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명로(Myungro Yoon)

1936년 전라북도 정읍 출생

서울에서 활동

작가 프로필 이미지

소개말

내가 태어났을 때는 나라가 없었다. 성도 이름도 일본어로 바뀌었다. 내 이름을 되찾았을 때는 남북 분단을 극복하지 못하고 나라는 두 동강이가 났다. 이념의 거대한 장벽을 넘어 북에서 남으로 내려 왔을 때는 초등학교 3학년 이었다. 그때 나는 환경미화를 위한 성인들의 초상화를 모사해서 학교를 떠들썩하게 했다. 그때의 기억들이 내가 지금도 여백 앞에서 사유하고 고뇌하는 빌미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동족상쟁의 비극적인 잔해가 아직도 흰 눈으로 덮여 있던 무렵 주위의 반대를 뿌리치고 미술대학에 입학 한다. 실존주의가 썰물처럼 대학가를 휩쓸고 지나갔다. 졸업을 앞두고 처음이자 마지막이 된 국전에서 '벽 B' 로 특선을 한다. 사르트르(Jean-paul Sartre)의 소설, '벽'에 등장하는 사형수가 주인공 이다. 절망과 부조리의 극한 상황을 휴먼이즘이라 했다. 그때 국전은 화가 지망생들에게는 유일한 등용문이었다. 나는 등용문을 걷어차고 동료들과 함께 60년 미술가협회를 창설한다. 그리고 주한영국대사관으로 통하는 덕수궁 담에서 반 국전 선언을 한다. 대부분의 작품들은 신은 죽었다고 외치며 거칠고 난삽했다. 원죄, 문신, 석기시대 따위와 같은 작품들과 함께 제3회 파리비엔날레에 출품했던 <회화 M.10>은 이 시기를 대표하는 작품이다.
1969년, 록펠러재단 초청으로 미국 땅을 밟았을 때 나는 닐 암스트롱(Neil A. Armstrong)이 인류 최초로 달에 남긴 발자국만큼이나 충격을 받았다. 자본주의가 실존주의를 해체하고 있었다. 뉴욕의 마천루와 지하철이 낯설지 않은 일상으로 돌아왔을 때 조국은 나를 불렀다. 이른바 해외에 흩어져 있었던 병역미필자들을 잡아 드려 평등사회를 이룩한다는 명분 때문이었다. 나는 재학중 급우들과 함께 해병대를 지원 했다. 그러나 폐결핵의 흔적 때문에 미취학자들과 함께 병종으로 분류 되어 조국을 위한 의무로부터 분리 된 몸이었다. 이시기에 나는 자(Ruler)를 주제로 작품을 제작한다. 자는 인간과 인간의 약속이고 규범이다. 그런데 세계는 룰러=통치자들에 의해서 규범이나 약속이 붕괴되고 있었다. 나는 짐짓 갈라지고 녹아내린 자의 흔적들을 바라보며 자유를 갈망 한다. 병영에 갇혀 극한 상황에서도 말하지 않을 수 있었던 자유, 그런데 그림은 주제가 관념적이고 사변적일 때 훈장을 단 병사처럼 보였다. 자의 형태는 사라지고 우연성과 부조리의 경계에서 균열만을 남겼다. 갈라지고 터진 흔적들은 의미 없는 추상이 되었다.
이후 나는 화폭 위에 무작위로 선을 그어대며 그 흔적들을 얼레짓이라 불렀다. 얼레를 감고 푸는 짓거리처럼 마음을 감고 푸는 몸짓의 흔적들로 비우고 채워 나갔다.
1991년 개인전을 앞두고 부강에서 토끼를 사육했던 텅 빈 창고 하나를 빌렸다. 태어나서 처음 만난 높고 넓은 사육장이었다. 가없는 대지나 바닷가처럼 느껴졌다. 나는 이 시기의 작품들을 '익명의 땅'이라 불렀다. 자아가 통제 받지 않는 익명성, 얼마나 자유로운가. 가없는 화폭 안에서 나는 모처럼 무한을 숨쉬고 있었다 클레멘트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는 뒤늦게 평면성을 회화의 본질이라 했지만 일직이 공자는 회사후소(繪事後素)라 했다. 그러나 나는 평면 속에서 공간의 깊이를 보았다. 259x 1,333cm가 되는 <익명의 땅 91630>은 이시기를 대표하는 작품이다.
2002년, 정년으로 교육현장을 떠나자 갑자기 우리 것이 보였다. '여보게 우리 것을 세계화 하려면 지역성이 보편성을 띠어야 하네.'. 세계화의 중심인 뉴욕에서 고독한 삶을 마감하셨던 수화 김환기 선생님의 말씀이 새삼 떠올랐다. 나는. 미래의 기억들을 위해 늘 열려 진 상태로 자리 잡고 있는 표상들 가운데서 겸재의 '인왕재색도'와 능호관의 '설송도', 추사의 '세한도'를 좋아한다. '겸재예찬' 연작은 세계화라는 이름으로 분별없이 정체성을 잃어 가고 있는 젊은 세대들을 향한 화두였다.
나는 회사후소에 갇혀 수세기 동안 관념 산수를 답습했던 화론들을 해체하고 싶었다. 안료나 수묵 대신에 철분을 사용했다. 쇳가루는 안료가 아니라 입자여서 개칠할 수 없는 묘한 긴장감이 뒤따랐다. 철분은 습도에 쉽게 녹슬어 버리는 단점도 있었다. 쇳가루가 공기를 갉아 먹으며 서서히 철화백자처럼 환원 되었다.

2010년 베이징에 있는 중국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앞두고 나는 쇳가루와 함께 훈색 (暈色)을 사용했다. 철분의 불안정성과 긴장감 때문에 고민하다가 훈색과 마주쳤다. 위치에 따라 색깔이 달라 보이는 훈색의 변화는 많은 관람객들의 다양한 시각을 견인했다. 만약 아크릴릭 칼라가 없었더라면 팝아트나 옵아트의 탄생은 불가능 했을 것이다. 또한 픽셀((pixels)의 진화가 없었으면 수묵이나 오방색도 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되돌아보면 나는 화두를 바꿀 때 마다 새로운 미디어에 대한 탐색을 버리지 않았다.
내 그림은 랜덤(random)이다. 랜덤이란 더 내면적인 공간으로 접근하려는 숨결이다. 마음대로 형성되는 무질서가 아니라 충분한 사고 끝에 나타나는 정신의 흔적들이다. 내 그림에는 아크릴릭이나 픽셀의 아름다움이란 없다. 그림이 아크릴릭이나 픽셀이 아닌 이유가 그림에 있기 때문이다.
예술가란 모방을 허락 받지 못하고 태어남 고독한 존재들이다. 피카소는 일직히 '훌륭한 예술가는 모방하고 위대한 예술가는 훔친다고 했다. 그러나 피카소는 분명 예술은 모방이 끝날 때 시작한다고 말하고 싶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