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민(Jungmin Park)

1970 서울 출생

서울, 경기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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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말

강가, 어딘가쯤에 멈춰 앉아 낚싯대를 편다. 보통은 카메라라고 부르는 물건이지만 나는 낚시할 때 쓴다. 굳이 강이어야 해서 강가로 나온 건 아니다. 때로는 들이기도 하고 혹은 바다일 때도 있지만 걷다 보면 대개는 강인 이유는 내 많은 선조들의 뒤를 밟은 격일 게다. 문명의 탄생지라는 말은 곧 문명과 자연 간의 갈등과 충돌의 진원지라는 뜻이기도 할 터. 수만년 시간의 끄트머리 몇 년 남짓을 내 몫으로 챙기고 있다.

낚시를 드리운 다음엔 찌를 노려볼 차례다. 지리멸렬한 세상을 단박에 예의주시할 만한 광경으로 바꿔놓는 뷰파인더의 사지절단 마술에 환호부터 보내고 난 다음, 눌러앉아 한동안 뚫어져라 볼 일이다. 천천히, 물음표 비슷해보이는 흐릿한 어떤 것이 바늘 주변을 헤엄쳐다니기 시작한다.

환경이라는 아젠다 혹은 아포리아를 붙들고 씨름하기 시작한지는 조금 더 되었다. 갈수록 모든 것이 명확하지 않아만 가니 짐작컨대 후자일 것이다. 하필이면 또 카메라를 잡고서였으니 사정은 더욱 심각했다. 처음 너무도 굳건해보였던 그 많은 느낌표들은 시간이 갈수록 고개를 떨궈 물음표가 되어가는데, 카메라라는 물건은 이런 국면을 전환시키는 따위의 용도로는 아무런 보탬이 못됐다. 지팡이로 쓸까 싶어 짚어도 보고 창검으로 쓸까 휘둘러도 봤지만 마땅치가 않다. 짚자니 미끄러지고 겨누자니 빗맞기만 한다.

이번에도 누군가는 과학적으로 명석판명한 규명을 해낼 것이고 또 누군가는 정치적으로 호호탕탕한 주장을 실행에 옮길 것이다. 혹자는 기도하고 혹자는 개발할 것이며(신도시든 신기술이든) 좌우지간 환경문제의 통섭적 성격에 걸맞는 다종다양한 대처법을 선보이리라 믿는다. 대신에 나는 카메라라는 물건에 비로소 걸맞는 짓에 나서기로 했다.

“근본적으로 바꾸려면 먼저 지금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정확히 보아야 한다. 이것을 해낼 수 있게 되면 변화는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한 스리랑카 스님이 쓴 위빠사나 책에 나오는 구절이다. 그러니까, 제일 먼저, 있는 그대로를, 언필칭 ‘여여하게’ 보는 데서부터라는 말일 것이다. 사진이 가장 잘할 수 있어보이는 탓에 또한 가장 빈번히 그르치곤 해왔던 바로 그 일이다.

포크레인은 이젠 숫제 이 산천의 허수아비. 배웅이랍시고 내치는 저 굉음이 그러나 이 강가에서의 첫 소절은 아닐 것이다. 누군가는 여기에서 적장의 목을 베었고, 들꽃은 그 위로 살아보자고 피어올랐을 것이며, 무역선이 떠나던 날 또 누군가는 그 꽃을 따 쌈지에 품기를 몇 번이었을까. 그 모두의 후렴이자 뒤이어지는 모두의 앞소절일 저 포크레인을 그저 그것만으로 있는 그대로라 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풀 길 없는 타래뭉치를 들고 나와 강물 속에 드리워놓는다. 뚫어져라 보아가며 주문이라도 걸듯 되뇌인다. 견자여 견자여 무엇을 보느냐. 물음은 대치되지 않는다. 다만 낚아올려도 좋을 만큼 또렷해질 뿐이다. 나의 노래는 여기까지. 물어가며 본 것을 보여주며 물을 따름이다. 어쩌면 이거야말로 내 위에 드리운 바늘일지 모르지만, 그렇다 해도 낚고 낚임의 질긴 인드라망을 마다할 도리란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