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포스터
일상과 자연의 빛을 조각하다
임성훈(미학, 미술비평)
모란미술관이 올해 첫 번째 전시로 <백현옥>展을 개최한다. 60년이 넘는 조각의 여정을 걸어오면서 조각가 백현옥은 다양한 조형언어를 모색해왔고, 자연스런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작업을 지속적으로 해왔다. 1960년대 한 때 추상조각을 실험적으로 하기도 했으나 1970년대 초반 이후 그는 구상작업에 전념해왔다. 추상에서 구상으로의 전환은 단순한 기법상의 문제도 아니고 어떤 경향성을 따른 것에서 비롯된 것도 아니다. 달리 말해, 그 전환은 서구적 추상 기법이 단순히 싫어서도 아니고 무시할 만한 것이라고 본 것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오롯이 조각에 대한 진솔한 태도를 유지함과 동시에 사람들과 함께 공감의 영역을 확보하기 위함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는 다음과 같은 그의 말에서도 현저히 드러나 있다. “나 자신이 진실로 대상에 대한 감동을 받은 다음에 작품을 해야만 관자에게도 감동을 줄 수가 있다. 다시 말해서 작가와 관자가 같이 공감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추상조각을 하다가 구상조각으로 작품형식을 바꾼 것도 그 이유 중에 하나이다.”
백현옥은 나무, 돌, 흙, 청동, FRP, 아크릴 등과 같은 다양한 재료를 활용하여 조각 작업을 지속적으로 해 온 조각가이다. 이러한 그의 조각 작업에서 주목할 만한 부분은 그가 재료를 조형적으로 이끌어내고 형상화하는데 특유한 조각적 솜씨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우선 오해가 없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굳이 덧붙이자면, 물론 이 솜씨는 단순히 기법적인 차원에서만을 의미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의 조각적 솜씨는 무엇보다 재료를 조각미학의 차원으로 변용하는 내재적인 힘에 있다. 재료에 대한 깊은 이해는 그의 작업에서 모색과 실험의 과정을 거친 후에야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에게 있어 재료는 단순히 조각의 수단이나 도구가 아니라 조각의 본질을 향한 예술적 시도에서 촉발되는 근원적 형식요소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 그는 조각의 재료 하나에도 자신의 조형적 태도를 반영하고, 그 재료를 통해 구현될 원형을 늘 사유한다. 재료는 이제 단순한 물성의 차원이 아니라 삶에 대한 겸허하고 소박한 태도를 드러내는 출발점이 된다. 백현옥의 작업에서 재료는 다양한 주제들을 표상하고 있다. 그는 특정한 기법에 얽매이지 않고 재료를 자유로운 조형적 과정에 활용하면서, 언제나 기법과 주제 그리고 형식 사이에서 조화와 균형을 추구한다. 이와 관련하여 임영방은 일찍이 백현옥의 조각을 두고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백현옥은 이렇듯이 여러 재료(材料)의 질(質)과 이에 따르는 기(技)를 화합(和合)시키고 또한 그 조형(造形)에 있어서 정서적(情緖的)인 성격(性格)을 온화하고 무리 없는 구상(具象)으로 표현(表現)시키고 있어, 보는 사람의 호감을 불러 일으켜 준다.”
백현옥의 조각적 표상은 여러 측면에서 고찰될 수 있겠지만, 작업을 전체적으로 조망해서 볼 때 일상과 자연의 조각언어에 상응하는 표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오랜 세월 조각과 함께 해 온 삶은 조각으로 일상을 말하고 자연을 드러내는 일, 그것에 천착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터이다. 그의 조각은 일상과 자연을 다양한 방식으로 재현한다. 그의 작업에서 일상과 자연의 미묘하게 섬세한 결들이 조각의 재료를 촉발하고 주제를 형성한다. 삶과 유리된 예술이 아니라, 지금 여기 삶과 함께 있는 그 모든 일상의 빛들 그리고 자연의 빛들이 그의 조각의 본체를 이룬다. 그러기에 일상이 조각이고, 조각이 자연이고, 또한 일상과 자연이 조각에서 홀연히 하나가 되는 조형적 흔적들을 그의 작품에서 읽어낼 수 있다.
