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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년 아버지의 권유로 엑상프로방스의 법과대학에 입학하였으나 1861년 그만두고 졸라의 권유로 파리의 아카데미 스위스로 학교를 옮겼다. 여기에서 C.피사로, A.기요맹 등을 알게 되고, 후에 인상파화가들과 인연을 맺는 계기가 되었다.
한때 미술학교 시험에 실패하여 실의에 빠지기도 했으나 72년 퐁투아즈에서 헤어졌던 피사로와 만나 다시 그림에 전념하기 시작하고 인상파운동에 적극 참여하는 기회가 되었다. 그러나 그 때까지만 해도 단지 반관전(反官展)이라는 입장에서 동조하는 정도였으며, 학풍에서는 C.모네나 피사로에서 볼 수 있는 순수한 외광파(外光派)에 속하지는 않았다.
1874년 제1회 인상파전에 출품한 작품에서 보여준 빛과 색의 배합은 한층 인상파작가로 접근해 가는 듯한 느낌을 주었으나 제3회 인상파전을 고비로 차차 인상파를 벗어나는 경향을 보이고, 구도와 형상을 단순화한 거친 터치로 독자적인 화풍을 개척해 나가기 시작하였다. 이 때의 작풍이 더욱 발전하여 후에 야수파와 입체파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근대회화의 아버지로 불리는 동기가 되었다.
1896년 인상파그룹과 결별하고 고향인 엑상프로방스에 돌아와서는 작품에만 몰두하였으며 4년 후인 1900년경부터는 재능과 독특한 작풍이 널리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자연은 구형 ·원통형 ·원추형에서 비롯되는 것이다”라고 견해를 밝힐 만큼, 자연을 단순화된 기본적인 형체로 집약하여 화면에 새로 구축해 나가는 자세로 일관했다.
그는 20세기 회화의 참다운 발견자로 칭송되고 있으며, 피카소를 중심으로 하는 입체파(cubisme)는 세잔 예술의 직접적인 전개라고 볼 수 있다. 작품을 구분하면 《목맨 사람의 집》(1872)이 그의 전기작품(인상파) 중에 손꼽히는 걸작이며, 《에스타크》 《카드놀이하는 사람들》 등은 원숙기의 작품이며 《목욕하는 여인들》《생트빅투아르산》 등이 대표적인 후기작품들이다. 그 밖에 정물에 관한 그림과 초상화에도 많은 걸작을 남겼다.