의 물멍을 위한 작업이었다. 시작도 끝도 없는 파도처럼 영상도 무한 반복되고, 가끔 그것을 바라보며 머릿속과 마음을 텅 비우기 위한 개인적 용도였다. 만들어 놓고 보니 그럴듯해서 전시에 출품했다. 이 동영상에서 예측하지 못한 것들은 소리였다. 파도 소리는 당연했지만 새소리는 촬영하는 동안에는 듣지도 못했는데 영상에서 선명하게 들려왔다. 편집이 끝나고 나자 보다 중요하게 여겨진 것은 바다, 섬이라는 느낌을 가져다주는 이미지와 결합된 소리였다. 해서 그 소리들이 영상이 없는 전시장의 다른 곳에도 들리도록 시도해볼 생각이다.
그 소리는 뻘, 모래, 바위들의 촉감과 짭짤한 바닷물의 맛과 냄새, 내려 쬐는 여름 햇빛과 마찬가지로 내 몸에 배인 것이다. 이미 거의 60년전 일인데 아직도 생생하다는 것은 기억이라기보다는 이른바 육화incarnation된 어떤 것이라고 불러야 할 듯하다. (3층 영상)
4
그 동안 신안 사진을 바탕으로 그린 그림- 혹은 사진 회화는 여러 장을 묶어 하나의 두루말이처럼 만들었다. 그림들에는 오브제들이 매달려 있다. 이 물건들은 신안 촬영 도중 여러 바닷가에서 주워온 것들이다.
내게 이 물건들은 어린 시절부터 각별한 의미가 있었다. 섬 사람들은 태풍이 분 다음에는 섬 바닷가를 한 바퀴 도는 버릇이 있다. 그럴 때는 바닷가에 쓸만한 물건들이 밀려오는 수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뱃 사람의 시체가 밀려오면 처리하기 위해서였다. 그건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섬에서는 볼 수 없는 장난감 같은 물건들도 가끔 떠 밀려 왔기 때문이었다. 바닷가에는 누군가 신던 슬리퍼, 팔이 빠진 인형, 양초 도막, 대나무와 나무판자, 찢어진 그물, 속이 비어 물에 뜨게 되어 있는 커다란 구슬 모양의 둥글고 푸른 유리 부표에 모자반이나 톳 같은 해초들이 뒤엉켜 있었다. 밀려온 것들은 자갈과 바위틈에 처박혀 있기도 했고, 나무 조각이나 대나무 장대는 누가 일부러 얹어놓은 것처럼 바위 위에 얹혀 있을 때도 있었다.
밀려온 물건들은 대개 바닷물에 씻기고 바위에 부딪혀 둥글게 닳아 있다. 슬리퍼나 신발은 모래가 묻어 있지 않다면 금방 씻은 것 같았고 나뭇가지나 판자 조각도 오래된 흰 뼈처럼 모서리가 둥글었다. 그러나 태풍이 지나간 뒤에 밀려오는 부서진 배의 파편은 달랐다. 거기에는 엄청난 힘이 단번에 배를 박살 낸 흔적이 역력했다. 갑판이나 밑바닥, 아니면 옆구리의 어디였을 조각들은 삐죽삐죽 녹슨 못이 솟아 나오고 기름이 묻은 채로 바위틈에 박혀 계속되는 파도에 시달리고 있었다.
물론 이런 것들만 밀리는 것은 아니다. 돌고래의 일종인 상광어나 죽은 멧돼지가 밀려오는 경우도 있었다. 어느 해 겨울에는 갑오징어가 엄청나게 밀려온적도 있었다. 갑오징어는 떼로 밀려왔기 때문에 온 섬사람이 나가 가마니로 주워 담았다. 한 겨울에 때 아닌 오징어 풍년이 든 것이다. 아마 수온 이상이 생겼거나 바람 때문인가 싶었지만 다시 그런 일은 없었다.