그의 조각은 일상의 미학을 유감없이 드러내 보여준다. 일상의 미학은 조각에 대한 그의 겸허하고 자연스러운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일상의 모습을 다양하게 보여주는 작품들, 예컨대 <여인> 연작들, <키 쓴 아이>, <소녀상>, <고민하는 아이>, <기다리는 아이들>, <여일>, <사제동행(관계)>, <견우와 직녀(만남)>, <장날>, <가족> 및 <다문화 가족> 연작들 등은 조각적 언어로 말할 수 있는 공감의 따뜻한 감성을 우리들에게 들려준다. 특히 <장날>은 모란미술관 야외전시장에서도 설치되어 있는데 관객들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는 작품들 중의 하나이다. 그것도 그럴 것이 야외전시장에 있는 많은 작품들 중에서 <장날>은 관객들의 일상에 어떤 조형적 울림을 주기 때문이다. 또한 어떠한 이해나 설명보다도 그가 보여주는 일상의 조각은 즉각적인 정감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기도 하다. 일상의 미가 빛나는 곳에서 조형적 기교나 세련된 형식은 더 이상 중요한 요소가 아닌 게 된다. 삶 그리고 사람과 소통하고 일상에서 이루어지는 그 순수하고 따뜻한 아름다움을 그는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다. 낮은 곳이 가장 높은 곳이 되는 역설처럼, 이렇듯 정겨운 일상의 조각이 가장 고차원적인 조각으로 상승되고 고양된다. 조각의 품위란 고답적이고 지적인 조형적 유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과 함께 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는 것을 그는 직관적으로 감지하고 있는 조각가이며, 또한 이를 여실히 그의 조각으로 제시하고 있다.
‘가족’이라는 모티브로 제작된 그의 많은 작업들은 일상의 미를 조형적 공감으로 이끌어내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특히 청동으로 제작된 <가족>(1994)은 그의 가족 연작들 중에서 상징적이고 문화적인 의미내용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원과 사각형의 근본적인 형태에 그 무엇으로도 깨트릴 수 없는 가족의 단단함을 공감을 이끌어내는 매스와 구조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문화 가족>은 백현옥의 조각에서 가장 특징적으로 드러나는 정겨움의 아름다움이 조각적 형태로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는 작품들이다. 예술을 통해 연대를 이루어가는 모습이 엿보이기도 해서 <다문화 가족>은 함께 어울려 살아가야할 우리네 문화풍경을 압축적으로 제시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또한 솥뚜껑, FRP, 청동, LED 등과 같은 혼합매체를 활용하여 제작된 <견우와 직녀(만남)>를 보자. 일상적인 재료를 활용한 것이 흥미롭기도 하거니와 이러한 재료를 통해 조형적 내러티브를 풀어가는 조각가의 능력이 매우 돋보인다. 아크릴 부조작품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작품에서도 빛은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관객들에게 조각이 회화적으로 그리고 회화적 감성이 미디어 조각으로 확장되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응축된 조형성을 보여주고 있는 이 작품은 조각이 드러내는 일상의 빛에 대한 알레고리로 해석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일상의 조각에 깊이 스며들어 있는 것은 바로 자연의 모티브이다. 자연이라는 모티브가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반영되어 있는 일련의 작품의 예로, <발아> 연작들, <소나기>, <발원>, <보리고개>, <투우>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인체 표현에 자연의 형상이 상정되어 있다는 점을 그리 어렵지 않게 가늠해 볼 수 있을 터이다. 자연의 모티브가 어떤 식으로든 이입된 인체 작품의 예로 ‘여인’을 주제로 한 일련의 조각들, <가을의 문>, <바이올린 켜는 소녀> 등을 들 수 있다. 그의 인체 작품들에서 확연하게 드러나는 것은 자연의 가장 본래적인 원초적 자연스러움이 재현되어 있다는 점이다. 작가는 인체 표현이 크게 두가지 개념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고 말한다. “우선 인체가 갖는 구조나 이미지, 작가의 내부에서 형성된 자연관 등에서 오는 힘을 인체를 통하여 표현하고자 했다. 과거의 한국 고대의 조형물 즉 불상, 토우 등에서 인체미를 끄집어 내었다. 다시 말해 그것은 불상이 지니는 종교적 의미보다는 불상의 의습이나 포즈, 그리고 구조적인 면에서 자연의 힘을 바탕으로 한 예술성의 발견이었으며, 탑에서는 구조미의 발견이었다. 