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태규(Lim TaeGyu)

1963 강원도 출생

서울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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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말

이 전시의 주제는 ‘흐린 풍경Blurry Scene’이다.

우리의 감성 기억은 지나고 나면 언제나 분명하게 떠오르질 않는다. 나이 듦에 비례하듯 점점 더 기억이 흐릿해져서일까? 그렇다고 슬퍼할 일은 못된다. 기억에 남겨진 일들만을 가지고도 우리의 삶은 지치도록 바쁘니까 말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우리의 뇌에 불필요한 기억을 지우는 첨단 기능이 자리하고 있나보다.

이 전시의 주제가 된 ‘흐린’이라는 말은 여러 의미로 쓰인다.
비 내리고 눈보라 몰아치는 일기를 우리는 흐린 날이라고 한다.
새벽안개 자욱한 강가에 언뜻언뜻 드러내는 버드나무 가지와 갈대를 보며 우리는 시야가 흐리다고 말한다.
어린 시절의 추억이나 과거 일상들을 회상하며 떠올리는 기억들이 가물가물할 때도 우리는 흐릿하다고 말한다. 얼마 전에 책에서 읽었던 내용이 오락가락할 때에도 우리는 기억력이 예전 같지 않게 흐려졌다고 말한다.

그래서 ‘흐린 풍경’이 되었다.

‘흐린 풍경’으로 그려진 이번 그림들은 이곳저곳을 다니며 보았던 구체적 자연의 흐릿한 기억과 흐릿하게 떠오르는 과거의 추억들이 투영된 현실의 내 모습이기도 하다.
그래서 어느 날은 눈보라치는 맹동孟冬의 한기에 맞서는 소나무가 되기도 하고, 어떤 날에는 푸릇하게 밝아오는 하늘의 새벽달에 취해보기도 한다. 또 다른 그림에서는 따사로운 햇살이 비추는 도원桃源을 꿈꾸는 나룻배가 되어보기도 한다.

흐린 풍경 속에 자리한 농묵 표현의 나무와 배와 같은 사물들은 그림 속에서 내가되기도 하고, 그림을 대하는 익명의 누구이기도 하다. 왜 그것만 유독 진하게 그렸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할 말은 없다. 그냥 그렇게 그렸다. 굳이 미학적 해석에 관심을 둔 누군가 묻는다면 ‘허실상생虛實相生’의 표현이라고 해야겠다.

작은 그림들에서 바라다 보이는 주변 세상은 내 마음과 다르게 혼자 고요하다. 그래서 고요함을 주변에 그려 넣으려 했다. 하지만 내 마음은 내 밖에 세상 때문인지, 아니면 내가 원인이 되어서인지 모르게 항상 이리저리 흔들린다. 장자의 표현에 의하면 몸은 앉아 있지만 마음은 밖으로 내달리는 ‘좌치座馳’쯤 되겠다. 때로는 거센 눈보라에 이리저리 휘둘리기도 하고, 물가에 고요히 기대어 있지만 마음은 거센 물길을 헤치고 어디든 떠나려 한다.
그래서 흐린 풍경 속에 내게는 전혀 관심을 주지 않는 고요함과 어디론가 내달리려는 마음을 달래려 애쓰는 내 모습을 함께 그려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