요즘 바닷가에 밀려드는 물건들은 국제적이다. 중국, 일본등에서 밀려온 플라스틱 병, 과자봉지, 어구들이 바닷가를 오염 시키고 있다. 당연히 한국의 물건이 가장 많지만 해변이 거대한 쓰레기 하치장처럼 보일 때도 있다. 특히 작은 플라스틱들은 잘게 부서져 미세 플라스틱이 되는 게 생생하게 보인다. 아이러니칼하게도 바닷가의 물건들은 바람과 파도에 닳고 씼겨져서 심미적으로 느껴진다. 그림에 매단 오브제에 들어 있는 것이 바로 그 아이러니이다. 쓰레기이자 오염 물질이면서 개인적 기억과 애착이 투영된 심미적인 어떤 것. 2층 대형 작품
5
작품이건 현실이건 결국은 모두 하나의 기호이다. 그것들은 눈앞에 마주 보고 있다가 뒤돌아서면 남는 것은 막연한 이미지뿐이다. 가끔 작품이나 현실을 보는 것은 실재하는 것과 자신이 기억하는 이미지들을 다시 비교하면서 스스로 놀래기 위해서가 아닐까 싶을 때가 있다. 혹은 기억하고 있는 이미지들의 막연함을 다시 체험하기 위한 것이든지.
그것은 시각도 청각도 마찬가지이고 기억과 이미지들의 집합인 작품, 예술도 그런 역할을 할 뿐이다. 어쩌면 미술 작품이란 인간이 가진 기억과 감각의 결핍과 무력함을 체험하고 확인 시켜주는 하나의 방법인지도 모른다. 내게는 아마도 신안이 그 대상일 수도 있다. 일종의 회귀, 과거로의 도피를 작품인 척 위장하고 있었던 것이나 아닐까?
언젠가 어느 신문에 실린 문학 평론가 김병익의 글에서 비슷한 감정을 토로한 것을 보았다. 그는 가족들과 함께 사라진 고향을 돌아보며 느낀 소회를 대변하는 ‘하이마트로제’(Heimatlose)란 말과 함께 <고향상실>이라는 말에 공감한다고 했다.
“그리고 혹시나 해서 인터넷에서 ‘고향 상실’을 쳐보았다. 그 설명은 그 말이 사사로운 감상에 젖은 상투어가 아님을 보여주었다. “형이상학과 과학 술이 지배하는 시대에 인간이 처해 있는 존재론적 상황을 설명하기 위하여 철학자 하이데거가 사용한 개념”이란 정중한 풀이로 시작하여 “인간 현존재가 자신의 고유한 실존에 이르지 못하여 ‘외적 존재’로 전락할 경우 이 상황에 처함을 밝히고, 철학의 본래적 과제를 ‘존재의 진리’가 훤히 드러나는 곳으로 귀향하려는 노력으로 규정하였다”는 까다로운 설명으로 이어졌다“
이어서 그는 < 하이데거가 우리 시대를 ‘고향 상실의 시대’로 규정했다는 것, 과학기술은 ‘광기의 시대’이고 풍요한 이 시대는 ‘존재자에게서 존재가 빠져 달아나버린’ ‘궁핍한 시대’로 짚었음을 >강조한다. 그리고 존재를 경이라는 기분 속에서 바라볼 때 그것에서 그전에 볼 수 없었던 ‘광채’를 보게 되는 데 하이데거는 이를 ‘존재의 빛’이라고 한다고 전 한다. 또한 김우창의 비평집 제목이기도 한 <궁핍한 시대의 시인>의 존재는 세계의 부조리를 실존적 각성으로 투시하는 인간임을 깨달았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이 궁핍한 시대에 고향을 상실한 인간들은 다시는 도달할 수 없는 사라진 고향:에 대한 향수에 시달리며 그 향수는 단순한 그리움이 아니라 세계의 경이에서 비롯되는 <존재의 빛>에 한번이라도 이르러보기 위해 애씀이다. 그 애씀은 사유와 예술작품을 통해 나타날 수 있을 것이고 내 경우에는 신안을 돌아보고 작품화하는 것으로 그것을 시도해 본 것이나 아닐까?
김병익과는 달리 나는 고향이 남아있고, 오래된 고향 집도 있지만 되돌아갈 수는 없다. 이는 물리적으로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나라는 존재와 세계의 변화가 불러온 결과물이다. 라캉식으로 말하자면 고향은 부재하며 도달할 수 없는 실재계이자 작업이란 그에 대한 갈망이자 그리움의 표현이다.
6
이를 수 없는 것에 대한 욕망과 도달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그리움의 결과로 만들어진 내 작업들은 결국 나를 나도 의식하지 못했던 <고향상실>에서 구원해 주었던가? 구원은 모르겠으나 분명한 것은 그러는 동안 나는 신안을 체험하고 표현했으며 과정 자체가 의미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아마도 카메라와 붓을 들고 돌았던 17년의 시간과 신안 바다 모든 곳이 옛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는 여정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내가 지각하지 못한 <존재의 빛>은 무인도와 유인도 사이 어디에선가 광채를 내뿜고 있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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