이들 두 가지 개념을 바탕으로 인체를 구상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 두가지 개념 중의 하나가 바로 자연이며, 그의 인체는 자연의 형상 그 자체에 다름 아니다. 그의 인체에서 보이는 선의 형태와 구조는 자연을 즉자적으로 보여준다. 인위적인 조형성은 홀연히 사라지고 자연의 매스감이 뚜렷하게 부각된다. 인체 또한 결국 자연의 한 부분이다. 그러기에 인체의 표현은 자연에 대한 표현과 동일한 것이다. 일반적인 구상적 형태의 인체조각처럼 보이지만 면밀히 들여다보면 그의 인체는 명백하게도 자연 그 자체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을 것이다. 이렇듯 인체의 표현에서도 자연을 대하는 작가의 소박하고 진솔한 감성이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
조각의 자연성은 작가에게 매우 뚜렷한 인식으로 각인되어 있다. 특히 물의 흐름, 그 미묘한 변화 속에서 조형적 변용을 감지하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그의 작가노트를 보자. “굴곡진 대지에 비가 내리면 고즈넉하던 숲과 계곡은 술렁이기 시작한다. 물들은 생기를 되찾고 흐름은 빨라진다. 물의 흐름은 그 형태가 다양하나 유독 내가 좋아하는 모습은 여울의 흐름이다. (......) 나의 창작생활에서 물은 언제나 깊숙한 의식의 늪에 자리 잡고 있으면서 때에 따라 나를 충동하기도 하고 구상의 원천과 바탕을 마련해주기도 한다.” 여인의 인체 조각에서 보이는 자연스러운 형상은 여울의 흐름이 형성하는 미묘하고 다양한 자연의 변화를 담지하고 있다. 그가 생각하기에 조각가는 이러한 물의 흐름을 조형언어로 번역해야 하는 지난한 과제를 갖고 있다. 여인의 인체에 어떻게 자연을 담아낼 것인가? 이 물음이 그의 조형적 의식의 근저를 이루고 있다고 하겠다. 그는 작가노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부드러운 강의 흐름에서 성숙한 여체의 와상을 본다. 여울은 이 여인의 허리요 관점이요 힘의 근원이다. 여울에서는 대지와 물의 합창이 이루어진다. 조각가는 여울목에서 물의 군상들을 보고 들으면서 몽상한다. 그리고 내부로 들어와 창조의 형태를 숙성시킨다. 그리고 생성의 모태인 흙으로 또 다른 여울의 형태를 빚어 나간다.”
백현옥은 일상의 언어를 조각하고 자연의 흐름을 조각적 변용으로 드러내 보여주지만, 동시에 또한 일상과 자연의 융합을 조형적으로 제시하는 조각가이기도 하다. 물론 이런 융합을 보여주는 작품들을 이분법적으로 명확하게 구별해서 논의할 수는 없지만, <여명>, <횃불>, <소우주>, <기우제>, <풍경> 등을 그 예로 들 수는 있을 터이다. 그런데 무엇보다 일상과 자연의 융합이 새로운 조각의 형태로 현시되는 것은 그의 아크릴 작업에서 엿볼 수 있다. 실상 아크릴 뒷면을 음각으로 파낸 역부조에 빛이 설치된 아크릴 작품들이 이번 모란미술관 전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크다. 그의 아크릴 부조 작업은 빛으로 그리는 그림이라고 할 수 있고, 전통적인 조각의 입체성을 평면성의 새로운 조형적 차원으로 환원시켜 부조와 빛이 이끌어내는 새로운 미술적 세계, 그 환영으로 인도하는 미적 경험의 현현이라고도 할 수 있다. 백현옥은 이번 전시에서 관객들에게 이러한 특별한 미적 경험을 선사하고자 여러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작품을 설치하기 전, 그 마지막 순간까지도 아크릴 작업에 온 힘을 쏟았다. 작가의 다음 말은 어떤 울림을 준다. “조각은 내 인생이예요. 이것에는 열정을 아끼지 않고 쏟게 되죠. 늙은 나이에 이런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게 다행이다 싶기도 하고, 비는 시간이면 어김없이 작품에 손을 대고 있어요. 누가 와서 이야기를 할 때조차 손으로는 무엇인가를 다듬는 다니까.” 전시 개막을 얼마 앞두지 않은 그 시간까지 조각을 하고 싶다는 그 마음은 순수할 뿐만 아니라 그 어느 젊은 조각가도 쉽게 범접할 수 없는 예술적 열정을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아크릴 부조 작품들은 재료를 다루는 그의 조형적 힘과 새로운 감각을 부여하고자 하는 그의 정신적 힘이 융합한 결과에서 비롯된 것들이고 완성된 것들이다. 아크릴 작업은 일상과 자연이 다양한 방식으로 연관되고, 그것이 조각에서 다양한 재현의 가능성으로 드러난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자연의 원리를 재현하고 있는 그의 아크릴 작업에서는 기술과 예술이 하나가 되고, 예술 장르들 간의 경계가 무의미해지고 오직 일상과 자연 그리고 공감과 관조의 정서가 하나의 조형의 빛, 그 예술적 환영으로 오롯이 현현한다. 아크릴 부조에서 불러일으켜지는 감정은 기법적 환영이 아니라 일상과 자연을 빛으로 밝히는 예술적 환영이다. 아크릴 조각은 진실을 매개하는 삶과 세상의 판처럼 관객들에게 다가온다. 일상과 자연이 만나고 빛으로 드러나는 그곳에 백현옥의 조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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