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위예술(퍼포먼스아트)

서양미술사1945-현재

예술형식의 통합

행위예술은 1950년대 말에서 1970년대까지 두드러진 미술가들의 활동이다.
이는 예술과 삶을 통합하려는 욕구에서 시작하며, 동시에 예술매체 사이의 구분을 허물어 트리려는 발상, 즉 회화, 조각, 음악, 무용 등으로 분화된 예술형식들을 통합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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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e big laugh

    클래스올덴버그/짐다인, 1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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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ky Piece to Jesus Christ

    요코오노, 19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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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이춤

    앤할프린, 19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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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부로 이루어진 열여덟개의 해프닝

    앨런 카프로우,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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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yard

    앨런 카프로우, 1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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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단계 화상을 입은 독서위치

    데니스 오펜하임, 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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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흔여덟번째 행위

    헤르만 니취, 1974

  • Description

    행위예술은 1950년대 말에서 1970년대까지 두드러진 미술가들의 활동이다. 이는 예술과 삶을 통합하려는 욕구에서 시작하며, 동시에 예술매체 사이의 구분을 허물어 트리려는 발상, 즉 회화, 조각, 음악, 무용 등으로 분화된 예술형식들을 통합하고자 한다. 

     

     

    행위예술의 초기단계

    1차대전이 발발하기 전 이탈리아와 러시아의 미래파 작가들은 다양한 종류의 퍼포먼스를 공연했다. 1차대전 기간 중에 다다이스트들이 모였던 스위스의 카바레 ‘볼테르’는 다다 정신이 가장 치열하게 표출된 장소였다. 그 후에 초현실주의자들은 다양한 집단적 공연을 벌임으로써 그들이 의도하고 있는 바를 대중에게 알렸다. 

     

    이탈리아의 미래파는 화실과 미술관을 버리고 강연장과 극장, 거리로 뛰쳐나온 최초의 모더니즘 운동이었다. 초기 전위집단들의 시도에서의 공통점은 이탈리아의 비평가 레나토 포졸리가 전위의 진정한 지표호서 제시한 바 있는 ‘행동주의, 저항주의, 허무주의,투쟁주의’라는 특성이다. 2차대전이 끝나고 미술은 내향적인 경향을 띠게 되는데 이러한 분위기는 미래파 작가들이 생각했던 바와 같은 대규모 ‘퍼포먼스’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더니스트들의 자기를 선전하고자 하는 갈망과 대중과 직접 만나고자 하는 욕구는 사라지지 않았다. 

     

    1952년 음악가 존 케이지는 자신이 강연하는 대학에서 강연과 무용과 시낭송이 어우러지는 퍼포먼스를 펼쳤고, 일본의 ‘구타이 그룹’은 자신의 신체를 표현수단으로 한 야외공연작품을 창조하고 있었다.

     


    팝아트의 탄생과 함께한 미국의 행위예술

    대부분의 팝 아트 작가들은 1960년대 초기에 행위예술을 직접 창조하거나 해프닝에 참여했으며 앨런 카프로우와 같이 해프닝만을 전문으로 하여 유명해진 전문가들도 있다. 이때 팝 해프닝과 팝 환경예술 사이에는 연관성이 있다. 올덴버그의 거대한 <베드룸 앙상블>처럼 환경예술은 행위예술보다 밀접한 관련을 맺으면서 나란히 발전했다. 

     

    미국의 대표적인 행위예술작가인 앨런 카프로우는 초기에는 꼼꼼한 대본과 진지한 연습과정을 거쳐 행위예술을 만들어 내려고 하였으나, 배우들은 멋진역을 원하고, 자의식이 강했고, 어색했기 때문에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 따라서 그는 작품현장에서 가능한 모든것, 환경 뿐만 아니라 군중까지도 의도적으로 이용해야겠다고 결심한다. 

     

    이렇듯 실제 참가자에 의해서 얻어지는 가치를 강조한 것은 지극히 실제적 문제에 대한 고려에서 비롯된 결과였다. 그러나 미국의 해프닝에는 초기의 미래파나 다다의 이벤트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던 사회비판적 요소가 없다는 것이 특징이다.

     

     

    오스트리아의 신체예술

    ‘비엔나 행동주의’라고도 불리우는 오스트리아 행위예술그룹은 1960년대 초 유럽과 미국에서 유행하던 앵포르멜과 액션페인팅 그리고 타쉬즘(붓놀림의 흔적에 관심을 갖는 추상화가들의 화풍)에서 영향을 받았다. 이들은 혈액이나 배설물 같은 원초적 물질과 음식물, 다른 사람의 몸 그리고 작가 자신의 몸을 작업에 일치시켰다. 

     

    1961년 헤르만 니치가 관객들 앞에서 <향연-신비-연극>이라는 ‘종합적 예술작업’의 제의적 개념을 발표한 것이 행동주의의 시작이라고 하기도 하나 분명치는 않다. 다시 유럽의 어느 다른 사회보다도 훨씬 보수적이었던 오스트리아 미술계에서는 급진적인 이런 움직임을 탄압하여 곧 사라졌다. 도살된 양이나 소가 무대로 운반되어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리고, 일부작가들은 거기서 피를 받아내어 나체상태로 피를 마시기도 하는 이런 퍼포먼스는 사람들을 흥분상태로 만들어 공포와 연민의 카타르시스를 느끼도록 하였다. 

     

    1968년 비엔나 대학 계단 강의실에서 행해진 비엔나 행동주의자들과 차세대 주자들이 참가한 집단 퍼포먼스 <예술과 혁명>은 공연 이후 공권력의 개입으로 오스트리아 문화의 중심으로 진입하던 행동주의의 급진적인 미학이 사라지는 계기가 되었다.

     

     

    영국의 해프닝

    행위예술은 영국에서 새로운 표현단계로 접어들게 된다. 그 이유는 1960년대말과 1970년대초에 미국의 경우 전위예술가들의 관심이 점차 실험영화와 실험비디오 쪽으로 옮겨간 것에 비해 영국에서는 그러한 매체들의 도전이 없었기 때문이다. 또 미국이 뉴욕을 중심으로 행위예술이 벌어지는 것에 반해서 영국 행위예술은 런던 이외의 지역에서 가장 활발히 전개되었다는 것이 특징이다. 

     

    영국 행위예술에서 주도적인 인물은 시인이자 화가였던 애드리안 헨리였다. 그는 <환경예술과 해프닝>이라는 저서에서 당시의 퍼포먼스를 ‘시와 로큰 롤, 그리고 앗상블라주의 혼합물’이라고 설명한다. 또 요크셔에서 가장 특기할 만한 그룹이 있었는데, 그들은 ‘복지국가Wal fare State’였다. 이 그룹은 영국의 모든 퍼포먼스 그룹 중에서 가장 성공적인 그룹으로 존 폭스가 그 창설자이며 지도자였다. 

     

    이들은 실험적 극단으로 취급되는 것이 보통이지만, 자신들은 배우가 아니라 예술가로 불려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뮤직홀에서 빌려온 아이디어와 원시적 제의에서 빌려온 발상을 혼합한 테크닉을 사용하여 놀라운 시적 이미지를 창출해냈다. 영국에서 공연된 행위예술이 흥미로운 점은 대단히 양상이 다양하다는 것이며, 사용되는 테크닉도 다채롭다는 것이다.

     

     

    뮤움 미술사연구팀 김선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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